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Youngsan Theology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No. 0, pp.7-37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Mar 2019
Received 11 Jan 2019 Revised 13 Feb 2019 Accepted 18 Feb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3.47.7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나님 섬기기: 불의한 청지기 모델(눅 16:1-13)
박정수
성결대학교, 신약학 (pjs@sungkyul.edu)

Serving God in a World Dominated by Money: A Model of the Unrighteous Agent (Lk 16:1-13)
Park, Jeongsoo

초록

이 논문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를 헬레니즘 경제체제에 일상화된 세금 도급 및 대토지 관리 제도로 설명한다. 유대와 같은 로마의 속주의 경제체제는 헬레니즘의 경제체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이런 경제체제는 로마 사회에서 보호자-피보호자(patron-client)로 구성되는 패트로니지(patronage)라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통해서 훨씬 더 삶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이 체제에서 보호자에게 가장 큰 무형의 자산은 명예이다. 주인은 토지를 관리할 대리자에게 막강한 법률적·군사적 권한을 주어 주인의 명예를 포함한 모든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게 했다. 이들 관리자는 국가(왕)에 의해 고용된 세금 도급 임차인으로 헤롯 가문과 대토지 소유자나 귀족 부유층이었다. 헬레니즘-로마의 경제체제에서 공공부문과 비공공부문에 따른 구분은 엄격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소작농을 상대로 지대와 같은 세금과 소작료를 거두는 관리자에게 다시 도급을 주어 징세권을 부여했다.

비유의 청지기( )는 주인에게 총 소작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주인의 모든 권리를 위임받아 주인과 소작농 사이의 계약 관계에서 주인에게 대납할 계약 금액과는 별도로 과도한 소작료를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 재물은 ‘불법적’이지는 않으나 “불의한 재물”( )이 된다. 주인은 그와 같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한 이 ‘불의한’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한다. 주인의 해고는 청지기의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박탈하는 정치적 처사로 보아야 한다. 청지기가 소작인들과 맺은 과도한 이중 계약은 일시에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청지기는 주인 몰래 신속히 채무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준다. 주인이 청지기를 “영리하다”고 칭찬한 것은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이 주인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명예는 물론 미래의 안전장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고를 돌이킬 수 없는 긴급한 심판의 상황에 처했고, 이제 곧 물거품이 될 소득을 신속하게 포기하며, 착취했던 자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어 앞날을 준비했다. 세속적인 이 처사는 “지혜롭고” “정당한” 행동으로서 이제 제자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이 세상의 영리함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Abstract

This paper presents a model of a tax subcontractor who is routinely employed in the Hellenistic economic system to explain ‘the parable of the unjust steward’ (Lk 16:1-13). From the Hellenistic period, the subcontract system has been widely adopted in the land management of public sectors and individuals. In the Roman societies, the socio-economic system of patronage, which consists of a patron-client, was able to penetrate into the life much more. The greatest invisible asset to the patron in this system is honor. The owner gave his land’s agent a powerful legal and military authority to manage all the possessions including his honor.

The steward ( ) of the parable was entrusted with all the rights of the owner in exchange for paying the total tenant farming fee to the owner, so he could collect excessive fee separately from the amount of the contract that the peasants would pay to the owner. This wealth is not ‘illegal’ but “unrighteous money” ( ). The master decides to fire his unrighteous steward who dishonored his reputation. The master’s dismissal should be seen as a political act that deprives the governor of his entire economic base. The stewards’ excessive dual contract with the peasants will inevitably be nullified at one time.

Now, the steward calls the debtor quickly and secretly forgave the debt. It is understandable that the master praised the steward for being clever. Because his actions restored his honor and at the same time pursued his own honor as well as the safety of the future.

He was in an urgent situation where his dismissal was irreversible and he quickly forgave them their debts, which then gave up a ready-to-be-dismissed income and prepared for a permanent dwellings. This was a wise and ‘legitimate’ act. The final part of this parable can give a lesson as the ‘philosophy of money’ for the present Christian. If this is the cleverness of this world, how much more should the wisdom of a Christian be worth pursuing?


Keywords: the Parable of the Unrighteous Agent (Lk 16:1-13), Biblical Perspectives on the Use of Money, the Economy of Honor, Hellenistic Contractor of Taxation and Tenant Farming
키워드: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돈의 사용에 관한 성서적 관점, 명예의 경제학, 헬레니즘 징세와 소작 도급제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경제의 문제는 결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 ‘지배’는 주종(主從) 관계를 형성시키고 만다. 문제는 이 두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하나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맘몬을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13c)고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근대 이후에야 비로소 성립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삶의 양식으로는 고대 시대로부터 존재해 왔다. 그래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영리를 취득하기 위한 자본과 시장이 존재할 때부터 이미 자본주의(Kapitalismus)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헹엘(M. Hengel)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의 팔레스타인은 이미 이른바 화폐 경제 중심의 고대 ‘국가자본주의’가 농촌까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1) 필자는 이 글에서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13)에서 이 청지기의 행동 모델을 통하여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현대 사회에서 성서적 ‘돈의 철학’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토론하고자 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과 청지기, 그리고 채무자들은 자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의 유형을 보여 준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로 발달된 전 지구적 화폐자본주의 시대와 동일시될 수는 없겠지만, 맘몬이 지배하는 상태는 고대나 현대나 여전하다. 그 세계 속에 하나님만 섬기라는 예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가야 할까?

이 글의 목적은 이 난해한 비유 해석의 핵심 쟁점에 하나의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여 현대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을 위한 관한 실천적 적용을 찾는 데 있다. 비유의 핵심 쟁점은 청지기가 자의적으로 신속히 탕감해 준 채무자들의 빚이 자신의 소득인가 아니면 여전히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행위인가이다. 여기서 필자는 부자와 청지기, 채무자들의 관계가 헬레니즘 시대로부터 정착된 세금 및 소작료를 하도급으로 징수하는 관행과 연관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하도급제는 세금 징수와 같은 공공부분에서는 사라졌지만, 기업이나 개인 간의 임대업이나 대부업(貸付業)에서는 여전히 불법적이고 강탈적인 관행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하도급제는 징세와 소작 등 공공과 민간 경제 전반에 만연된 관행과 제도였다.

