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No. 0, pp.431-458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9
Received 19 Oct 2019 Revised 12 Nov 2019 Accepted 15 Nov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12.50.431

1540-41년의 교회연합운동과 부써의 역할
황대우
고신대학교 조교수, 역사신학 (hwangdw@kosin.ac.kr)

Ecumenism during 1540-41 and the Role of Martin Bucer
Dae-Woo Hwang
Dr. theol. Assistant Professor, Historical Theology Kosin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초록

1540-41년에 개신교와 천주교는 교회일치를 위한 모임을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에서 가졌는데, 이것은 16세기 최초의 교회연합운동이었다. 이 교회연합운동의 출발점은 황제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자 부써(Martin Bucer)는 이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교회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부써에게 정치적 목적은 종교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었다. 부써는 하게나우와 보름스와 레겐스부르크 등지의 교회연합 모임을 위한 개신교 대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헤센의 빌립 영주에게 절대적 신임과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적 신학적 비중은 작센의 대표자 멜랑흐톤보다 오히려 더 컸다.

교회일치를 위해 부써는 중재에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실패로 부써는 동료 종교개혁자들로부터도 거세게 비난받아야 했다. 부써는 왜 그토록 교회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그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었다. 부써는 한 몸이 둘 혹은 셋으로 분리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교회일치를 위한 부써의 기준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희생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양보한다는 원칙이었다. 부써에게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길 원하는 진심’이었다. 협상을 위한 부써의 자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었고 자신의 양심도 지켰다. 그러므로 부써를 중재를 위해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협상은 왜 결렬되었는가? 루터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 교리가 희생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교회일치를 위한 협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지켜보았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의 대표 에크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협상 결렬의 결정적 원인은 뜻밖에도 칭의론이 아니라 교회론이었다.

Abstract

In 1540-41, Protestants and Papists had the meetings for unity in Hagenau, Worms, and Regensburg. This was the first Ecumenical Movement between other churches. The starting point of Ecumenism was the Emperor’s political will to solve the problem of the Osman Turks attack. The Reformer of Strasbourg Martin Bucer tried to overcome the present crisis of Church division using the political situation.

Bucer regarded the political purposes as vehicles for achieving religious purposes. He became the most important figure of the Protestant representatives in the meetings of Hagenau, Worms, and Regensburg, for he was granted absolute confidence from and support to the Landgrave of Hesse Philip. In this point, Bucer’s importance had a greater impact than that of Melanchthon as representative of Saxon in the political and theological areas.

Bucer was passionate enough to be mistaken as a mad man for Ecumenism. Finally, the negotiation was broken down. He should be to blame for everything of that failure from all of his fellow reformers. Why did he think so important of the Ecumenism? The Church is the one body of Christ in the theology of Bucer. Therefore, he did his best not to separate the one body into two or three.

Bucer’s criteria was not to sacrifice the main doctrines of Christianity for ecumenism. He thought that every ecumenist should have his true heart only to please God. From beginning to end, Bucer approached with a true heart to ecumenism. In this point, it is wrong to regard him as a “Fanatiker der Einheit.”

Why did the negotiations break down? Most of the Reformers including Luther watched the negotiations in a negative light out of fear to sacrifice the doctrine of faith by which we are justified. The approach of the Catholic representatives, especially John Eck, was both negative and aggressive. This negative and aggressive attitude played a role in the breakdown of negotiations. The definitive cause unexpectedly arose from different ecclesiologies, not from various views of justification.


Keywords: Reformation, Bucer, Ecumenism, Melanchthon, Landgrave Philip, Regensburg
키워드: 종교개혁, 부써, 교회연합운동, 멜랑흐톤, 빌립 영주, 레겐스부르크

I. 들어가는 말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교회연합운동은 1540년 초에 벌어졌다. 152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개신교 내의 교회연합운동은 사실상 로마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려는 교황청에 대항할 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 군주들의 정치적 행보였다. 사실상 16세기는 정치와 종교가 불가분리의 동반자 관계였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황제 칼 5세는 1530년 이후 두 종교 집단을 하나로 만들고 싶었으나 정치적 무력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교회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요구했으나, 교황청은 차일피일 미루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할 입장의 황제는 교회 공의회가 소집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교황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던 황제는 가톨릭 측과 개신교 측의 대표 신학자들이 공적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도록 노력했다. 1539년 4월의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Frankfurter Anstand)이 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연합을 원하는 황제의 입장을 부써는 교회연합운동의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

본 논고에서는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부써는 그것을 활용하여 교회 분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지 살필 것이다. 또한 교회일치를 위한 부써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도 살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회일치를 위한 최고의 걸림돌이 무엇이었는지도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II.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

1539년 1월에 종교개혁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합의한 15개 항목의 라이프치히 조항에서1) 부써는 결코 루터의 칭의론을 희생하지 않았다.2) 선제후 작센 당국과 헤센 당국에 전달된 라이프치히 조항은 죄의 유전, 구원, 자유의지, 참회, 치리, 성례, 입교, 임직, 금식, 음식, 수도원, 성자숭배, 성일, 교회의 세속 권력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비록 라이프치히 회의가 본래 계획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회의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발할 일촉즉발의 독일 민족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협상뿐이라는 것과 이 협상의 주요 장애물은 교회재산 처분 문제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3)

