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2, No. 0, pp.81-120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7
Received 10 Oct 2017 Revised 11 Nov 2017 Accepted 15 Nov 2017
DOI: https://doi.org/10.18804/jyt.2017.12.42.81

신앙, 민족, 여성:
김신옥 목사의 생애와 사역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역사신학 (mspark@stu.ac.kr)

Faith, Nation, Women:
The Life and Work of Rev. Seen Ok Kim
Park, Myung Soo
Funding Information ▼

초록

본 연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오순절 사역자인 김신옥 목사의 생애와 사역을 연구했다. 김신옥은 넓은 의미의 성령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이며,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오순절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김신옥은 서북 기독교 민족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대전에 세운 대성학교를 통해서 하나님, 민족,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김신옥은 미국에 있는 국제복음교회와 관계를 맺고, 대한예수교복음교회을 창립하고, 건신대학원대학교를 통하여 목회자를 양성하였다. 김신옥은 안수받은 오순절 여성목사였지만 진보적인 여성운동가라기보다는 남편과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함께 사역하는 가족 중심의 사역자였다.

김신옥의 생애와 사역은 복음주의적이며, 오순절적인 신앙에 기초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신앙이며, 이것을 위해서 학교와 교회가 도구로서 사용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Abstract

This study describes the life and work of Rev. Seen Ok Kim, one of the representative Pentecostal women in Korea. Inheriting the traditions of the Holy Spirit movement in a broad sense, Rev. Kim is an archetypical Korean Evangelical Christian who accepted the Pentecostal view of tongues―that it is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Kim subscribed to traditions of the Northwest Korean Christian Nationalism and founded the Daesung School in Daejeon to teach people to love God, the Nation, and their neighbors. Rev. Kim engaged in relations with the International Church of Foursquare Gospel in USA, established the Korean Church of Foursquare Gospel, and trained pastors through Gunsheen Graduate School University. Although Rev. Kim was an ordained Pentecostal woman pastor, she was not a progressive feminist but a family-oriented minister that had the support of her husband and children.

The life and work of Rev. Kim can be characterized as Pentecostalism and rooted in Evangelical tradition. Of central importance to Rev. Kim was her faith to save humanity through the Gospel, and to this end, schools and the churches have been instrumental.


Keywords: Seen Ok Kim, International Church of Foursquare Gospel, Dae Sung School, Refugees from North Korea, Christian School, Pentecostal Movement, Christian Feminist Movement
키워드: 김신옥, 복음교회, 대성학교, 월남 피란민, 기독교 학교, 오순절운동, 기독교 여성운동

I. 들어가는 말

최근 역사학계는 기존의 역사가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His Story라는 것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역사에서 여성의 이야기, 즉 Her Story를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역사학계의 흐름은 교회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과거에 밝혀지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미국교회사에서 팔머(Phoebe Palmer)나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과 같은 성결 오순절운동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에서는 조용기 목사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만든 최자실 목사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1)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는 김신옥 목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성회와 더불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오순절교단인 국제복음교회를 창설했다. 한국에서 여성이 한 교단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김신옥의 생애를 보면 그는 단지 오순절운동의 한 여성교역자가 아니라 민족운동, 교육운동, 여성운동 등 다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신옥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회심의 체험을 했으며,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고, 월남해서는 기독교교육을 통해서 국가와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이런 점에서 김신옥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김신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신옥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의 제자이며, 오랫동안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임열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2) 이 연구는 인간적으로 측근에서 잘 아는 인물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김신옥을 한국교회사, 오순절운동사, 여성사의 입장에서 보다 역사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김신옥의 자서전,『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라』를 중심으로 김신옥을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3)

필자는 본 논문에서 김신옥을 네 가지 차원에서 서술할 것이다. 첫째는 김신옥의 기독교 입문과 신앙 체험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의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것이 어떻게 오순절 신앙과 연관되는가? 하는 점을 밝히려고 한다. 둘째는 김신옥의 민족운동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의 생애와 민족운동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그의 교육 사역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는 김신옥의 기독교 사역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그가 미국에서 안수를 받고 돌아와서 미국의 국제복음교회와 관련해서 복음교회를 세우고, 세계 선교를 감당하면서 한국교회에 이바지하였다. 넷째는 여성사의 입장이다. 한 여인이 어떻게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이렇게 뚜렷하게 자신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II. 김신옥의 기독교 입문과 신앙 체험의 유형

김신옥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꼽고 있다. 그가 교육 사업에 헌신한 것도 이것을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신앙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김신옥을 연구하면서 그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김신옥은 어려서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관을 배웠다. 그의 이웃에 살던 덕흥이 할머니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마귀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4) 필자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덕흥이 할머니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세계관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계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종교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신앙은 가능했다고 본다.5) 이런 한국인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더욱 확실해졌고, 이것은 오순절 신앙으로 인해서 더 구체화되었다.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과 오순절 전통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신옥이 구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은 그가 평양에 있는 감리교에서 세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다닐 때였다. 이 학교에서는 신앙생활을 가르쳤고, 이것이 김신옥으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그가 평양정의여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되었다. 이 학교 역시 감리교 계통의 학교였고,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켰다. 아울러서 이 학교는 당시 일본인이 세운 공립학교와는 달리 민족 교육도 강조했다. 필자는 이 같은 김신옥의 기독교 학교생활은 후에 그가 미션 스쿨을 세워 종교 교육을 하는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신옥이 보다 분명한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은 해방 직후 1945년 12월 말 장질부사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할 때였다. 다음해인 1월 16일, 병상에서 꿈을 꾸었고, 꿈에 그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천사가 그에게 더러운 옷을 입고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의 보혈로 자신이 정결케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런 정결케 되는 경험과 함께 그는 자신이 고급 시계를 도둑질하고, 직장에서 부정한 일이 생각이 나서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아울러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부모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한 후에 그는 한동안 투시의 은사가 나타나서 사람을 보면 그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6)

우리는 이 김신옥의 체험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에게 꿈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중요한 매체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꿈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둘째, 신앙 체험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보혈도 인한 마음의 정결이라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신자들은 성령 체험과 정결 체험을 동시에 하고 있다. 셋째, 이런 체험에는 대체로 철저한 죄의 고백이 선행된다는 것이다.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공개적인 죄의 자백이 이루어졌다. 넷째, 이런 신앙 체험은 반드시 전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김신옥은 곧바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도하였고, 이것은 열매를 맺었다. 다섯째, 이런 영적인 체험은 각종 은사와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교회에 오순절 은사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같은 영적인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섯째 이 같은 영적 체험은 종종 질병 가운데 나타나며, 이런 체험과 함께 신유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신옥이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할 때 그는 육체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7) 이상과 같은 김신옥의 종교 체험은 그의 생애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이 된다.