필자는 이런 고대 시대의 경제체제와 관행으로 비유의 문맥을 설명하고, 이른바 ‘명예와 수치’라는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으로 고대 문화를 접근하여 본문을 주석한다. 이러한 사회과학적인 주석의 관점에 기초하여 현대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e Simmel)의 『돈의 철학』2)에 나타난 견해를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경제 관념을 제시하고자 한다.3)


II. 비유 해석의 사회 경제적 문맥
1. 경제적·법률적 해석의 과제

이 비유는 성경에서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다. 비유를 해석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난해한 비유를 이해하는 데 역사비평에서 사회과학적 접근까지 수많은 주석 방법론을 동원해서 본문을 이해하고자 했다.4) 이 기나긴 해석사는 결국 이 난해한 비유의 요지는 과연 정당한가의 문제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청지기가 속전속결로 이른바 다운계약서를 작성하는 이 행동이 칭찬받는 이 비유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비록 부정직한 행동이지만 긴박한 심판의 상황에서 청지기가 취한 민첩하고도 영리한 세속적 행동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5)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데렛(J. Duncan M. Derrett)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경제적·법률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시도했다. 청지기가 자의적으로 행한 다운계약서는 원금이 아닌 이자에 관한 내용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결국 청지기의 영악한 행동은 미수금으로 남아 있는 이자를 줄여 줌으로써 주인의 명예를 높이는 동시에 채무자들에게는 과도한 이자를 탕감해 주었다는 것이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책망을 듣고도 주인의 재산을 더욱 줄게 하는 행동을 취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청지기는 주인의 심판 앞에서 긴급한 회개의 행동으로 부를 선용하는 지혜로운 처신을 하게 된 셈이다.6) 데렛은 대리인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해석하면서 결국 비유의 청지기를 대부업자 모델로 제시하는 반면, 베일리(Kenneth Bailey)는 채무자들이 1년간 농지를 임차한 대가로 일정량을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은 하키린(hakirin), 즉 소작농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서는 베일리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7)

피츠마이어(Joseph A. Fitzmyer)는 데렛의 논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자는 청지기의 몫이라고 주장한다.8) 그래서 청지기는 주인에게는 더 이상 손해를 입히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해고로 이자 징수가 불확실하게 되자 아예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이자 수입을 면제해 주어 미래의 생존 기반을 넓게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핵심 논거(論據)는 바로 9절의 ‘불의한 재물’이란 주인의 재산과 상관없는 청지기의 소유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경제체제에서 청지기가 별도의 이자를 자기 수입으로 잡을 수 있는 법률적 근거나 사례를 제시하지 못한 데 있다.9) 그는 자신의 논문 대부분을 비유의 전승과 편집에 할애하고 있을 뿐, 정작 논증은 데렛의 글을 인용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필자는 데렛과 피츠마이어가 세운 이 주장이 헬레니즘 시대에 만연했던 국가의 세금 및 토지세 도급 제도의 맥락에서 보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세금 도급이 확대되어 개인의 토지에 대한 소작료도 도급으로 매겨 징수하는 관행이 일상화되었다. 사실 이 비유의 생활 세계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법보다는 로마 지배하의 토지세나 소작료와 같은 사안과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본문의 ‘부자-청지기-채무자’를 첫 번째로는 국가(왕)-1차 세금 도급 임차인(혹은 2차 전대(轉貸)인 세리)-소작농으로, 두 번째로는 대토지 소유자-관리자-소작농으로 설정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두 모델은 공공부문과 비공공부문에 따른 구분이지만 이 둘은 헬레니즘-로마의 경제체제에서 구분되기 어려웠다. 이 사항은 아래 2와 3절에서 상세히 설명하게 된다.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했으나 지배당했다.’는 통설대로 로마는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를 군사력으로 지배하고 통치를 유지했으나, 헬레니즘의 통치와 문화 체계는 로마를 압도했다. 특히 경제체제에 있어서 토지와 세금 제도는 헬레니즘의 징세 제도를 거의 답습했다. 여기서 학자들 대부분은 고대 경제사학자 로스토프체프(M. Rostovtsev)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는데, 필자는 헹엘과 다른 몇몇 학자들의 논증을 주로 제시하려고 한다. 물론 이런 배경사적 접근으로 비유의 난제(難題)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쟁점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2. 헬레니즘 경제체제: 세금과 소작료 징수 도급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던 이집트에서 세금을 통한 경제적 지배 체제는 헬레니즘 왕의 통치 구현에 불가결한 사안이었다. 이 모든 것을 관할하는 직책이 바로 재상( )이었다. 온 나라는 왕의 사적 소유로서의 ‘집’( )이요, 재상(宰相)은 바로 ‘집의 관리인’( )이다. 물론 재상은 재무를 전담하는 실질적인 재무 관리인( )둘 수 있었다. 그래서 헹엘은 이러한 헬레니즘의 경제체제( )는 고대 시대의 이른바 ‘국가자본주의’였다고 한다.1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초기에 점령한, 고대의 팔레스타인을 명명했던 ‘코일레-시리아’( ) 그리고 이두매아 지역 등 셀레우코스 접경지대의 땅을 관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했지만 이집트 본토보다 왕의 사유지였던 이 땅에 대한 막대한 세금 수입이 국가 경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은 왕실 직할 토지에 속했고 관리들의 철저한 감독하에 자유 소작농과 왕의 농노가 경작했다. 이런 왕실 토지는 물론 특히 신전 토지도 민간인들에게 도급으로 주어졌는데, 예루살렘과 주변의 유대 지역도 그렇게 관리되었다.11)

대부분의 토지가 왕실 토지에 속했지만, 토지를 이주해 온 군인들에게 분배하거나 민간인들에게 분배하여 그리스식 세금 도급제를 실시해 철저히 관리했다. 월뱅크(F. W. Walbank)는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기원전 244년경 한 장군이 쓴 것으로 보이는 세금과 지대 납부 명령서를 인용한다.