부써는 1539년 2월의 프랑크푸르트 모임에 참석할 스트라스부르의 신학자 대표로 임명되어 2월 9일, 또다시 여행을 떠나야 했다.4) 부써가 스트라스부르를 떠난 직후에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도울 것이 없다는 부써를 다시 한 번 설득하기 위해 칼빈은 1539년 2월 21일에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멜랑흐톤을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5) 이후 칼빈과 멜랑흐톤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슈말칼덴동맹 모임이 진행되고 있던 2월 25일에 룬트의 대주교이자 황제의 대변인 요한 폰 베에체(Johann[es] von Weeze)와 두 명의 의원, 즉 독일 왕 페르디난트의 대리인 한 명과 슈말칼덴동맹의 대표자 한 명이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 협상은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아킴 2세(Joachim II)와 팔츠의 선제후 루트비히에 관한 것이었고 협상의 결론은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의 내용이었다.6)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은 1539년 4월 19일이었다.7) 쟁점이었던 종교개혁을 수용한 두 선제후 지역이 슈말칼덴동맹에 가입하는 문제 해결은 뉘른베르크 평화협정을 넘지 못했다. 협상 결과에 대해 멜랑흐톤은 어느 정도 만족했지만 부써는 상당히 격분하여 그것이 체결된 그날 프랑크푸르트에서 곧장 장문의 편지를 루터에게 보냈다.8)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제국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슈말칼덴동맹이나 뉘른베르크동맹에 새로운 회원이 가입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 모두 터키, 즉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 군사적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합의 내용이 부써를 자극했다. 그는 자기 것만 안전하게 지키면 된다는 슈말칼덴동맹 회원들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과 태도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종교회의를 개최하겠다는 황제의 약속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환영했는데, 그것은 부써 자신이 독일 전체의 국가적 교회회의를 간절히 염원해왔기 때문이다.9)

부써는 누구보다 교회연합을 간절히 원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뿐이며 결코 둘이나 셋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 야합이 아닌, 순수한 신앙적 동기의 교회연합만이 진정한 연합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로마의 어떤 방해도 없이 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길 원하고, 또한 교회재산에 관하여 합의할 수 있다면, 기독교 공동체의 온당한 요점들에 대해 협상할 수도 있고, 교회 일치를 위해 합의하지 못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맡길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겠다.”10) 여기서 ‘하나님만 바라보길 원하는 진심’은 항상 부써에게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 교회연합 원리 위에 당시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교회재산 문제를 부가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부써의 눈에 몇몇 개인이 교회재산을 사유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적인 것처럼 보였다.

부써에 따르면 모든 교회재산은 사유화보다는 사용 목적에 알맞게 재배치되고 재분배되어야 한다. 비록 성경과 교회 전통이 교회의 재산 소유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그 재산을 오직 교회 사역을 위해 정당하게 사용할 때 비로소 재산 소유의 합법성이 확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물건이든 중립적인 것으로 보고 선용하느냐 악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그의 아디아포라 신학과 일맥상통한다.11) 부써에 따르면 교회재산은 급여를 받을 가치가 있는 교회의 필수 봉사 사역자들을 위한, 특히 각 교회가 선택한 목사들을 위한 지출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이며, 또한 구제 즉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가 소유해온 넓은 토지와 수도원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교회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2) 부써에게 교회재산의 주요 사용처는 목회자의 생활비 및 빈자와 병자를 위한 구제비였다.

프랑크푸르트 모임을 통해 부써는 중요한 정치 협상가로 급부상했다. 1539년 9월, 영국 왕실에서 크리스토퍼 몬트(Christopher Mont)가 독일로 와서 영국 왕 헨리 8세(Henry VIII)와 슈말칼덴동맹의 협상을 재개하고자 했을 때, 부써는 영주 빌립에게 한 명의 외교관을 멜랑흐톤과 함께 보내도록 힘써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비록 헨리 8세가 신뢰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멜랑흐톤의 영향력이라면 분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13) 하지만 헤센의 영주 빌립의 생각은 달랐다. 왜냐하면 대사를 보내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일이고 멜랑흐톤을 헨리 8세에게 보내는 것은 그를 사지로 보내는 무자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주 빌립은 부써가 요구한 대로 작센과의 협상을 시작했고 부써가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에게 보낸 편지도 전달했다.14) 하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부써의 계획에 반대했다.15)

부써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정치 외교적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영주 빌립의 도움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부써는 헨리 8세에게 교회 정치 문제를 논하는 개인 편지를 쓰도록 헤센의 영주에게 제안했다.16) 그것은 가능한 군주답게 사절을 통해 답장을 보내는 예를 갖추면 좋겠다는 제안과 영국이 개신교 동맹에 가입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담은 편지였다. 이 편지를 쓴 지 13일 만에 부써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17)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서신의 주된 내용은 슈말칼덴동맹을 위한 지난한 노력에 대해 설명하고 영국 왕 개신교 동맹에 동참하여 적그리스도인 로마교황을 대항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18) 개신교 연합을 위한 부써의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국 그의 계획대로 슈말칼덴동맹은 영국에 사절을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19)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상을 전후로 라이프치히 합의안은 여기저기에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알려지고 있었다. 그 합의서는 1539년 한 해 동안 여러 군주들에게 보내어짐으로써 로마교 신학자들인 요한 에크와 히에로니무스 알레안더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심지어 로마교황청뿐만 아니라, 황제의 재상 니콜라 페레노 더 그랑벨러(Nicolas Perrenot de Granvelle)에게까지 전달되었다.20) 라이프치히 모임에서는 논쟁적인 교리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교회 측과 종교개혁 측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황제 칼 5세는 자신의 로마제국이 교리로 인해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540년 4월 18일, 드디어 황제는 종교회의를 6월 6일에 슈파이어에서 개최하도록 로마교회와 개신교회 양측에 소집을 공고했다.21)