김신옥은 병에서 회복하자마자 월남하였다.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는 북한에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월남하였다. 월남한 그는 서울에서 현 영락교회에 출석하면서 당시 영락교회에 구내 건물에 있던 조선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1946년 1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경직 목사가 교장, 송창근 박사가 교수, 공덕귀가 여자기숙사 사감이었는데, 1946년 3월말에는 송창근이 교장이 되면서 조선신학교와 합병하였다. 조만식은 김신옥에게 월남하면 송창근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신옥의 이 신학교의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성직자 지망생 공동체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얼마 후에 신학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중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8) 아마도 이런 기존 신학교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미국으로 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 김신옥은 월남 후 안기석과 결혼하였고, 피란을 거쳐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학교를 세워 운영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에는 전신마비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충남 공주의 세천기도원에 가게 되었고, 여기에서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를 드리면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때 기도원에 있던 차 권사라는 분을 통해서 안수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결국 혼수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몸의 치유와 함께 영혼의 소생,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9) 여기에서 우리는 병의 치유는 단지 병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치유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치유는 항상 전인적인 치유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김신옥의 신앙과 기도원의 관계이다. 한국 기독교에는 교회 구조와 기도원 구조가 있다. 교회가 일상적인 신앙생활의 자리라면 기도원은 위기를 맞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찾아가는 특별한 신앙생활의 자리라는 것이다. 김신옥의 신앙생활은 일상적인 교회 구조만이 아니라 기도원과 같은 특별한 신앙 구조를 갖고 있다. 김신옥의 자서전에 보면 그는 학교와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거의 어김없이 기도원을 찾으며, 여기에서 중요한 결단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신옥은 해방 후 삼각산의 박재봉 목사, 그 이후에 한얼산의 이천석 목사 등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런 기도원의 신앙 구조는 뒤에서 언급할 김신옥과 오순절 신앙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김신옥의 신앙은 신유의 은혜를 경험하는 가운데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 못지않게 그의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것은 성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것은 이미 1946년 1월의 체험에도 나타나지만 미국에서 유학 기간 중에도 다시 명확하게 들어난다. 그가 1966년 미국에 유학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는 환상 중에 “독기를 제거하시오.”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것은 “사납고 나쁜 성질”을 뜻하는 것이었다.10) 그 후 그가 워싱턴주 케스켓 마운틴에 있는 루터란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자 그는 자신의 속사람, 곧 “죄 덩어리”를 보게 되었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것을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설명한다.11)

필자는 이 같은 김신옥의 성결 체험은 한국 감리교와 성결교회를 이어오는 중요한 은혜 체험의 방식이라고 본다. 김신옥은 원래 감리교 계통의 학교를 다녔으며, 감리교인인 박재봉 밑에서 은혜를 받기도 하였다. 이 전통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며, 인간 내면의 죄성을 정결케 하자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성령세례의 결과는 성결이라고 강조한다. 필자는 더 나아가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이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결의 체험을 강조했다고 본다.12) 김신옥이 이 같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십자가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한 성결의 체험이 그의 핵심 사상이라고 보며, 이것은 감리교와 성결교, 더 나아가서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본다.

김신옥의 신앙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영적 전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적인 세계를 믿어 왔고,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신앙은 그가 미국 루터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나타났다. 당시 루터란 신학교는 성령 사역과 마귀의 역사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신옥은 이곳에서 영적인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고,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김신옥을 찾아와서 상담하고 기도하였다. 이때 그는 방언과 한국어로 기도하였다.13)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김신옥의 신앙 형태는 그가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만나기 전에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 또 하나의 예가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미국의 오순절운동은 오랫동안 믿음의 고백을 강조했다. 아직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신앙이다. 이것은 19세기 푀비 팔머를 통해서도 나타났던 내용이다.14) 그는 믿고 회개하면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이 약속에 의지해서 입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신옥 부부도 이와 비슷한 신앙을 가졌다. 그의 남편 안기석 장로는 항상 “믿음은 실상”이라고 믿어 왔는데, 기도 중에 성남중학교의 인가를 확신하고,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식으로 인가가 나지는 않은 상태였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인가는 나서 학생 모집을 잘 이루어졌다.15) 이것은 그가 매우 적극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신옥의 이 같은 열정적인 신앙은 그를 단지 평신도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학교는 날로날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학교의 영적인 상태는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김신옥은 이 같은 현실을 보면서 자신이 신학을 공부해서 본격적으로 학교를 진정한 미션 스쿨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66년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그는 40세를 넘었고, 남편과 다섯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우선권은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16)