아코아피스에게 4년째 파종 이후 왕실이 재점유한 프세나르프세네시스 지역에 있는 아시아 출신의 포로 알케타스의 보유지에 관하여 말합니다. 계약서의 보관자인 아폴로니오스는 알케타스가 그 토지의 경작자 헬리오도로스와 맺었다는 계약서를 우리에게 제출했습니다. 따라서 상기 지대를 왕실에 할당하도록 하십시오(파피루스 Petrie, 104=Select Papyri, no. 392).12)

이를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파라오 시절처럼 왕국 전체를 40개의 ‘속주’( )들로 나누고, 다시 속주를 ‘구역’( )과 ‘촌락’( )으로 나누어 구역장( )과 촌장( )을 통해 유지했다. 속주에 최고책임자인 총독으로 장군( )을 주둔하게 하고 그 휘하에 군사 관리로 재무관( )을 배치해 재정을 관리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13) 말하자면, 국가의 군사 관리가 경제를 독점하며 관리 운영하는 군산복합체였다. 바로 이들에 의해 지대와 세금을 짜내는 착취 체제가 구현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제적 부가 가장 번창하던 때는 필라델포스( ) 왕이 지배하던 시기였는데(BC 261-246), 아폴로니오스( )라는 인물은 천부적인 재상으로 국가의 토지 관리 및 생산과 상업과 무역 전반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 ‘주인’은 자신의 수하에 실질적인 관리자를 두었는데 그가 ‘오이코노모스’( ) 제논(Zenon)이다. 그에게 맡겨진 직책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이집트 본토 밖에 있는 왕령지(王領地) 관리였다.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는 이 시대의 경제체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현미경이다. 그가 남긴 보고서에는 프톨레마이오스 통치가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까지 침투했다는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군사 관리인 ‘영주’( ), ‘재무관’( ), 왕의 ‘서기관’( ), 행정 체계의 맨 말단 ‘촌장’( )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14)

헹엘은 로스토프체프와 체리코버(V. Tscherikover)가 연구한 내용에 기초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는 물론 이 점령 지역에서 토지 사용료와 세금 징수로 도급법( )을 시행했던 증거로 왕의 조례( )와 실행 규정( ), 특별포고문 등 모든 과정이 언급되어 있는 파피루스 라인(P. Rainer)을 자료로 제시한다.15) 여기에는 또 신약 시대의 ‘마을의 세리’에 해당하는 ‘촌락의 징세 도급관’들이 ‘촌장들’과 연합하여 가축 값을 매기고 감독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제논 파피루스에는 가자와 티레에 있는 무역소 세리들( )의 활동이 보고되고, 아폴로니오스가 관리하는 갈릴래아의 베트-아나트(Beth-Anath)에서도 촌락에 고용된 하급관리자로서 값을 매기는 일을 하는 코모미스토테스( )가 있었는데, 왕령지를 마을의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주고 그 공출량을 정확하게 계산했던 자료들을 제시한다.16)

셀레우코스 왕국의 경제는 왕실령, 총독령, 도시, 그리고 개인, 이 4가지 부문으로 구분된다. 왕실은 화폐 경제와 대내외 교역, 조세를 독점했고, 총독령은 국세로는 토지 경작에 대한 소작료( )와 지방세로는 왕령지세나 가축세, 관세 등의 조세를 국가 수입으로 거두어들이고, 폴리스도 도시 소속의 토지의 지대와 산물에 대한 조세 수입과 마지막으로 개인은 토지와 대부를 통해 소득을 올렸다.17) 이렇게 국가나 총독, 대토지 소유자들 수입의 원천은 지대와 소작료였는데, 이는 토지의 대부분이 관리자들을 통해 소작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경제적 지배 체제는 마카비 왕조의 유대 성전 국가가 지배하던 80여 년(BC 143-63) 잠시 이방인 왕들에게 바치는 조공이 면제되기는 했지만 로마가 유대 지역을 지배하여 헤롯 가문을 ‘대리자’로 내세우면서 원래 헬레니즘의 세금 체제로 돌아갔다. 헤롯 가문은 이 땅의 지배권을 얻기 위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이 땅의 ‘주인’이 된 로마의 원로원 혹은 황제에게 바쳤다. 물론 이런 세금 도급 행위는 다시 2차로 도급되어 중간 관리인에게 넘겨져 헤롯 관할하의 땅은 자신과 귀족 소유의 대토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18) 이렇듯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대 지역의 공공 토지와 개인 토지에 대한 조세는 소작인들에게 큰 차이를 둘 수 없었을 것이다.