III. 하게나우 교회연합회담: 1540년 5월 23일부터 7월 28일까지22)

1539년 4월 23일, 슈말칼덴동맹의 회원들은 프랑크푸르트 모임을 폐회하면서 장차 황제에 의해 소집될 미래의 교회연합회의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개신교 신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35명의 이름이 명기되었고 이름이 명기되지 않은 사람도 최소 1명 이상이었다.23) 이 명단에는 부써와 헤디오와 카피토가 스트라스부르의 대표 신학자로 올랐고, 칼빈의 이름은 바젤의 대표자 명단에 시몬 그리네우스와 함께 올랐다. 스위스 취리히와 베른, 그리고 제네바 대표 신학자는 명단에 없었다. 하지만 4월 23일자 명단은 또 다른 11월 28일자 명단과 12월 3일자 명단과 일치하지 않았다. 11월 28일자 명단과 12월 3일자 명단에서 부써는 빌립 영주가 추천하는 헤센의 대표 신학자로 올랐고 스트라스부르의 대표자로는 야곱 슈투름과 볼프강 카피토, 그리고 시몬 그리네우스가 명기된 반면에, 칼빈은 11월 명단에는 울름의 대표 신학자로, 12월 명단에는 뤼넨부르크(Lünenburg)의 대표 신학자로 올랐다.24)

슈파이어 연합회의를 위해 로마 가톨릭 대표자들은 1540년 5월 23일의 예비모임에 초대받았고 복음주의 대표자들은 6월 6일에 초대받았으나 전염병 때문에 모임 장소가 하게나우(Hagenau)로 변경되었다. 황제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 대리로 참석했다. 하지만 작센의 선제후와 헤센의 영주는 부써와 안드레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절박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을 핑계 삼아 참석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멜랑흐톤은 하게나우로 오는 길에 병에 걸려 투링기아(Thuringia)에 머물러야 했다. 따라서 비텐베르크 대표자들은 카스파르 크루치거와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와 유스투스 메니우스(Justus Menius)만 회담에 참석했다. 교황 특사 지오반니 제롤라모 모로네(Giovanni Gerolamo Morone)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참석했으나 단지 가톨릭 대표자들에게 조언하는 임무 외에 어떤 견해도 어떤 약속도 제시할 수 없었다.25) 부써는 22일에야 하게나우에 도착했는데,26) 칼빈도 그와 함께 왔다.

끝없는 신학 논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페르디난트는 1540년 6월 12일에 하게나우 회담을 공식적으로 개회하면서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석상에서 했던 대화의 결론을 근거로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가톨릭 측의 요한 코흘라에우스(Johann Cochlaeus)는 회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협상을 위한 대화를 해야 한다면 당연히 1530년의 제국의회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밝혔고 프리드리히 나우세아(Friedrich Nausea)도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27) 개신교 측이 볼 때 이 회담은 시작부터 편향적이었다. 황제의 동생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인사 4명을 의장으로 임명한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6월 28일에야 개신교도들과 협상을 시작했고 팔츠 선제후, 트리어 선제후, 바이에른(Bayern) 공작 루트비히(Ludwig), 스트라스부르 주교 등을 협상가들로 결정했다.28)

협상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회담 진행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한쪽이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실상 합의는 불가능했다. 7월 2일,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수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증서 가운데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달라고 로마 가톨릭 대표자들에게 요구했다.29)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협상은 진행 절차 문제 때문에 답보상태에 빠졌다. 결국, 하게나우 회담은 1540년 7월 28일에 공식적으로 결렬되었다.30) 하지만 회담이 실패였다고 결론 내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1540년 10월 28일에 보름스에서 회담을 재개할 것과 양측의 협상 사절단을 각기 11명씩으로 할 것(로마 가톨릭 측은 이미 11명이 결정됨), 그리고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의 결정이 아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증서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할 것 등을 결정했기 때문이다.31)

슈말칼덴동맹이 좀 더 강화되길 원했던 부써는 하게나우 회담 기간에 프랑스를 개신교 동맹에 가입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곳에 온 프랑수와 1세의 특사 나사로 드 베이프(Lazare de Baïf)는 교황을 공경하는 확고한 로마 가톨릭교도였지만 정치적으로 교황의 손발을 묶는 일에는 이의가 없었으므로 독일 개신교도들의 대사를 프랑스 왕에게 보내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부써는 그의 제안을 헤센의 영주에게 전하면서 프랑스 파리의 추기경을 만나 협상을 시작하도록 강권했다.32) 이 당시 헤센의 영주는 자신의 이중 결혼, 즉 중혼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중혼은 파면의 중벌을 면하기 어려운 불법이었다. 부써와 멜랑흐톤, 심지어 루터까지도 영주의 중혼을 불가피한 일로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알려지지 않도록 숨겨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게나우에서 부써는 편지로 영주의 중혼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경우가 되게 한다고 설득했다.33) 하지만 영주는 설득되지 않았다.34)

하게나우 회담 상황에 대해 칼빈은 종교개혁을 수용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관망 중인 쾰른, 확실한 종교개혁을 열망하는 팔츠, 평화와 자유를 원하는 마인츠와 트리어 등, 그곳에 모인 모든 제후들이 예외 없이 평화로운 통치를 원했기 때문에 이것이 황제에게 위협적이었을 것으로 보았다.35) 부써는 1540년 9월 1에 바르문트 로이트홀트(Waremund Leuthold)라는 가명으로 출간한 소책자『하게나우 회담에 관하여』(Vom tag zu Hagenaw)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36) 그는 여기서 복음주의자들을 평화 수호자와 교회 개혁자들로, 반면에 교황주의자들을 전쟁 선동가와 과오 방어자들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경, 그리고 교부들과 초대교회 공의회조차도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점, 따라서 개신교도들은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반드시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국가적 회의의 필요성과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교리 논쟁을 주장했다.