김신옥은 미국에서 루터란 신학교를 마칠 즈음에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원용 목사를 통해서 미국의 오순절교단인 국제복음교회(International Church of Foursquare Gospel)를 만나게 되었다. 고원용은 김신옥의 신앙 유형이 오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 교단을 소개했던 것이다.17) 국제복음교회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신유사역자인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이 세운 오순절교단이며, 맥퍼슨은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초기 지도자인 덜햄(William H. Durham)의 영향을 받았다. 이 교단은 중생, 성령세례, 신유, 재림을 믿으며, 여성사역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미국의 오순절교단 중 하나님의성회와 더불어서 비웨슬리안 계통의 오순절교파이다. 김신옥은 국제복음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한국에 와서 대한예수교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고원용이 주장한 대로 김신옥의 신앙은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매우 유사하다.18) 김신옥이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세계관, 강력한 성령 체험, 삶에서 경험하는 신유, 그리고 영적 전쟁, 믿음의 선포 등은 미국의 오순절운동이 가지고 있는 내용들이다.19) 하지만 동시에 김신옥의 신앙 유형은 이미 한국교회에서 이미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미 한국교회는 넓은 의미의 오순절 전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0)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령운동이라고 불린다. 사실 방언을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증거라고 보는 것만 제외하면 소위 전통적인 오순절운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21) 사실 이것은 김신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김신옥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김신옥의 신앙에 오순절적인 요소들이 많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주의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복음주의라고 불렀다. 이것은 북장로교의 선교 정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1905년에 설립된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모임의 명칭을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복음주의란 체험적인 신앙, 즉 중생의 복음을 강조하는 신앙을 말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깊이 있는 성령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간절한 바램은 1907년 대부흥으로 이어졌고, 선교사들은 이것을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렀다.22) 또한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장로교 선교사인 사무엘 마펫은 세례를 받는 자신의 교인을 보면서 성령세례를 받기를 사모한다고 기록하였고,23) 한국의 대표적이 장로교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과서인 가옥명의『성령론』에는 중생 이후 이차적인 은혜 체험인 성령세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24) 이 같은 복음주의 신앙에 방언을 강조하는 좁은 의미의 오순절운동이 들어온 것은 1920년대 말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방언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언을 성령세례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아울러서 한국교회는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서양 의학은 강조하였지만 신유의 복음은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을 읽은 한국인 사역자들은 신유의 사역을 행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김익두의 사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25) 그리고 실제로 한국교회에서 신유는 신앙 체험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초기 한국에 와서 선교한 선교사들은 강력한 전천년설 지지자들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전천년설적인 재림론이 한국에 번역되었고, 이것은 길선주와 같은 유명한 부흥사에 의해서 한국에 널리 전파되었다. 특별히 일제하 어려운 상황에서 전천년설은 곧바로 일본 제국에 도전하여 새로운 왕국으로 이해되어 일제 말 재림을 주장하는 신앙은 박해를 받았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오순절운동을 확산시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이다. 조용기는 광의의 오순절운동에 방언으로서의 성령세례와 축복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조용기의 오순절운동은 방언을 강조함으로써 성령 체험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었으며, 축복을 강조함으로써 60년대와 70년대 한국 사회의 산업화에 발을 맞추었다.

김신옥의 신앙과 이 같은 한국교회의 전통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김신옥은 중생, 성령세례, 신유, 재림의 사각복음 가운데 재림에 대해서 큰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자서전에는 재림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둘째, 김신옥은 조용기의 메시지와 비교해 볼 때, 방언과 축복에 대한 언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신옥의 자서전에 보면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 성령세례로서의 방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축복의 복음을 강조하지는 않는 것 같다. 따라서 김신옥은 조용기의 영향은 크게 받은 것 같지 않다. 셋째, 김신옥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은 성결 체험과 동의어였다는 점이다. 김신옥의 초기 체험은 방언이라는 은사보다는 성결이라는 성품의 변화가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1907년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교회의 전통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신옥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수용해 온 복음주의적인 성령운동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런 신앙은 국제복음교회와 연합하는데 좋은 기반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III. 민족운동가로서의 김신옥

김신옥을 규정하는 한 축이 기독교 신앙이라면 다른 한 축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안수를 받고 본격적으로 기독교 사역을 하기 전에 주로 일했던 민족운동의 영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신옥으로 하여금 민족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그의 기독교교육의 배경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리교에서 평양에 세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다녔고, 그다음에는 역시 감리교에서 세운 정의여학교를 다녔다. 당시 미션 스쿨은 다른 민족 사학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 교육과 구별되는 민족 교육을 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비록 그가 기독교교육을 받은 것이 일제 말이라서 어느 정도 타협은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 흐르는 민족적인 정기는 남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일제 말과 해방 정국에서 민족운동의 상징인 고당 조만식의 질녀였다는 것이다. 그의 할머니가 바로 조만식의 고모였으므로, 김신옥의 아버지는 조만식의 고종사촌이었다. 이런 가정적인 배경은 그로 하여금 일찍이 민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했다. 이것은 그에게 커다란 자랑이자 족쇄이기도 했다. 그가 일본군 군의관으로 있던 조선 청년과 혼담이 오갔는데, 신원 조회에서 결국 조만식의 질녀라는 것이 들어나서 혼담이 깨지기도 하였다.26) 그의 가족은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김신옥에게 흐르는 민족의식은 안기석이라는 청년과 사귀면서 강화되었다. 안기석은 서북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와 8촌 사이로 소창호라고 불리곤 하였다. 그는 당시 기독교가 운영하던 평양고아원에서 총무 일을 맡아 보던 청년이었는데, 신앙이 분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해서 감옥에 투옥된 경험이 있었으며, 감옥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났고, 그를 모시고 있었으며, 임종을 지켜보았다.27) 평양고아원은 기독교가 평양에 세운 최초의 고아원이다.28) 주기철 목사는 한국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순교자이다.29) 이곳에서 안기석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이렇게 해서 이들에게는 신앙과 민족이 하나로 뭉쳐져 갔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신옥과 안기석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해방 직후 평양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당시 가장 당면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귀환하는 동포들을 돕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이 일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담당하였다.30)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 이들은 민호단(民護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평양의 의학생, 신학생 등 젊은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고, 안기석과 김신옥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조만식의 도움으로 일제의 적산 7채를 불하받아서 난민 수용 시설로 만들었고, 조만식이 마련해 준 백미 2천 석을 풀어서 이들로 하여금 굶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구호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31)

김신옥은 해방 정국의 북한을 보면서 북한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은 갖은 횡포를 부렸고, 지도자로 나타난 김일성은 그가 기대하던 북한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안기석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월남하였다.32) 김신옥은 조만식으로부터 “이제 우리 이북에는 소망이 없어졌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신옥도 월남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당시 신탁통치 반대로 인해서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던 조만식을 찾아갔다. 마침 조만식은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이승만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김신옥의 설명을 들은 조만식은 그의 결정에 찬성하며, “서울에서 보자.”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김신옥은 이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33)

안기석은 월남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월남 청년들은 반탁을 내세우며 반공운동을 벌였고, 안기석은 여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안기석은 “유관순”이라는 극영화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손병희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안기석은 평양에 있을 때부터 안면이 있는 최능진으로부터 이범석을 소개받았다.34) 그리고 김구와도 접촉하게 되었다. 이범석은 원래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 인사였지만 나중에는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함께하였다. 안기석은 이범석과 김구의 도움으로 1948년 2월 중국 유학을 갔다가 중국 국민당이 무너지는 바람에 1949년 5월 귀국하였다. 안기석은 이범석과 깊은 관계를 가졌고, 중국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역 부근의 적산 가옥 3층 건물을 불하받았다. 이것은 후에 그가 대성학교를 만들 때 기본 자금이 되었다.35)