3. 로마의 패트로니지(Patronage)와 명예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까지 점령함으로써 세계사에서 가장 막강한 대제국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설립한 황제정(皇帝政) 통치라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더욱 발전되어 나갔다. 토지의 근간은 황제에게 속한 황실 토지와 원로원에 속한 토지로 구분되는데, 지중해 동부 옛 헬레니즘 속주들은 대부분 황제의 토지였다. 황제는 이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대리인들(procuratores)을 두었는데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많은 수를 고용했고 점차 늘어났다. 로스토프체프에 의하면 이집트에서는 속주민들이 납부하는 직접세를 징수하는 시의 행정관들을 그 대리인들이 감독하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이후에는 상속세와 해방 노예에게 부여하는 세금, 공매세, 수출입세와 같은 간접세까지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정부의 재정과 황제의 재산 사이의 구분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19)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은 황제의 대리자로 헤롯 가문이 등장하여 권력과 부를 동원해서 위로는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아래로는 귀족들에게 땅을 분할하여 팔아서 갈릴리 지역 대부분이 대토지로 소작농들이 경작했는데, 헤롯 가문과 귀족들이 주인이었고 관리자들을 고용했다.20)

국가의 토지와 부(富)가 이렇게 원로원과 황제의 재산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앞서 설명한 대로 이미 헬레니즘 시대 ‘왕의 사유지’를 관리하는 ‘관리자’( )가 구현한 헬레니즘 경제체제가 그대로 지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시대의 대리인(procuratores)은 헬레니즘 시대의 관리자( )와 동일시될 수 있겠다. 즉, 그들은 국가(황제)로부터 세금대납을 통해 징세 도급을 맡은 헬레니즘 시대의 세금임차인의 다른 이름인 셈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고용한 공무원이라기보다는 헤롯과 같은 영주(분봉왕)나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고용된 고용인과 같은 사인(私人)이었다. 이들은 마을이나 단체 등에 대해서 1년 조세 총액에 대한 소작료 임차를 받아 대납하고 독점적인 징세권을 갖는다.21) 따라서 이들은 소작농들이 내야 할 지대와 임차료 총 금액에 대한 재량 권한이 있었고 따라서 착취의 관행은 일상화되었다. 그들은 대토지 소유자 정도의 부자는 아니었지만 상류층에 속했고 그만큼 백성들의 원성을 샀는데, 이들이 바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세리 혹은 ‘세리와 같은 자’라 하겠다(막 2:16; 눅 19:7).22)

여기서 헬레니즘 경제체제와는 어느 정도 구별된 로마의 이른바 ‘상호 후원제’(Patronage)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헬레니즘-로마 세계에서 인간은 상·하층이 뚜렷이 구분된 이원적(二元的) 사회 구조에서 생활했다. ‘왕과 신민(臣民)’, ‘주인과 종’이 그 상징적 관계이다. 한 집안의 가부장이란 여자, 아이 그리고 노예의 주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패트로니지로 구현된다. Patron-client, 즉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로 이루어진 이 체제는 “사회 경제적으로나 신분적으로 다른 상하 계층의 지속적인 결합으로서 재화와 용역의 주기적인 교환을 통하여 유지된다.”23) 피보호자는 자신의 삶과 소유를 보장받기 위해 보호자를 필요로 하고, 보호자는 자신의 사회 정치적 존재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피보호자들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물론 상류 계층의 협회나 촌락의 친족 혹은 하층민 사이에서 결성되는 상호 후원제와 같은 수평적 사회관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고대의 수직적 인간관계를 보완하는 정도였다. 로마 사회는 상류층 patron과 그의 권위에 복종하며 생존했던 client의 결합이 본질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했고, 사회적 규범과 가치는 그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상호관계에서 기능하는 근본 가치가 바로 ‘명예’이다. 1세기 지중해 세계의 사회적 관계에서 명예는 삶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였다.

말리나(Bruce J. Malina)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문학에서 명예는 권력과 부, 위엄, 개인적 충성, 우선권, 수치감, 명성, 용기와 탁월함과 같은 연관 가치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중심에 있었다.”고 명예의 가치를 진단한다.24) “명예란 한 사람이 자기의 눈으로 본 가치―즉 가치에 대한 자기 자신의 주장―에 더하여 그가 속한 사회 집단의 눈으로 본 그 사람의 가치이다.”25) 한마디로 말해서, 명예란 사회적 평판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예란 타고난 양과 획득된 양이 있는데 양자의 합은 사회적 총량에 의해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명예에 대한 대응 가치는 수치이다. 수치란 자신의 명예에 대한 민감함, 즉 사회적 여론에 대한 민감함을 의미한다. 명예와 수치에 의해서 이 총량은 조절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명예는 계산 가능한 사회적 가치로서 재화와도 같았다. 그래서 필로(Philo)는 “명성과 명예는 가장 불안한 재산”이라고 불평했다.26) 고대 로마 사회의 중심에 있는 상호 후원제란 결국 인간의 사회적 상호관계를 유무형의 재산의 총량 안에서 움직이는 사회경제시스템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III. 본문 해석

이제 필자는 앞에서 설명한 헬레니즘-로마 시대 징세와 소작 도급의 경제학과 명예와 수치의 상호 후원제의 관점에서 본문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지면 관계상 비유의 세세한 논점들을 다루기보다는 비유를 해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논쟁점만을 다루어 전체 비유를 해석하도록 하겠다. 먼저 필자가 사역(私譯)한 본문(눅 16:1-13)을 제시한다.

1.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한 청지기( )를 두고 있는 부자가 있었는데, 이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다는( ) 비난이 그에게 들렸다. 2. 그래서 주인은 그를 소환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에 대해 듣고 있는 이 말이 무엇이냐? 너의 청지기 직무를 반환하라( ). 너는 이제 더 이상 관리자로 일할 수 없다( ).” 3.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기를, ‘주인이 나의 청지기직을 면하려 하니 이제 내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구나. 4. 그래 내가 할 일을 알겠다. 이렇게 하면 내가 쫓겨난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맞아들이겠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의 채무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처음 사람에게는 “당신은 나의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라고 하자 6. “기름 백말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기 당신의 문서( )가 있으니 속히 앉아서 오십이라 고치시오.” 7.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그가 말했다. “밀 백석이요.” 청지기는 말했다. “여기 당신의 계약서가 있으니 팔십이라 쓰시오.” 8. 그러자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 )가 영리하게( ) 행했다고 칭찬하며 말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이 세대에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영리하다( ).”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27)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것이 쇠할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영접하리라. 10.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많은 것에도 신실하다. 이와 같이 가장 적은 것에 불의한( ) 자는 많은 것에도 불의하다( ). 11. 그러므로 만일 불의한 재물에( ) 신실하지 않다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 맡기겠느냐? 12. 또 만일 너희가 타인의 것에( )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 것을( )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거나, 하나에 집착하여 다른 하나를 멸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맘몬을 섬길 수 없다.