사실 부써는 하게나우에서 하나의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쾰른의 대주교 선제후 헤르만 폰 비이트(Hermann von Wied)와 그의 조력자 요한 그로퍼(Joh-annes Gropper)를 만났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영향 받은 전형적인 인문주의자 그로퍼는 하게나우에서 칭의에 관한 대화를 통해 부써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인상을 남겼다.37)


IV. 보름스 교회연합회담: 1540년 10월 28일부터 1541년 1월 19일까지38)

하게나우 회담이 끝난 후 부써는 프랑스가 슈말칼덴동맹에 가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또한 영주 빌립의 중혼 문제를 풀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39) 그러는 동안 황제가 약속한 보름스 회담 개최일인 10월 28일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에 이 회담을 위한 준비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부써는 야곱 슈투름과 요한 슈투름, 마태 파러, 카피토, 칼빈이 보름스 회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처했을 뿐만 아니라, 원근 각처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대표를 파견하지 못한 지역을 대신하여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보름스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 부써는 제네바가 추방한 칼빈을 다시 제네바로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스트라스부르 동료들도 그를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써는 보름스 회담을 위해 칼빈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회담이 끝난 후에 제네바의 요청을 고려하겠노라고 대답했다.40)

하게나우에서 북쪽으로 112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라인 강변의 역사적 도시 보름스에 부써가 도착한 것은 11월 1일이었다.41) 보름스 회담의 의장단이 개신교와 로마교의 사절단을 처음 소집한 것은 1540년 11월 20일이었으나 당시 황제의 재상 니콜라 페레노 더 그랑벨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회담은 개회되지 않았다. 그랑벨러가 황제의 대리자 자격으로 보름스에 도착한 것은 11월 22일이었고, 황제 재상의 개회 연설로 회담이 개회된 것은 1540년 11월 25일이었다.42) 보름스 회담은 종교개혁 이후 독일 개신교도들과 로마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처음으로 시도된 교회연합운동, 즉 신교와 구교의 첫 공식 종교회의였다. 하게나우 회담에서 이미 양측은 두 문서, 즉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이 신앙고백의 ‘변경판’(Confessio Augustana variata)으로 알려진 멜랑흐톤의 변증서를 회담의 기초로 합의했으나, 이에 대한 로마 가톨릭 대표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프랑스를 개신교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양측의 협상을 중재한 부써의 노력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개신교 동맹은 부써만큼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프랑수와 1세는 자신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일을 위해 유불리만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었다. 양측의 협상은 사실상 처음부터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도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개신교도들의 슈말칼덴동맹은 연합이 강화되기는커녕 약화 일로에 있었고 파기될 위기에 직면했다. 부써를 포함한 많은 개신교도들이 보름스 회담에 어느 정도 희망적인 기대를 걸었던 반면에, 루터는 황제가 소집한 10월 28일(au൵ Simonis vnd Jude)의 보름스 회담에 대해 “거기서 양측의 신학자들이 대화를 한다는 것은, 즉 그들이 시간을 잃고 돈을 낭비하며 집안의 모든 것을 소실하거나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부정적 결과를 예단했다.43)

황제의 재상 그랑벨러가 보름스에 도착하던 날까지만 해도 부써는 “독일 민족의 모든 자유와 정의의 최대 적이 궁정”이라고 생각했다.44)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곧 바뀌었다. 개회 다음 날인 11월 26일에 의장들이 진행 방식을 제안했으나, 로마 가톨릭 측은 누구도 몇 주 동안 일을 진척시킬 수 없었고 혼란만 가중되었다. 양측 대표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공적 협상안을 작성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1540년 12월 13일에 로마교의 대표 가운데 요한 그로퍼와 황제의 비서 게르하르트 펠트베이크(Gerhard Veltwijck)가 그랑벨러에게 자신들과 부써와 카피토 사이의 비공식적인 회의를 제안했고, 다음 날인 14일 화요일에는 부써와 카피토가 펠트베이크를 통해 황제의 대리인의 소환을 통보받았다.45) 부써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고 도우셔서 소수인 우리가 이기길,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길!”46)

그랑벨러가 대화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한 이유는 이것이 양측의 평화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회, 즉 유일한 가능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47) 15일 오전 6시에 자신을 찾아온 스트라스부르 개혁자에게 그랑벨러가 전쟁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비밀 회담이 제국의회를 무산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재차 언급하자, 부써는 황제가 철저한 로마 가톨릭교도라는 사실과 그의 종교정책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만일 황제가 비밀 회담을 지지한다면 독일의 개혁운동을 위한 지도자와 같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도와야 한다고 응수했다.48) 부써의 판단에 따르면 비밀 회담은 공적 회담을 약화시킬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에 복음의 유익을 알리고 협상을 타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게 그것은 약속된 제국의회 개최를 위한 일종의 타협이었다. 1540년 12월 15일부터 31일까지 그로퍼의 숙소에서 진행된 비밀 회담은 철통같은 비공개 대화로 이루어졌다.49)

자신의 중혼 문제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헤센의 영주 빌립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라도 황제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써를 개신교 대표로 비밀 회담에 참여하도록 허락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다른 개신교 동료들을 배반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었다. 비밀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원죄와 칭의에 관한 교리부터 논의하기 시작했으나 보름스에 온 로마교회 대표들이 협상을 위한 어떤 대화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랑벨러의 계획에 대한 부써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밀 회담의 주요 대화 상대는 부써와 그로퍼였다. 이미 하게나우에서 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신학적 입장이 상당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성경을 교리의 표준으로 인정하고 1세기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확실한 권위로 인정한다는 공통점 덕분에 대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펠트베이크도 신학적으로 뛰어난 학자였지만 그랑벨러의 대리자라는 자신의 주요 임무를 잊지 않았다.50)