당시 김신옥은 중앙대학교 경제학부에 재학 중이었고, 3학년 때에는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중앙대학교는 여자 기독교 대학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좌익이 주도하는 서울대학교 국립대학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신옥은 어느 나라든지 상징적인 국립대학이 있는데, 왜 우리가 그것을 반대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국대안 찬성운동을 벌였고, 이것은 좌익이 우세한 경제학부에서 매우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김신옥은 월남 기독교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36)

김신옥은 월남해서 살면서도 조만식의 조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당시 월남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모셔 오려는 공작을 꾸미고 있었고, 그 요원으로 조만식의 조카인 김신옥을 추천했다. 김신옥은 북한의 부모도 만나고 조만식 선생도 모시고 올 생각으로 여기에 응했다. 하지만 안기석은 절대 반대했다. 왜냐하면 북한에 가면 체포될 가능성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37) 결국 김신옥은 북한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1948년 5·10선거로 총선이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 봄 6·25를 앞두고 북한은 남로당 간부이며, 남파간첩인 김삼룡과 이주하를 석방시켜주면 그 대가로 조만식을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도 여기에 응답했다. 그래서 김신옥은 친척의 자격으로 38선까지 나오라는 통고를 받았다. 하지만 조만식 선생은 월남하지 못하고, 곧 바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됐다.38)

해방과 건국의 과정에서 김신옥은 더욱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종종 시간이 나는 대로 기도원을 찾았고, 특히 박재봉 목사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어느 날, 박재봉은 기도원에서 자신이 받은 환상을 설교했다.39)

나라와 민족을 위해 깊이 기도하던 중, 내가 기거하는 방 안에 커다란 한국 지도가 나타났고, 한 사람이 지도위에 서 있는데, 그의 손에는 큰 태극기가 들려 있었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한 발이 들려 깃발과 함께 부산까지 기울여지더니 어떤 힘으로 다시 그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김신옥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는데, 박재봉 목사의 예언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대한민국 편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이 시작되었고, 안기석은 미군 국군과 함께 선무공작대원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과거 민호단 건물을 접수하고, 다시금 전재민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안기석도 후퇴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 임진강을 건너오자 바로 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다. 미군은 안기석이 기독교인임을 알고 간단한 수색과 함께 보내주었다.40)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안기석과 김신옥은 다시 만나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당시에는 누구나 겪는 어려움을 그도 겪었다. 부산에서 이들은 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피란민 교육에 종사하였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자 평양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당시 충청북도 부강에서 사역하던 백인석 목사가 안기석을 그곳 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충청도에 발을 딛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전에 서울특별시 대전종합중고등학교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피란 시절의 특별한 학교 제도로서 피란 시절 중요 도시마다 서울에서 피란 온 학생들을 모두 모아놓고 교육하는 피란 시절의 임시 학교였다. 김신옥은 이 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얼마 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서울에서 각 학교들이 복교를 하게 되자 기존 각 지역에 있었던 임시 종합중고등학교는 폐교가 되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 가운데 서울로 다시 올라가지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안기석 김신옥 부부는 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원래 평양에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를 본 받아서 대성학원을 만들었다. 이것은 1954년 4월이었다. 이것이 대전 최초의 기독교 사립중고등학교였다. 교훈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 나라를 위하는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했다. 이들이 원래 가졌던 사상을 담은 것이다.41)

김신옥과 안기석의 삶 가운데서 민족은 매우 중요했다. 이들은 숙명적으로 조만식과 안창호의 그늘 아래 살았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서북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을 사랑했으며, 이것은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하나님도 민족도 배반하게 만드는 죄악이었다. 이것은 이들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민호단 활동, 월남 후 신탁통치 반대, 국대안 반대, 그리고 경천(敬天), 위국(爲國), 애인(愛人)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평소 월남 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 건국에 중요한 세력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들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절대로 공산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북한 공산주의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남한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민주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가 바로 이런 생각을 가졌다. 김신옥과 안기석도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42)

우리는 해방 공간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해방과 건국을 지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국가 건설이다. 그리고 이런 국가 건설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새로 세워지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교육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바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교육을 통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피란민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북한의 학교를 남한에 세웠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한경직 목사가 세운 대광학교가 바로 그런 예이다. 그러나 김신옥과 안기석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월남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대전에 거주하던 일반 피란민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안창호의 대성학교를 본 받아서 학교를 세운 것은 안창호의 정신을 이어받아 기독교적으로 민족교육을 시키려고 한 점에서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V. 기독교 사역자로서의 김신옥

김신옥이 한국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가 한국에 새로운 오순절교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교회는 광의의 오순절운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성령운동을 말한다. 아울러서 협의의 오순절운동도 이미 상당히 진척되었다. 즉 방언을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증거로 보는 고전적 오순절운동은 이미 1928년 여자 독립선교사 럼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여러 오순절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고, 이들은 허홍을 비롯한 한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에 고전적 오순절운동이 확산된 것은 1951년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체스넛(Arthur B. Chestnut)이 최초의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로 파송되면서부터이다. 체스넛은 기존의 오순절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에 오순절운동을 확산시켰고, 이런 과정에서 큰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조용기 목사이다.43)

하지만 한국의 오순절 전통에는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성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60년대에 이미 소위 웨슬리안 계통의 오순절운동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교회(클리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왔고, 동시에 또 다른 웨슬리안 계통의 오순절운동인 오순절성결교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서 성결교회의 일파와 접촉을 하고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는 나운몽 계통과 손을 잡고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교회(클리브랜드파)나 오순절성결교회는 다 같이 19세기 미국의 감리교 전통에서 나와서 성결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성회는 덜함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중생과 성결이 완성되었고, 그래서 이차적인 은혜는 성결이 아니라 방언으로 표현되는 성령세례라고 보았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은 바로 이런 덜함의 영향을 받은 비웨슬리안 계열의 오순절운동가였다. 그리고 맥퍼슨이 세운 국제복음교회는 하나님의성회와 더불어서 미국의 대표적인 오순절교파 가운데 하나이다. 김신옥은 바로 이 국제복음교회가 한국에 세운 한국 오순절운동의 지도자인 것이다.