1. 청지기의 직무

우선 비유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며 설명해 보자.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 청지기는 곧 해고될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차례대로 불러 그 빚을 감해 주는 다운계약서를 속전속결로 처리하여 작성하였다. 이 액수는 상당하다. 기름 50말은 거의 500데나리온 정도로 농장 노동자의 일 년 반 품삯이다. 두 번째 사람도 거의 비슷하다.28) 만일 이렇게 해서 그가 관리하던 노동자들에게 모두 적용했다면 그 액수는 거의 하나의 촌락 전체의 세금 액수에 이른다.29)

이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은 그의 남은 계약 기간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급속히 처리되고 있다. 물론 고대 시대의 관리인들이 이 비유에 묘사된 방식으로 주인에게 소환되는 경우는 통상 즉시 해고되곤 하였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청지기직을 결산하라고 주인이 그에게 시간을 준 셈이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은 남아 있었다.30)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빚진 자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행동을 취해야 했기에 청지기는 속전속결로 처신해야 했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지기는 지금 채무자들에게 마치 자신이 아직 해고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지기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이렇다. 그가 채무자들과 다운계약서를 새로 체결함으로써 채무자들은 마치 보너스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나중에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주인이 이 문서를 그대로 인정할지, 또 인정한다 해도 수혜자들이 청지기의지기의 호의를 갚을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를 한 청지기는 어떤 종류의 관리자들이었을까?

오래전 마가렛 깁슨(M. D. Gibson)은 이와 유사한 암시를 한 바 있다. “청지기는 소작인들에게서 자기가 땅 주인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심지어 두 배나 되는 액수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물론 차액은 자기가 착복을 하고 말이다.”31)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유대의 법률적 관계를 조사한 데렛은 청 청지기가 주인의 대리인으로서 대부업자일 수 있다고 한다.32) 베일리는 이런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정작 비판의 결정적인 논거는 제시되지 않고 다만 비유에는 도급이나 대부업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만을 한다.33) 그러면서 그는 청지기가 합법적인 대리인(shaluah)으로서 임차한 땅을 관리하는 부동산 관리인이었다고 가정하는데, 역시 미쉬나에 나오는 법률을 근거로 제시한다.34) 멘슨(T. W. Manson)이나 미켈(O. Michel)이 주장하듯이, 이 청지기는 대부업보다는 추수할 것으로 예상되는 농작물 중 일정량을 바치는 소작인(hakirin)들의 토지 혹은 부동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35)

다만 베일리는 멘슨이 제시하는 세 번째 청지기 유형으로 “도시의 재무관과 같은 민사 관리인( , 롬 16:23)”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런 도시의 재무관은 헬레니즘 시대 속주(屬州)에 있는 도시는 물론 촌락에까지 세금을 징수하던 국가의 공적인 관리자였지만, 개인의 토지를 임대하고 소작료를 징수하는 일을 하던 사적인 관리자와 구분하기 어려웠다(II. 2.을 보라). 프톨레마이오스 3세인 에우에르게테스(BC 246-221)때 요르단 동부의 대부호 토비아스 가문의 요셉은 코일레-시리아의 무역과 토지를 독점하여 세금 징수 전체를 관할하는 지배자로 화려하게 등장한다.36) 그는 요르단 동쪽 지방의 경제적 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방인 왕조에게 세금을 대납하는 사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로마 시대에 이르면 국가나 속주의 땅은 왕이나 원로원 위원과 같은 부자들의 사적인 소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누가의 또 다른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던” (눅 19:2, ) 삭개오는 더 소규모의 촌락에 속한 징세 도급관으로 볼 수 있겠다. 그는 부자로서 악명이 높았다. 이는 당시 모든 세리들에 대한 ‘죄인’이라는 평판을 대변하기도 했지만, 그는 불특정인을 착취했고( ) 그것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한다(눅 19:8). 4배나 착취한 것으로 고백하는 세리 삭개오의 착취의 관행은 누가복음 3:10-14에서 세례 요한의 이른바 ‘신분별 회개목록’에서 잘 설명된다. 세리들은 “고시된 것 이상”( )의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착취하는 행위’( )는 삭개오가 한 행위와 동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군인들은 유대인 용병들로서, 로마의 세금 청부업을 맡아 도급 받은 세리들이 국세와 동시에 토지에 관한 징세 소작으로 백성을 착취하며 부를 축적하는 데 협업을 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청지기가 소작농에게 지대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마을의 ‘세리’로서 재무관 역할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37)