비밀 회담의 성과는 12월 25-31일 사이의 어느 때에 ‘보름스 책자’(das Wormser Buch)라고 불리는 문서로 작성되었는데 그로퍼가 작성한 것으로 평가된다.51) 이신칭의, 성례, 교회 조직 등과 같은 교회 교리에 관한 이견들은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반면에 오히려 실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하는 견해가 없었고, 그로퍼와 펠트베이크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양보하지 못하는 4가지 요소, 즉 성자들의 중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고해성사, 화체설에 대한 조항을 작성했다.52) 1541년 1월 5일 수요일, 부써는 작성된 문서를 가지고 보름스를 떠나 7일 금요일에 기센(Giessen)에서 영주 빌립을 만나 보름스 조항들에 대한 서면 승인을 받았고, 9일 일요일 아침 10시에 다시 보름스로 돌아와 그날 저녁에 그랑벨러를 만나 협상한 후, 다음 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킴 2세에게 보름스 조항을 보내면서 반동적인 교황주의자들 때문에 공식 회담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전했다.53)

그랑벨러가 보름스 조항을 황제에게 제출하기 전에 가스파로 콘타리니(Gasparo Contarini)와 요한 에크를 포함한 몇몇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보내었는데, 이것은 로마교회 입장의 비판과 수정 내용을 함께 제출하기 위한 조처였다.54) 로마 가톨릭 측의 요한 에크나 종교개혁 측의 안드레 오시안더와 같이 상대방에 대한 극심한 반감과 반대에 사로잡힌 자들이 보름스 회담의 대표에 들어 있는 한, 사실상 어떤 신학적 합의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1541년 1월 14-17일까지 나흘 동안 보름스 회담에 참석한 양측 신학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약 80명의 참석자들 가운데 양측의 공식 대변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에크와 멜랑흐톤이었다. 에크가 아우크스부르크의 1530년판과 1540년판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포문을 연 후에 논의에 들어간 보름스 책자의 두 번째 조항인 원죄 문제는 1540년 12월 15일에 이미 논의된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55)

1월 17일에 그랑벨러는 논쟁의 양측 대표주자 멜랑흐톤과 에크, 그리고 또 다른 양측의 대표 신학자 부써와 요한 멘싱[거](Johannes Mensing[er])를 자신의 숙소로 불러 교리에 관한 합의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는데, 그들은 그랑벨러가 동석한 자리에서 원죄에 관한 짧은 합의서를 성공적으로 작성할 수 있었다.56) 보름스 회담의 논쟁을 통해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론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협상 논의의 기초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로마교회 측 대표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결과였지만 협상이 개신교도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랑벨러의 본심도 크게 작용했다. 그랑벨러는 1540년 12월 초에 로마 가톨릭 대표자들의 불일치를 보면서 이런 방식으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용의주도하게도 이미 1월 11일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 회담을 끝내고 연기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57)


V.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541년 4월 5일부터 7월 29일까지58)

불어로 라티스본(Latisbonne)이라 불리는 독일 남부의 자유도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는 바바리아(Bavaria)로 알려진 바이에른 주에 속한다. 보름스 종교회담이 개최되기 전인 1540년 9월 14일에 이미 황제 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회를 1541년 1월 6일에 소집하겠노라고 선언했으나, 종교적 불일치로 인해 소집일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1541년 1월 20일에야 겨우 레겐스부르크를 소집 장소로 반포할 수 있었다.59) 황제는 2월 23일까지 도착하지 못했고, 부써는 야곱 슈투름과 칼빈과 함께 2월 22일에 스트라스부르를 출발하여 3월 10일에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다.60) 2월과 3월 사이에는 대부분의 군주들, 다양한 지역과 자유도시들의 대표들, 신학자들이 제국의회의 개최 도시에 도착했는데, 개신교도들은 황제가 자신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교황의 사절들은 황제가 교황의 품위를 손상시킬 만한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61)

4월 5일, 제국의회 개회식에서 종교 문제를 가장 중요한 논제로 간주하고 이를 위해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려야 한다는 황제의 제안이 낭독되었다.62) 4월 21일에는 황제가 종교 문제를 논의할 소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에크와 그로퍼와 율리우스 플룩(Julius von Pflug)을 로마교회 진영의 대표로, 멜랑흐톤과 부써와 요한 피스토리우스(Johannes Pistorius)를 종교개혁 진영의 대표로 임명했다.63) 4월 27일 수요일에 시작한 신학 토론에서 첫 4개 조항은 어렵지 않게 합의했다.64) 칭의를 다루는 다섯 번째 조항에 이르러서는 에크와 멜랑흐톤 사이의 심각한 견해 차이 때문에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5월 2일, 새로 작성한 문항으로 양측이 합의를 이룬 것은 부써와 콘타리니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이었다.65) 교황의 특사로 참석한 콘타리니 추기경은 루터처럼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한 경험자였고 로마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는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다.66)

1541년 5월 1일, 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의 대표로 부써와 콘타리니가 만났다. 콘타리니는 부써에게 평화를 촉구한 반면에,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자는 교황 특사에게 교회일치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콘타리니에게 부써는 신학과 철학의 원리들을 잘 배운 학자요, 로마교회 측의 박사들을 인내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고 영리한 토론가로 보였다.67) 로마교회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합의로 칭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기쁨과 새로운 희망을 갖기에 충분했던,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황제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간주했고, 콘타리니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68) 칼빈의 평가에 의하면, “칭의에 관한 논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결국 조항이 새롭게 작성되었고, 이것을 양편이 약간의 수정을 가함으로써 받아들였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그 사본을 읽게 된다면 적들이 그렇게나 많은 [내용]을 양보한 [사실]에 놀랄 것이다.”69)