한국복음교회, 공식적으로는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한국에 새로운 교단이 시작되는 여러 케이스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즉 한국의 사역자는 자신과 비슷한 신앙을 가진 미국 교단을 찾고, 미국 교단의 후원을 기대하며, 접촉을 시작한다. 아울러서 미국의 교단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한국에 파트너를 찾는다. 그래서 여기에서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고, 미국교회에는 새로운 선교 지역이 확장된다. 해방 직후 새로 생겨진 교단, 하나님의성회, 침례교회, 나사렛교회 등이 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44) 이것은 60년대와 70년대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 하나님의교회(클리브랜드)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45)

우리는 위에서 김신옥은 자신이 세운 대성학원을 보다 신앙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고,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떤 교단에서 어떻게 안수를 받아 사역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그의 학교 사역은 기존의 교파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었고, 아마도 자신은 기존의 교파 구조에 매여서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독립 교회로서 활동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 두 가지가 다 어려운 것이다. 기존 교파의 텃세가 센 한국 사회에서 독립 교회도, 새로운 교파의 시작도 다 이단으로 정죄될 가능성이 많이 있다. 만일 그런 상황으로 발전한다면 이것은 대성학원으로서는 결정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신옥은 미국의 국제복음교회와 연결되었고, 다시 이 교단의 신학교(L.I.F.E. Bible College)를 졸업하고, 여기에서 안수를 받게 되었다. 김신옥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자신의 신앙과 국제복음교회의 신앙이 유사함을 보게 되었고, 국제복음교회도 이것을 확인했다. 아울러서 김신옥은 국제복음교회가 이미 세계적인 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국제복음교회는 김신옥이 한국에서 건실하게 사역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김신옥은 국제복음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국제복음교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김신옥이 국제복음교회와 손을 잡은 또 다른 이유는 국제복음교회가 여성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시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남존여비의 사상이 가득하고, 특히 교회에는 더욱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리더십을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제복음교회가 여성에 의해서 세워졌다면 한국의 복음교회의 창시자가 여성이라는 점이 조금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김신옥은 사람들이 자신을 “한국의 맥퍼슨”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김신옥과 국제복음교회의 만남은 새로운 사역의 시작이었다. 김신옥의 꿈은 학원의 복음화였고, 국제복음교회의 사역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국제복음교회의 한국 사역은 김신옥이 아직 미국에 있던 1969년에 시작되었다. 국제복음교회는 당시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던 탐슨(Evelyn Thompson) 선교사 부부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이들은 대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성학원은 톰슨 선교사와 함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사역을 사직하였다.

탐슨이 대성학교에서 펼친 사역은 오순절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열렬한 찬양과 통성기도로 이어지는 열린 예배 스타일의 새로운 운동이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예배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에 이런 시도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전통적인 예배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대성학원은 예배당이 없어서 안기석 교장이 장로로 있는 대전 대동장로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 형식을 본 대동교회는 장로교로서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고, 결국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새롭게 구해야 했다.46) 그리하여 대성학원 내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여 학생 교회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한국 최초의 복음교회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기관이 어떻게 협력하는가를 보게 된다. 김신옥은 원래 교사로서 출발했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학원을 세웠다. 따라서 그의 사역은 학생들에게 뿌리를 두는 것이었다. 아울러서 미국의 국제복음교회도 한국에서 청소년 사역으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를 원했다. 당시 이미 6개의 학교와 8,000명의 학생을 가진 대성학원이라는 장이 마련되어 있고, 여기에 미국 국제복음교회의 오순절 사역이 접목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47) 이 청소년 사역은 단지 복음교회뿐만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청소년 사역을 통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헌신하였고, 그래서 한국의 목회자가 되었다. 김신옥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가 전국 각지에 대성학교 출신의 목회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신옥이 미국에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바로 이 학생 교회를 발전시켜 대전복음교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들로 시작되었지만 차츰 교직원도 참석하게 되고, 그다음에 인근 주민도 참여하게 되어서 굳건한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의 담임목사는 국제복음교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안수를 받은 김신옥이었다. 이 대성교회는 단지 개교회가 아니라 대성학원의 영혼과 같은 장소였다. 김신옥은 이 대성교회를 통하여 대성학원을 영적으로 이끌고 나갔던 것이다. 주요 교직원은 이 교회의 신자였고, 따라서 김신옥은 단지 학원의 이사장이 아니라 영적인 담임목사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대성교회는 그가 목회하던 당시 재적 신자 3,000명의 교회로서 한국에서 여성이 세운 교회 가운데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48)

오순절 목사가 된 김신옥은 한국에 와서 대성학원에 오순절적인 학원 사역을 실시하였다. 그리해서 방학을 이용해서 청소년십자군 캠프를 시작하였고, 이것을 통해서 학생들을 철저한 오순절 신앙으로 무장시키려 했다. 이 캠프는 1학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2학년 때에는 성령세례를 받도록 하며, 3학년에서는 사명자로서 소명감을 갖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49) 특별히 김신옥은 성령세례, 특히 방언 체험을 강조하였다. 방언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고, 이것은 김신옥의 중요한 신학이 되었다. 김신옥은 전형적인 오순절 사역자로서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믿었고,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50)

김신옥의 청소년십자군 캠프는 점점 더 발전하였다. 그는 보다 조직적으로 학생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킬 방법을 생각하였고, 그래서 1989년 청소년 선교훈련(Youth Mission Training, YMT)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천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대전복음교회 앞에 이 훈련만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51) 이것은 그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오순절 신앙과 그가 새롭게 배운 트레스 디아스(Tres Dias) 프로그램을 접합하여 만든 프로그램이다. 트레스 디아스 운동은 원래 천주교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이지만 이것을 개신교에서 받아들여서 3박 4일 동안에 집중적으로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다. 김신옥은 미국 LA에 있는 김광신 목사가 세운 은혜한인교회의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동역자들을 미국에 보내서 이 훈련을 받게 해서 한국적으로 프로그램을 조정해서 학생들을 훈련하였다.52) 이 프로그램은 단지 학생에만 머물지 않고, 학생들을 통하여 부모에게까지 확대되도록 했다. 2010년까지 학생 1만 9천명, 학부모 6천명을 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이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김신옥의 사역은 학교 사역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국제복음교회와 협력하여 한국에 복음교회를 만든 한국복음교회의 실질적인 창립자이다. 김신옥은 한국에 와서 대성복음교회를 창립하는 한편 곧 바로 문공부에 종교 단체로 등록을 추진하여 1972년 2월에 대한예수교복음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이것은 나중에 대한예수교복음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신생 교단이 시작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별히 당시에는 여자목사가 없던 시절에 여자가 세운 교단이라는 점을 표적이 되기에 알맞았다. 특별히 당시 최고의 이단 전문가 탁명환 교수는 복음교회가 천사를 숭배하는 이단 교회라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맥퍼슨이 세운 미국의 교회 이름이 Angelus Temple이었기 때문인데, 사실은 그 교회가 Los Angeles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단 시비는 김신옥과 안기석이 새운 대성학원의 이미지 때문에 수그러들었다.53)