2. 명예의 경제학

비유의 마지막 8a절에서 주인은 그를 ‘영리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스어 ‘프로니모스’( )로 번역된 이 단어를 대체하는 히브리어는 ‘호크마’(지혜)였다. 호크마가 형이상학적인 지혜로 번역될 때는 소피아(sophia)로, 생활 속의 지혜로 번역될 때는 ‘프로니모스’로 번역될 수 있었다. 주인은 도대체 왜 그를 ‘영리하다’고 칭찬했단 말인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만일 주인이 청지기의 이 영리한 행동을 무효로 돌리고자 한다면 채무자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주인이 마을에서 쌓아 왔던 덕망, 즉 후덕한 후원자라는 명예를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그 영리한 행동으로 청지기는 주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주인의 명예를 더욱 더 높여 놓고 말았다! 설사 주인이 후덕하지 않아 청지기를 괘씸하게 생각할지라도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이미 통장에 ‘자비의 보너스’를 넣어 주었는데 다시 돌려 달라고 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명예라는 ‘재산’을 이번엔 주인 자신이 허비하는 꼴이다. 그러니 주인은 이 청지기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청지기의 이 발칙한 행동으로 주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야말로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이 비유는 앞의 누가복음 15:11-32의 ‘탕자의 비유’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16:1에 나오는 연결사 ‘데 카이’( )는 “이제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15:3에 단 한 번 언급된 “비유”가 15장의 3가지 비유에 이어서 이 청지기의 비유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두 비유는 아들과 청지기 모두 아버지와 주인의 재물을 “낭비하고 있다”( )라는 표현을 공유하고 있다. 주제적으로도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돌아온 아들에 대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관대한 용서를 주제로 하고 있고,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도 결국은 빚진 자에게 자비로운 주인의 관용을 다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38) 물론 이 비유 자체에서는 주인의 그런 성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주인의 성품과 뜻을 이렇게 신뢰하였으리라. ‘주인은 빚진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 영리한 행동을 결코 나무라지 않고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명예가 재산의 일부였던 상호 후원제의 관계망 안에서 이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행동은 단지 재화의 낭비만이 아니라 주인의 ‘명예’를 실추하였던 행위도 포함되었음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로마 사회는 황제와 총독, 왕과 영주, 지주와 소작인, 가부장과 식솔들(부인, 자녀, 노예들) 등, 온갖 인적인 네트워크로 형성된 물질적인 상호관계로 구축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명예는 보호자에게는 가장 큰 자산이다. 토지는 소작농들에 의해서만 경작될 수 있고 그 땅은 원래 이들의 것이었으나 군사력에 의한 강제와 ‘세금의 경제학’으로 부자에게 이전된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부자(patron)의 고객(client)이 아닐 수 없다. 이 둘 사이에는 ‘명예와 수치’의 경제학이 작용한다. 땅의 주인은 자신의 땅을 개발함으로 고객을 ‘점잖게’ 착취해야 한다. 악역은 대리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명예의 자산을 유지하여 지속적으로 그곳 주민들에게 환심을 사고, 명예라는 ‘재산’을 보존하지 않는다면 소요가 발생하여 머지않아 원로원이나 황제로부터 땅은 물론 모든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다.39)

3. 채무탕감의 재원

그럼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으로 선심을 썼는가? 아니면 원금에 자의적으로 부가한 이자 혹은 ‘프리미엄’을 포기한 것인가? 사실, 주인이 청지기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주인이 자비로운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채무의 탕감이 청지기의 몫에서 나간 것이라면 주인은 잃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청지기가 자신의 지위가 박탈되는 순간 휴지장이 될 그런 빚 문서라면 청지기도 더 잃을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삭개오가 회개하여 착취한 것을 반환하는 행위와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더 잃을 것이 없고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둔 ‘영리한 회개’라 할까? 이렇게 하여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던 청지기는 자신이 해고당하게 된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행한 이 ‘영리한 낭비’를 통해서 정말 ‘대박’을 친 셈이다.

물론 본문에서 “주인의 채무자” 혹은 “당신은 나의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라고 표현하기 때문에(5절) 이 계약은 주인과 채무자들과 맺어진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는 수사적인 표현일 수 있다. 또한 베일리는 청지기가 임차인과 임대인(주인)이 맺은 계약을 관리하며 급료를 받았고 또 부수적으로 얼마를 챙길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장부에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주인과 임차인은 자신이 지불할 액수를 알고 서명하고 관리인이 배서하기 때문에 청지기의 장부에 기록된 액수는 주인과 맺은 계약 액수라고 생각한다.40) 하지만 베일리는 청지기가 단순히 계약의 중개인일 뿐 세금이나 소작료를 대납하고 자의로 징수액을 결정할 수도 있는 탐욕스런 청부업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경우 부자는 모든 세금 혹은 소작료의 징수를 청지기에게 도급하는 의뢰인으로 둘 사이에 정해진 소작료를 받으면 그뿐이다. 주인이 더 큰 수입을 원한다면 임차인이 아니라 대리인으로 내세운 청지기와 도급계약액을 높이거나 이 액수를 수락한 대리인에게 도급을 주면 그만이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들 지역의 세금 징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해마다 자유 입찰을 통해서 관공서들이나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하도급으로 주어졌다고 한다.41)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Casius)는 엄청난 세금으로 은화 700달란트를 토파르키아( )의 영주( ) 헤롯을 포함한 4명의 행정관(procurator)이요 관리자들( )에게 도급으로 강요했다. 다른 관리인들은 이를 부담하지 못했지만 갈릴리 군사령관 헤롯은 가장 먼저 책임액을 바쳤다고 한다.42)

제국과 속주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황제와 총독의 정치 경제학은 일상의 임대차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부자와 청지기의 관계에서도 관철된다. 요컨대, 청지기는 단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작은 급료를 받고 근근이 살아가는 낮은 신분의 노예라기보다는 주인의 소작료를 대납할 만한 재산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 주인에게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지위를 향유하는 ‘세리와 같은 자’다. 그에게 제한이 있다면 주인과 소작인 사이에 체결된 원 계약에서 주인의 명예라는 재산을 파괴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II. 비유의 적용
1. 돈의 사용

다음으로 누가는 이 비유를 9-13절과 결합함으로써 ‘재물의 사용’이라는 구체적인 적용을 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누가는 신학적 관점에서 경제와 신앙을 적극적으로 결합한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a절)는 세속적인 격언이 사용된다. 청지기의 행동이 비록 영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직한 처사이거나 ‘진심어린 회개’의 행동은 아니었으리라. 게다가 그가 착취한 돈은 부당한 것이고,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속전속결의 찰나적이고 불의한 재물을 유용하게 사용한 처사는 ‘돈의 지배력이 떨어지는 영원한 세계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9b절)라는 교훈을 남긴다. 여기서 돈이란 객관적 도구이기 때문에 돈의 효용성이 문제이지 “불의한 재물”이든 어떤 돈이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적 논쟁은 끝이 없을 정도다. 이 논쟁을 여기서 다루기에는 지면상의 제약이 많다.