칭의론 합의에 대해 누구보다 기뻐한 종교개혁자는 당연히 부써였고, 멜랑흐톤을 포함한 작센의 대표자들도 모두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70) 합의에 대한 감격과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5월 5일, 성례론을 다룰 때 콘타리니가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된 화체설을 책의 14항에 삽입해야 한다고 고집하자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 문제로 5월 13일까지 설전을 벌였으나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71) 5월 7일에는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기 새롭게 작성한 조항을 내세웠으므로 회의는 결렬 위기를 맞았다. 부써는 로마교회의 대표들이 고집스러운 교황주의자들인 극단파와 일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온건파로 분열될 경우 정치적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화체설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해야 하지만 로마교회의 온건파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몇몇 의심스러운 예전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개신교 대표자들을 설득했다.72) 덕분에 그들이 협상을 중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양측 대표자 모두 협상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사람 황제와 그랑벨러는 이번 기회에 제국 내의 종교적 평화를 통한 정치적 안정과 단합을 이루길 간절히 염원했다. 그래서 양측 신학자 6명으로 구성된 소의회는 5월 14일부터 22일까지 나머지 조항들을 논의해야 했으며 24-25일에는 레겐스부르크 책자의 전체 조항들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73) 이렇게 완성된 23개 조항의 레겐스부르크 책자를 그랑벨러가 개신교 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로마교회의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부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레겐스부르크 책자와 이 책자 조항들에 반대하는 개신교 대표자들의 반대 조항 문서가 그랑벨러의 손을 거쳐 5월 31일 공식적으로 황제에게 전달되었으나 합의를 위한 모든 수고의 결과는 허무했다.74)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레겐스부르크 책자에 만족하지 못했다. 양측의 협상이 결렬된 결정적 원인은 칭의론이 아니라, 뜻밖에도 교회론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의 교회일치를 위한 양측의 공식 종교회의 대신에 개최된 레겐스부르크 통합을 이루기 위한 황제의 적극적인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회가 1541년 7월 29일에 기독교 신앙의 일치라는 교회연합의 꿈과 희망을 저버린 채 폐회되었으나, 제국에서 종교개혁이 성취되길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소망했던 황제는 개신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소유를 보장해주었고 그들의 지역에서 교회와 수도원 개혁을 해나가도록 허용했다.75) 탈무드라는 별칭을 얻은 레겐스부르크 최종 책자의 복사본은 최종 확정의 결과물이 아닌 미완의 잠정안으로 독일 전역에 퍼졌다. 그 책자의 첫 복사본은 부써의 손에서 탄생했다.76) 그는 그것을 두 번, 즉 1541년 9월과 1542년 2월에 각각 라틴어로 출간했고 1541년 12월에는 독일어로 출간했다.77) 두 번째 복사본 출간의 영예는 멜랑흐톤에게 돌아갔고 칼빈은 세 번째 출간의 주인공이 되었다.78)

1541년의 레겐스부르크 모임에서 보여준 회유적인 자세 때문에 부써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에 대해 루터는 비난하기를, “악당 부써는 나의 모든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나는 결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무 자주 나를 배신해왔다. 지금 그는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사악하게 행동했다. 왜냐하면 나와 교황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79) 개신교 동료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부써의 추종자들이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의사 게레온 자일러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프레흐트조차도 부써가 교회연합을 위해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했다. 부써를 존경했던 칼빈도 부써의 지나친 자신감을 비판했지만, 1541년 이후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또 다른 부써”(another Butzer)와80) “교회연합운동가 칼빈”(Calvinus Oecumenicus)81)이라는 평가를 받는다.82)


VI. 나가는 말

16세기 개신교회와 로마교회는 1540-41년 사이에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등지에 모여 연합과 일치를 모색했는데, 이것이 기독교 최초의 연합운동이었다. 16세기 교회연합운동은 교황청이 주도하거나 교회 공의회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 부써가 주도한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성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최초의 교회연합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양측 극단론자들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접근 때문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요한 에크였고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사실상 루터였다. 이 두 사람은 비관적 선입견이 충만하여 처음부터 교회연합 모임을 좋게 보지 않았고 시종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루터는 교회연합 모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져야 할 책임이 없는 반면에 협상 의지가 박약했던 에크는 참여자이기 때문에 협상 결렬의 직접적인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에크는 시종일관 자기주장만 내세웠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심지어 자기 진영의 소리조차도 듣지 않은 고집불통이었다.

에크와 달리, 부써는 협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양보할 자세로 교회연합 모임에 참가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심장인 이신칭의 교리까지 양보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부써는 라이프치히 15개 합의 조항에서부터 마지막 레겐스부르크 합의 조항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희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일치를 위한 부써의 기준이었다.

부써가 교회일치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고군분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종교개혁의 교리적 심장인 이신칭의 교리까지 팔 각오로 교회연합에 목숨을 걸진 않았다. 이런 점에서 부써를 중재와 협상에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 부써에게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길 원하는 진심’이었다.

부써가 수많은 동료 종교개혁자로부터도 비난을 받으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라는 그의 신학과 신앙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둘이나 셋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친 사람처럼 교회일치에 매달렸던 것이다.

1540-41년의 교회연합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정치나 황제, 심지어 교황도 아니었다. 사실상 그것은 천주교 신학자들, 특히 에크의 비타협적인 자세와 고집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처음부터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협상 자리에 임한 양측 대표들의 협상 의지박약이 한몫했다. 협상 결렬은 우려했던 칭의론에서가 아닌, 교회론에서 발생했다.

천주교 대표들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요, 성찬론은 화체설뿐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교회일치를 위한 부써의 희망과 노력은 허무로 돌아갔다. 협상 결렬의 가장 큰 피해자는 황제도, 교황도, 루터도, 에크도 아닌 부써였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뜻밖에도 칭의론이 아닌 교회론이었다.