신생 교단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단 시비이다. 미국의 오순절교단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 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했고, 미국 오순절협의회를 만들어서 오순절 전통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김신옥의 복음교회가 이단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국제복음교회가 미국 NAE에 가입한 국제적으로 공인된 교단이라는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서 한국복음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가입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성회와 더불어서 한국오순절협의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복음교회는 한국교계에서 하나의 교단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국제복음교회는 1970년에서 1984년까지 한국을 선교지로 간주하고, 탐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한국 사역을 책임졌다. 이 당시 복음교회는 대성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학원 사역과 함께 복음교회를 위한 사역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나의 교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리해서 탐슨을 학장으로 해서 1972년에 복음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그 뒤에 계속 국제복음교회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신학교를 책임지었다. 그러나 1987년부터는 대성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인 임열수 박사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학장이 되어 신학교육을 정상화하였다. 김신옥은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유학을 보내서 학교를 이끌 지도자를 양성한 것이다.

하지만 복음신학교는 당시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외국 대학과 교류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국제복음교회 책임자와 논의한 결과 오랄로버츠 대학교과의 교류를 추진하게 되었다. 오랄로버츠 대학교는 미국 굴지의 오순절 계통의 학교로서 상당한 수준의 학교였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이 학교와의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서 학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성학원이 국제복음교회와의 관계에서 학원 선교를 했다면 복음신학교는 오랄로버츠 대학교과의 관계에서 신학교육을 함과 동시에 오순절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54)

하지만 복음신학교가 제대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법에 따른 인가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1996년 교육법이 개정되어 대학설립준칙제도가 시행되었고, 학부가 없어도 대학원을 인가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교육법의 개정 때문에 복음신학교는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 한국의 교육법에 의해서 교육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김신옥 이사장과 임열수 학장의 노력의 결과였다. 현재 이 학교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훌륭한 교수진을 갖추고 오순절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오순절 계통의 신학교육기관으로서 몇 년 전부터 건신대학원대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크게 발전하고 있다.

1987년 신학교육이 선교사에서 한국인으로 지도력이 변화하기 전인 1984년 이미 국제복음교회는 한국을 독립 교회로 인정하고 모든 리더십을 한국에 이양하였다. 그래서 1984년부터 김신옥은 대한예수교복음교회 초대 총회장이 되었고, 그 이후에도 교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가 담임하는 대전복음교회는 여러 복음교회의 모교회 역할을 하였고, 현재 약 80개 교회로 성장하였다.

사실 김신옥은 초기 미국 본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지원은 받지 못한 것 같다. 또한 미국 선교사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한때는 과거 5년간 지원을 받은 11만 달러를 돌려주고 국제복음교회와 관계를 단절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국 교단 본부의 유능한 지도자인 잭 헤이포드 목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다.55) 그러나 복음교회가 이런 국제적인 관계 안에서 발전하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국제 관계가 없이는 복음교회가 세계로 나가서 활동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신옥의 사역 가운데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교도소 전도였다. 김신옥이 목사안수를 받고 귀국했을 때부터 그가 계속해 왔던 사역이 교도소 방문전도였다. 그가 방문했던 교도소는 대전교도소였는데, 여기에는 주로 사상범이 수용되었다. 교도소에서는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해서 이들을 전향시키려고 했고, 김신옥은 그렇게 해서 교도소 선교를 시작하였다. 김신옥은 이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아울러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공산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이어서 전향이 쉽지 않았다. 김신옥의 진지한 기도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무신론자였던 그들의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공산주의를 포기하였다. 김신옥에게는 기독교 신앙과 반공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그가 전도한 사람 가운데는 과거 굵직한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56)

김신옥과 복음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역은 해외 선교이다.57) 김신옥은 항상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인위적으로 이런 일들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했을 뿐이다. 김신옥은 미국 김광신 목사의 소개로 사할린에서 사역하는 김영원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그의 사역을 도와서 사할린 선교를 시작하였다. 원래 교포를 중심했던 사역은 러시아 당국의 인정을 받아 러시아 교도소 선교까지 할 수 있게 되었고, 김광신 목사와 함께 신광농업학교를 세워서 실질적으로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일으켰다. 아울러서 YMT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전했다.58)

김신옥의 해외 선교의 또 다른 지역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이곳은 사할린과 마찬가지로 과거 공산권이었고, 우리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 선교도 이 지역에서 사역하던 현지 선교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의 사역도 YMT 프로그램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살아 있는 종교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교포 2세들을 통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신학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59)


V. 여성사역자로서의 김신옥

우리가 김신옥에 대해서 놀라는 것은 한 여인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김신옥이 태어날 당시에도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름을 섭섭이라고 지은 경우도 있다. 이것은 김신옥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김신옥의 집에는 작은 집의 남자아이가 함께 자라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어느 날 자신의 두 며느리에게 김신옥과 그의 사촌 남자아이, 병만을 데려와 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여자아이 김신옥과 남자아이 김병만을 놓고 두 며느리에게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들을 낳은 작은 며느리가 딸을 낳은 큰 며느리보다 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 후 김신옥의 어머니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울었다.60) 김신옥의 어머니는 속으로 아들이고 딸이고 잘 키우면 된다고 다짐했다.