하지만 10절에서는 돈의 양적인 속성을 대조하여 “가장 적은 것”과 “많은 것”이 언급되며, 다시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이라는 질적인 대조로 전이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신실함’이다. 11절에서도 돈의 사용과 돈을 지배하는 존재에 대한 ‘신실함’에 일관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돈은 근본적으로는 제한적이고 중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주체적 자각과 마인드에 의해 질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교훈이다.

그래서 돈의 대립적인 속성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근본적인 격언으로 끝난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맘몬을 섬길 수 없다”(13a절). 객관적인 도구에 불과했던 돈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주인으로서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돈은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 필연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인가 맘몬인가?

2. 짐멜의 ‘돈의 철학'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은 1900년 그의 주저 『돈의 철학』에서 돈을 현대 세계를 철학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중대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돈은 단순히 경제적 교환 수단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위와 관계를 매개하고 규정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의미의 돈의 경제학과 사회학을 넘어 돈과 현대 문화의 보편적 특성 및 관계를 추구하는 ‘돈의 철학’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현대 세계의 철학적 인식 수단이 왜 돈인가? 돈은 실천적 세계에서 “보편적 존재 형식의 가장 명백한 실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돈은 가장 추상적인 것을 명료하게 해준다. 돈은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갖는 관계의 적합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짐멜이 주장하는 바, 현대 세계에서 돈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돈은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가치로 전환시킴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없애버린다. 돈의 유일한 특징은 수량이기에 모든 인간을 수량적 대소 관계로 환원시킴으로써 수량적 논리에 종속시켜 버린다. 결국 돈은 현대인을 인간적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돈은 개인의 주체적 인격의 발달과 인간적 문화 촉진의 물적·경제적 기반이 된다. 현대 시민 계급은 역설적이게도 다름 아닌 돈의 소유를 통해서 돈이 가지는 수량적 의미를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돈을 소유한 개인은 이제 생존을 위한 노동과 투쟁의 유물론적 단계를 벗어나서 개인적·인격적 삶과 주체적·인격적 문화에 관심을 갖고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돈이라는 물질적·경제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름 아닌 이 돈의 축적과 소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돈의 ‘질적 논리’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노동자 계급은 물적·경제적인 것에 의하여 전인격적인 통제와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 이른바 실천적 물질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노동자 계급 또한 돈의 ‘질적 논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다.

짐멜은 당시 시민 계급이 당시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적 강제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를 니체(Friedrich W. Nietzsche)처럼 인간의 역사에서 나타난 가장 천박한 것이나 문화의 파괴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서 물질문화이며 현대 세계에서 새로운 정신문화의 물질적·경제적 토대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면 ‘돈과 영혼’의 결합은 가능해진다. 짐멜의 『돈의 철학』은 ‘돈과 영혼’의 관계 또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관계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겠다.

3.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표현했던 자본주의적인 문화 발전의 이른바 “마지막 단계의 인간”(die letzten Menschen)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피폐한 인간상을 연상시킨다. 돈에 영혼을 팔고 있는 오늘의 현대인은 참으로 “정신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이 아닌가?43) 예수의 비유에서 종종 나오는 주인과 종이 ‘결산하는 장면’은 종말론적인 문맥을 지시한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역시 종말론적 심판을 앞둔 인간의 마지막 행위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누가복음 16:19-31의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역시 그렇다. 그의 호화로운 삶의 대문 앞에는 비참한 거지가 늘 있었다. 하지만 부자의 영혼은 재물과 향락에 팔려 그의 고통을 보지 못했다. 죽음 너머에 부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심판이었다. 반면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부자와 거지 사이에 놓인 저 거대한 협곡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것이 쇠할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를 연상시킨다. 주인의 마지막 심판 앞에서 너무나도 ‘영악한’ 행위를 하는 청지기는 니체가 말한―물질문화의 “마지막 단계의 인간”을 극복한―“초인”(Übermensch)도 아니고, 막스 베버가 말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격체로서 주관적 의미 부여와 가치 정립에 입각해 행위하는 개인들”로서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을 추구하는 “경제적 초인”(Ökonomische Mensch)도 아니다.44) 그는 단지 해고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긴급하게 처세한 “이 세대의 아들들”(눅 16:8)에 불과하다. 하지만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빛의 아들들”은 그들의 ‘영리한’ 행동을 배워야 한다. 돈의 양적 가치를 질적 가치로 새롭게 창조할 초인에게 때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다음으로 청지기는 그의 마지막 행동이 비록 부정직하지만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인을 신뢰할 수 있었다. 경제학적으로 본다면 주인의 명예를 더 손실할 것은 없기에 그의 뜻에 대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이다. 청지기의 영혼은 이제 맘몬의 지배가 아니라 주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청지기가 자신의 낭비 혹은 쾌락과 탐욕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 모멘텀은 바로 이 사건에서 일어난다.

‘주인-청지기-채무자’로 맺어진 물질적·사회 경제적 네트워크에서 청지기는 이제 비로소 자각적이고 주체적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돈은 이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옭아매는 도구에서 해방하는 도구가 된다. 이렇게 하여 돈의 질적인 속성이 강화되고, 인간의 행위 자체의 부당성은 주인의 전적인 지배를 따르는 신실함에 용해되어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버는 과정 자체에서 일어나는 부당성과 불법성의 차이는 참으로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부동산 투기는 불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법에서는 이자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과연 영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이자를 추구하는 것은 정당한가?