Notes
2) Cornelis Augustijn, De godsdienstgesprekken tussen rooms-katholieken en protestanten van 1538 tot 1541 (Haarlem: De Erven F. Bohn N.V., 1967), 24, 각주 1. 아우구스떼인의 평가에 따르면 라이프치히 합의에서 개신교 칭의론이 포기되었다는 카르다운스(Cardauns)의 주장은 틀렸다.
4) Ibid., 249; BDS 7, 399. 그는 2월 12일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5) CO 10b, 322-23(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1539년 3월 16일자 편지).
6) BDS 9/1, 53.
8) Ernst Ludwig Enders, ed., Dr. Martin Luther’s Briefwechsel 12 (Calw & Stuttgart: Verlag der Vereinsbuchhandlung, 1903), 134-38(부써가 루터에게 보낸 1539년 4월 19일자 편지). = WA Br. 8, 413-17. 여기서 부써는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악마의 장난질이었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10) BDS 7, 439,33-440,2: “Wolan, ich gibe zu, das man in rechten hauptstucken Christlicher gemeynscha൵t sich ja wol konde vergleichen und durch Christliche freiheyt das andere in Christlicher eynigkeyt gleich onverglichen lassen, Wa man alleyn von hertzen u൵ Gott sehen wolte, sich von[440] Rom nichts hinderen liesse und konde sich der Kirchengutter halben vertragen.” 영어 번역은 다음 참조. Greschat, Martin Bucer, 171. “BDS 7, 397-502”는 부써가 1539년 6월 3일에 쿤라트 트레베 폰 프리데스로이엔(Chunrad Trewe von Fridesleuen)이라는 가명으로 출간한 책,『뉘른베르크 평화협정에 관하여』(Vom Nürnbergischen fridestand)의 원문이다. 이것은 세 남자(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귀족, 개혁에 개방적인 신중한 가톨릭 수도원장, 군주의 서기관)가 슈파이어 제국도시에서 벌이는 가상의 토론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서기관이 부써의 입장을 대변한다. 여기서 그는 독일 전체의 교회회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1) 참조. BDS 7, 493,27-494,2. 다음 글과 같이 부써는 교회재산에 관하여 아주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다룬 연구물을 남겼는데, 이 글 역시 세 사람이 벌이는 가상의 토론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BDS 12, 275-494.
13) Max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des Grossmüthigen von Hessen mit Bucer I (Osnabrück: Otto Zeller, 1965), 99-105(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39년 9월 16일자 편지); 107-108(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39년 10월 14일자 편지).
14) Ibid., 105-106(영주 빌립이 부써에게 보낸 1539년 9월 30일자 편지).
15) 헨리의 왕궁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루터는 호언장담했다. Enders, ed., Dr. Martin Luther’s Briefwechsel 12, 260,28(루터가 부써에게 보낸 1539년 10월 14일자 편지): “De rege Angliae vereor, ne tua spes sit nihil.” = WA Br. 8, 569.
16)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109-13(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39년 10월 16일자 편지).
17) 1489년 7월 2일, 노팅햄셔(Nottinghamshire)의 애즈락톤(Aslockton)에서 태어나 1556년 3월 21일에 순교한 영국 종교개혁자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통치 기간에 캔터베리 대주교였고 영국에 성공회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공동기도서 첫 두 판의 편집과 출간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 성공회 예식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피의 여왕 메리에 의해 옥고를 치르다가 순교했다.
18) Hastings Robinson, ed. & trans., Original Letters Relative to the English Reformation, Written during the Reigns of King Henry VIII, King Edward VI, and Queen Mary: Chiefly from the Archives of Zurich (Cambridge: The University Press, 1847), 526-30(부써가 토마스 크랜머에게 보낸 1539년 10월 29일자 편지).
19) 참조.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116(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39년 11월 14일자 편지).
24) Ibid., 199-200.
26) Greschat, Martin Bucer, 175. 하지만 엘스는 부써가 6월 28일에 하게나우에 도착하여 29일에 그곳에서 설교했다고 주장한다. 참조. Eells, Martin Bucer, 487, 각주 11.
31) Neuser, ed., Die Vorbereitung der Religionsgespräche, 20. 트리어 선제후 요한이 1540년 7월 23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마인츠의 선제후가 보름스 종교회담의 협상가로 임명되었다.
32) Eells, Martin Bucer, 273. 참조.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196-97(부써가 헤센의 영주에게 보낸 1540년 7월 20일자 편지).
33)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175-78(부써가 헤센의 영주에게 보낸 1540년 7월 3일자 편지); 178-180(부써가 헤센의 영주에게 보낸 1540년 7월 8일자 편지); 192-96(부써가 헤센의 영주에게 보낸 1540년 7월 18일자 편지). 여기서 부써는 권면하기를, 영주가 새로운 결혼 계약으로는 두 번째 부인인 마가렛(Margaret)을 첩으로 삼고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여기고 대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신의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거룩한 거짓말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후 부써는 축첩이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중혼을 정죄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중혼에 대한 부써의 자세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Hastings Eells, The Attitude of Martin Bucer toward the Bigamy of Philip of Hesse (New Haven: Yale University, 1924), 123-31, 223-40.
34) 헤센의 영주 빌립은 부써의 충고를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았다. 영주가 보기에 거짓말은 그냥 죄일 뿐이었고 결혼 서약을 파기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가렛의 친인척들이 그것을 수용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것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다음 참조. Eells, The Attitude of Martin Bucer, 113-20.
35) CO 11, 66(칼빈이 뒤 떼일리[Du Tailly]에게 보낸 7월 28일자 편지).