사실 김신옥이 태어났던 20세기 초에 여성이 교육받고,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다. 이런 점에서 김신옥이 당시 다른 여자들이 받지 못하는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부모가 개화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 김신옥을 진학시켰다.61) 심지어 딸의 교육을 위해서 가산을 정리해서 평양으로 이사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유교에 매인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신옥은 정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의학전문학교에 가서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신옥의 아버지는 여자가 의사가 되면 배웠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여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의전에 입학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화여전에 가서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김신옥은 의전과 이화여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했다.62) 교사로서의 길을 간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교사는 여성운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교육은 가정의 연장이며, 가정은 여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여성운동의 출발은 학교였다.63) 그리고 이것은 김신옥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즉 그의 일생은 학교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교육자 김신옥은 또 다른 교육자 안기석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도산 안창호와 8촌 간인 안기석은 평양의 고아원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극작가 주태익의 친구였다. 이 두 사람은 해방 전후의 복잡한 세월을 함께 보냈고, 다 같이 월남하여 1947년 10월 결혼하였다. 김신옥은 남편을 존경하였다. 그는 남편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의 사람이었으며,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않는 신자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안기석은 김신옥의 사역을 인정하고, 아내가 가정에만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64)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단지 부부가 아니라 동역자였고, 이것은 김신옥의 사역의 핵심 부분이 된다.

많은 경우 여성사역자들은 독신이거나, 남편과 갈등을 일으켜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신옥의 여성사역은 남자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협동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복음주의적인 여성사역의 특징일 것이다. 진보적인 여성운동가들은 남녀의 관계를 대립의 관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결국에는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김신옥의 경우에는 남편을 존중하고, 함께 동역하는 관계를 설정하였다. 남편은 학교의 교장으로서, 아내는 학교의 이사장으로서 함께 사역하였다.

여성사역자들의 또 다른 과제는 자녀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여자들은 아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녀교육이다. 따라서 어머니의 역할과 사역자로서의 임무가 충돌되는 경우에 갈등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김신옥의 사역에서 이런 요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는 남편과 자녀를 놓아두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것은 그에게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 그의 한국 여성과 여성사역자로서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의 자녀들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훌륭한 사람들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건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사역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김신옥의 여성사역은 1970년 새로운 단계에 올라선다. 그것은 그가 1970년에 목사로 안수를 받은 것이다.65) 그는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국제복음교회(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다. 국제복음교회는 미국의 대표적인 오순절교단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교단은 에이미 셈플 맥퍼슨이라는 여성 신유사역자가 세웠는데 미국에서 여성이 세운 몇 안 되는 교단 가운데 하나이다. 김신옥은 이렇게 여성사역자가 세운 교단과 연결을 맺고,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했던 것이다.66)

성결오순절운동은 오래 동안 여성사역자를 배출하였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성결운동가는 푀비 팔머 여사였고,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여성 오순절주의자는 맥퍼슨 부인이었다. 이런 성결오순절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의 성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었다.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는 것은 사역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여성들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역은 남편보다도 더 높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 때문에 성결오순절운동은 여성사역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사역자는 조용기 목사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한 최자실 목사이다. 당시에 한국 순복음교회에서는 안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일본 순복음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김신옥도 최자실 목사와 비슷하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성령충만한 사역자였고,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안수를 받았다. 이렇게 외국에서 여성이 안수를 받는 것은 한국의 전통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김신옥은 안수 후 대전에서 대성교회를 창립하고, 담임목사가 되어서 최근까지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대 교회를 담임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 여성사역자들이 가정과 자녀의 희생 위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김신옥의 경우에는 이런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 아울러서 온 가족을 자신의 동역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김신옥의 사역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팀 사역이었다. 학교 사역도, 교회 사역도 온 가족이 함께하였다. 현재도 장남은 학교 교장으로, 차남은 대성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김신옥 부부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신옥의 여성사역은 가족이라는 배경 안에서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역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67)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 같은 가족 사역을 긍정적으로 보아주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 사회인 한국에서 부모의 사역을 계승한다는 것은 일종의 특혜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신옥의 사역이 이런 의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는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VI. 나가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먼저 김신옥의 신앙 형성 과정, 그의 애국계몽운동, 기독교 사역 활동, 그리고 여성의 역할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필자는 김신옥은 한국 문화의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여기에 접합한 초기 복음주의, 혹은 넓은 의미의 성령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한국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한다. 김신옥은 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사죄와 더불어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결과 신유를 강조하는 신자이며, 이런 신앙을 기도원을 통해서 유지·발전시켰다. 초기에는 방언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는 오순절 사역자답게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는 축복에 대한 언급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김신옥은 조만식의 질녀로서, 그의 남편은 안창호의 8촌으로서 서북 기독교 민족주의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들은 북한에서부터 기독교 민족운동에 앞장섰으며, 월남해서는 반공운동, 국대안 반대운동,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아울러서 피란 시절에 세운 대성학교를 통해서 하나님, 민족,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월남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하는가를 볼 수 있다.

김신옥의 한국교회사적인 위치는 그가 여성 최초로 한국에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하여 미국에 있는 국제복음교회와 관계를 맺고, 한국에 대한예수교복음교회라는 오순절교단을 만들었다. 김신옥이 만든 대성학교의 학원 선교를 출발점으로 하여 시작된 이 교단은 한국에 새로운 청소년 사역의 바람을 일으켰고, 이것이 발전하여 대성교회와 80여 개의 복음교회를 만들었고, 건신대학원대학교를 통한 오순절 신학의 정립과 세계 선교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김신옥과 국제복음교회와의 협력 관계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김신옥의 사역은 국제복음교회와만이 아니라 오랄로버츠 대학교와 LA의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 목사와의 관계에서도 발전하였다.