V. 나가는 말

이제 논의를 요약해 보자. 필자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를 설명하기 위해서 헬레니즘 경제체제의 공공부문에 널리 정착된 세금도급관이라는 청지기 모델을 제시했다. 소작료 도급 체계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개인의 토지 관리에도 널리 도입되어 로마 사회에서는 패트로니지라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통해서 훨씬 더 생활 세계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이 체제는 황제와 총독, 왕과 영주, 지주와 소작인, 가부장과 가족들(아내, 자녀, 노예들) 등,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구성된 인적인 네트워크로 물질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하는데, 여기서 보호자에게 가장 큰 자산은 명예이다. 주인은 주인의 토지를 관리할 대리자에게 막강한 법률적 군사적 권한을 주어 주인의 명예를 포함한 유무형의 모든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게 했다.

비유의 청지기는 주인에게 총 소작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주인의 모든 권리를 위임받아 주인과 소작농 사이의 계약 관계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작농을 사적인 지배하에 둘 수 있었던 청지기는 주인에게 대납할 계약 금액과는 별도로 과도한 소작료를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 돈은 고대 당시로서는 불법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불의한 재물”이 된다. 주인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며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이 불의한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한다. 주인의 해고는 청지기의 기반을 송두리째 박탈하는 정치적 처사로 보아야 한다. 청지기가 이제까지 소작인들과 맺은 계약은 일시에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문맥에서 주인이 청지기를 영리하다고 칭찬한 것은 이해가 된다. 청지기가 주인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명예는 물론 미래의 안전장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그의 행동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청지기는 자신의 해고를 돌이킬 수 없는 긴급한 심판의 상황에 처했고, 이제 곧 물거품이 될 소득을 신속하게 포기하고 착취했던 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빚을 탕감해 주어 영원한 처소를 준비했으며, 그것은 지혜로운 행동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은 현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돈의 철학’에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이 세상의 영리함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한국교회의 경제적 번영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적인 삶을 추구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45)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를 배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까?46)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명기에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구원받은 증거를 직업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행위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행위칭의주의’(Werkgerechtigkeit)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개인은 자신이 신 앞에 예정된 자임을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이른바 ‘행위구원주의’(Werkheiligkeit)이다.47)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는 도구로서 직업 대신 ‘돈의 사용’을 대치해 놓아도 될까? 돈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비록 주관적이나마―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창조해 나갈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돈’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혼’을 결합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최종적 형태의 물질문화를 다시금 새로운 정신세계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Notes
3) 현대의 사회과학 분야에 비전문가인 필자로서는 짐멜의 사상에 정통한 김덕영의 해제를 통하여 신학적 적용점을 진술하는 것이 좀더 안전할 것 같다. 논의 종합을 위하여 Max Weber,『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김덕영 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10)에 관해서도 잠깐 언급할 것이나, 이 역시 김덕영의 번역과 설명을 참고하여 적용 부분에 간단히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베버의 책을 번역한 역자의 해제, “종교·경제·인간·근대: 통합과학적 모더니티 담론을 위하여,” ibid., 513-670을 참고하라. 또한 짐멜에 대해서는 김덕영, “George Simmel,『돈의 철학』,”『사회비평』제24권 (2000): 92-103을 참고하라. 짐멜의 이 책을 다루는 또 다른 글로는 신응철, “현대문화와 돈 그리고 개인-짐멜(G. Simmel)의『돈의 철학』에 나타난 문화와 돈의 관계를 중심으로,”『동서철학연구』53권 9호 (2009): 113-34를 참고하라.
4) 이 글에서 핵심 쟁점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필자의 논점만을 제시하기에 그 기나긴 해석사는 생략한다. 해석사만을 서술한 한국 학자의 논문으로는 유태엽,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의 해석학적 고찰,”『신학과세계』제83호 (2015): 6-34를 참고하라.
11) Ibid.
15) Ibid., 107 각주 131.
16) Ibid., 108.
18) 예컨대, 세겜 근처에 있는 1,000헥타르가 넘는 콰바라트 베니-핫산(Qawarat Beni-Hassan)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곳 동쪽에 있는 하리스(Haris)는 헤롯이 로도서의 프톨레나마오스 장관에게 주었던 아루스(Arus)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요세푸스 War, 2.69). Ibid., 187-88.
21) Ibid., 302-303
22) Ibid., 300-305.
27) 두 개의 명사 ‘맘몬’과 ‘불의함’이 결합된 이 아람어적인 표현(“불의의 맘몬”)은 11절에서는 “불의한”이라는 형용사로 윤색되어 사용되고 있다.
34) 이 사항은 호로비츠(Horowiz)가 미쉬나에 나오는 세 종류의 대리인 유형은 물론 토지 임대차를 규정하는 법률에 대한 설명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비유보다 후대의 자료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사용한다는 데 더욱 문제가 있다. 호로비츠의 논증을 인용하고 있는 ibid., 167-68 각주 16과 20 참조.
36) Jos. Ant, 12.145ff.
38) 이 두 이야기는 그 밖에도 ‘아들/종이 아버지/주인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거나, 깨진 신뢰와 여기서 생기는 문제를 다루는 등’ 상당히 많은 유사점이 있다. Bailey,『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515.
41) Jos. Ant 12.155, 169, 175 이하. 헹엘은 소아시아의 프톨레마이오스 도시들의 세금들 역시 이와 유사하게 하도급으로 배분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Hengel,『유대교와 헬레니즘 1』, 109 각주 139.
44) Ibid., 536.
45) 김동수, “영산 축복론의 확장,”『영산신학저널』Vol. 43 (2018): 185-209에서 그는 영산의 신학을 전 지구적 평화와 행복의 차원에서 번영론을 펼친 미로슬라브 볼프를 통하여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하는데, 두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강조를 둔 오순절신학이라는 공통의 유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46) 장흥길,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사회구원 이해에 관한 신약성서 윤리적 평가,”『영산신학저널』Vol. 17 (2009): 93-133은 영산의 구원론을 전인적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이를 사랑과 나눔의 삶으로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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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동수, “영산 축복론의 확장”, 『영산신학저널』, 43, (2018), p18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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