우리는 김신옥의 여성으로서의 사역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교사가 되었고, 안기석과의 결혼도 남녀의 결합을 넘어서서 사역의 동역자로 인식하였다. 그는 한 가정에 매이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런 꿈을 보다 구체화한 것은 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보다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특별히 국제복음교회의 창시자 맥퍼슨 부인은 그에게 롤모델이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김신옥의 여성사역은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진보적인 여성운동가의 모습보다는 남편과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함께 사역하는 가족 공동 사역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김신옥의 생애와 사역에서 어떻게 한 여인이 애국적인 교육자로서, 오순절적인 사역자로서,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활동하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적인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신앙이며, 이것을 위해서 학교와 교회가 도구로서 사용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의식적인 여성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여성도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각주
3) 김신옥,『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라』(대전: 대장간, 2010). 이 자서전 외에도 건신대학교의 도완석 교수가 제작한 김신옥의 생애와 사역을 다룬 5개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새벽어둠을 깨치고” (2001); “학교법인 대성학원 50년사” (2005); “김신옥 목사 성역 40년사” (2007); “땅 끝 선교를 꿈꾸며” (2010);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2013).
5) 이 점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60년대부터 유동식 교수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유동식,『한국 종교와 기독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참조.
7) 김신옥의 종교 체험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들의 신앙 체험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박명수,『급하고 강한 바람: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리고 오순절운동』(서울: 서울말씀사, 2012), 제4장 오순절 신자들의 신앙분석 참조.
8) 김신옥,『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라』, 125.『기독교대백과사전』“한신대학” 항목 참조. 김신옥의 자서전의 벧엘교회는 베다니교회의 오기라고 생각한다. 초기 영락교회의 이름은 베다니교회였고, 여기에 신학교가 있었다.
13) 흥미로운 것은 김신옥이 미국 복음교회와 연결을 맺기 전에는 방언에 대해서 특별한 강조를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8) 고원용 목사는 대전 대흥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60년대 말 미국 LA에 이민을 가서 이민 목회를 시작하였다(임열수, “김신옥 목사의 사역과 목회신학,” 13의 주 37. 장로교 목사가 김신옥을 오순절교단으로 연결시켜 준 것은 한국장로교회가 오순절운동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편,『한국 기독교사상』(서울: 연세대 출판부, 1998), 75-117에 수록된 필자의 논문, “제2장 박명수, “한국교회와 오순절운동: 한국교회사적입장”과 박명수,『급하고 강한 바람: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리고 오순절 운동』(서울: 서울말씀사, 2012) 제2장, 힌국교회의 전통과 조용기 목사의 오중복음 참조.
21) 박명수,『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 “VIII. 한국교회의 주요흐름: 오순절 성령운동” 참조.
28) 평양고아원은 한국 최초의 고아 단체인 경성고아구제회에서 1921년에 세운 기독교 기관으로서 조만식도 여기에 참여했다. http://terms.naver.com/평양고아원 (2015년 4월 25일 검색).
30) 서울에서는 1945년 8월 31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를 만들었으며, 여기에 회장 유억겸, 그리고 이용설, 김활란, 김관식, 양주삼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조선전재재외동포구제회 창립총회,”『매일신보』(1945년 9월 2일). 여기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연구로는 황병주, “미군정기 전재민구호운동과 ‘민족담론,’”『역사와 현실』Vol. 35 (2000): 76-113 참조.
31) 김신옥,『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라』, 103-06. 김신옥은 이 민호단에 김일성의 동생인 김형주도 참여하였다고 기억한다(106). 해방 직후 평양에 있었던 소설가 황순원은 그의 장편소설,『별과 같이 살다』(서울: 정음사, 1950)에서 주인공 곰녀가 일제 말 기구한 인생을 살다가 해방 후 민호단에 들어가서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33) Ibid., 117-20. 많은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월남 권유에도 불구하고 “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오.”라고 말하면 월남을 거절했다. 하지만 김신옥은 조만식이 자신에게 “서울에서 보자.”라고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 136쪽에서 김신옥은 “‘서울에서 만나자.’ 내가 남하하던 날, 내 뒷모습에 대고 하였던 부드럽고, 조용한 그 약속의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필자는 신탁통치로 인해 연금된 다음에 그는 월남할 수 있는 기회를 찾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실제로 1947년 7월 미소공위의 브라운 소장이 조만식을 면담했을 때, 나의 소원은 서울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Interview with Cho, Man Sik-1947. 7. 1 at Pyongyang,”『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사 자료집』, 정용욱, 이길상 편 (서울: 다락방, 1995), 9, 669.
34) 최능진은 안창호 계열인 흥사단 출신으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경력이 있다. 그는 후에 월남해서 반이승만 계열에 서 있었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최능진” 항목 참조. 아마도 안기석이 안창호의 8촌이라는 점에서 최능진과 안기석은 다 같이 안창호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35) 김신옥,『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라』, 131. 안기석이 이범석의 대한민족청년단에 어떻게 참여하여 활동하였는지는 앞으로 살펴볼 과제이다. 해방 전후 이범석의 활동에 관해서는 이택선, “광복 전후 이범석의 정치노선,” <광복과 대한민국: 해위학술연구원/한국정치외교사학회 공동학술회의 자료집:> (서울: 배재학당 기념관, 2015) 참조.
47) Ibid.
48) 현재 이 교회는 그의 둘째 아들이 담임하고 있다. 김신옥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당시에는 한국에서 여성이 세운 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 현재는 한국에서 크게 부각되고 있는 여성목회자들 중에는 우리들교회의 김양재 목사를 들 수 있다.
52) 임열수. “김신옥 목사의 사역과 목회신학,” 9, 각주 23 참조. 김광신 목사는 성령 사역과 선교에 집중하는 미주 한인교회의 목사로서 김신옥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김신옥의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과 뒤에 언급할 러시아 선교는 김광신 목사와의 협력 관계에서 발전한 것이다. 김광신 목사에 대해서는 http://ko.wikipedia.org/wiki/김광신 (2015년 5월 4일 검색) 참조.
56) Ibid., 265-81. 김신옥의 자서전(265-76)에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57) 복음교회의 전반적인 선교에 관해서는 임열수, “대한예수교복음교회 해외선교사역,”『성령과 언어』참조. 여기에는 복음교회만이 갖고 있는 독창적인 선교 사례가 담겨져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해외에 나가 있는 대학생성경읽기회(UBF) 소속의 자비량 선교사들과 네트워크를 하여 안수를 주고, 공동 사역을 하는 것이다.
63) 미국에서 여성사역의 출발은 교사였다. 특별히 북부의 교육받은 여성은 남부의 교육 못 받은 남성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남북전쟁 이후 많은 북부 여성들이 남부에 와서 학교를 세웠다(윈스롭 허드슨, 존 코리건,『미국의 종교』배덕만 역 (서울: 성광문화사, 2008), 352-56). 이것은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화된 서양인은 개화되지 못한 이방인을 교육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사로서의 여성사역은 가정은 여성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67) 필자는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조용기 목사와 그의 장모인 최자실 목사의 공동 사역이라고 본다(박명수,『급하고 강한 바람』, 95-97).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가족을 팀으로 하는 사역을 해왔고,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역 안에서 갈등을 줄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국에서 이런 가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팀 사역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7년도 서울신학대학교의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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