36) BDS 9/1, 146-321. 여기에는 독일어와 라틴어로 각각 출간된 원서 내용 본문을 대조해서 제시한다. 라틴어판은 “per quos steteri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6세기 출간의 일반적 관행처럼 자국어인 독일어판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라틴어판은 식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부써는 회담에 대해 위 글과 유사한 관점을 제공하는 공개편지 두 편도 역시 가명으로 출간했는데,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으로 저술했다. 대조 원문은 다음을 참조. BDS 9/1, 91-145.
37) Augustijn, De godsdienstgesprekken, 43-44. 부써저작전집 편집자들은 그로퍼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힌 출판물인 1544년에 출간된 책의 복사본을 부록으로 출간했다. 참조. Johannes Gropper, Christliche und Catholische Gegenberichtung Köln 1544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2006).
40) Ibid., 278. 이 문제에 관한 칼빈의 견해는 다음을 참조. CO 11, 166(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야곱 베르나르두스[Iacobus Bernardus]에게 보낸 1541년 3월 1일자 편지); 169(칼빈이 비레에게 보낸 1541년 3월 1일자 편지); 170(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1541년 3월 1일자 편지); 180(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1541년 3월 29일자 편지). 3월 1일자 편지 세 편은 모두 칼빈이 울름(Ulm)에서 보낸 것이고 마지막 편지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것인데, 네 편의 편지 모두에서 칼빈은 자신과 부써의 생각이 무엇인지 말한다.
43) Enders, ed., Dr. Martin Luther’s Briefwechsel 13, 187,30-33(루터가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Albrecht] 공작에게 보낸 1540년 10월 10일자 편지): “Es ist itzt au൵ Simonis vnd Jude ein tag angesetzt vom Keiser zu Wormbs, da die Theologen beider seyts sollen eine Unterrede halten, die ist, sie sollen Zeit verlieren, geld verzehren vnd zu hause alles verseumen oder schaden nemen.”
44)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238(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1월 22일자 편지): “...; der hove ist der gröste feind aller freiheit und grechtigkeit deutscher nation.”
45) Eells, Martin Bucer, 280. 이런 비공식적 협상 제안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268-70(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2월 14일자 편지); 273-79(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2월 20일자 편지); 517-18(파이게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2월 20일자 편지).
46)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269(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2월 14일자 편지): “...; es will aber wasser sein. Gott gebe gnad und hel൵e, das wir doch etliche gewinnen, das auch geschehen solle.”
47) BDS 9/1, 323. 그랑벨러는 먼저 양측 대표 3명씩으로 구성된 소회의를 제안했으나 개신교 측에서 거절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참조. Augustijn, De godsdienstgesprekken, 54.
50) BDS 9/1, 324.
51) Ibid., 325. 보름스 책자의 독일어와 라틴어 대조 원문은 다음 참조. BDS 9/1, 338-483.
52) Eells, Martin Bucer, 283. 비밀 회담을 통해 작성된 보름스 책자에 관한 부써의 견해는 다음 참조.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 287-94(부써가 영주 빌립에게 보낸 1540년 12월 30일자 편지); 532-33(부써가 선제후 요아킴[Joachim] 2세에게 보낸 1541년 1월 10일자 편지).
54) Ibid., 286.
56) Ibid., 56; Eells, Martin Bucer, 286.
59) Ibid., 233.
60) Eells, Martin Bucer, 288. 참조.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I, 17-21(부써가 빌립 영주에게 보낸 1541년 2월 20일자 편지).
64) Ortmann, Reformation und Einheit der Kirche, 237. “레겐스부르크 책자”는 그로퍼와 부써가 작성한 “보름스 책자”를 교황의 특사 콘타리니와 로마교회 측 대표 모로네(Morone)와 그로퍼가 약간 수정한 내용이었다. 참조. BDS 9/1, 327. 부써가 그 책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부써를 저자로 오해했던 멜랑흐톤이 나중에 선제후에게 보내는 1543년 4월 8일자 편지에서 “그로퍼가 레겐스부르크를 작성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Eells, Martin Bucer, 291-92; 490, 각주 36.
66) Ibid., 179.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이전, 콘타리니에 대한 부써의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Eells, Martin Bucer, 288-89; Lenz,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II, 21, 각주 4.
69) CO 11, 215(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1541년 5월 11일자 편지): “De iustifiatione acriores fuerunt contentiones. Tandem conscripta est formula, quam adhibites certis correctionibus utrinque receperunt. Miraberis, scio, adversarios tantum concessisse, quum legeris exemplar, ...”
74) Ibid., 97. 참조. Eells, Martin Bucer, 295.
75) Lau & Bizer,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to 1555, 170. 하지만 황제가 원한 종교적 일치는 사실 제국 내의 정치적 일치를 위한 수단이었고, 종교개혁 자체를 긍정적으로 고려하거나 지지하지는 않았다. 참조. Eells, Martin Bucer, 299-300.
76) 원문은 다음 참조. BDS 9/2, 115-227.
77) 원문은 다음 참조. BDS 9/2, 229-428.
78) Eells, Martin Bucer, 491, 각주 63. 엘스에 따르면 복사본은 에크의『변증』(Apologia)이 다섯 번째이고, 그로퍼가 1545년에 여섯 번째로 출간했다.
82) 교회일치 문제와 관련하여 부써와 에라스무스와 멜랑흐톤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Ortmann, Reformation und Einheit der Kirche, 36-40.

References
1. Augustijn, Cornelis. De godsdienstgesprekken tussen rooms-katholieken en protestanten van 1538 tot 1541. Haarlem: De Erven F. Bohn N.V., 1967.
2. Eells, Hastings. The Attitude of Martin Bucer toward the Bigamy of Philip of Hesse. New Haven: Yale University, 1924.
3. Eells, Hastings. Martin Bucer. New Haven: Yale University, 1931.
4. Enders, Ernst Ludwig, ed. Dr. Martin Luther’s Briefwechsel 12. Calw & Stuttgart: Verlag der Vereinsbuchhandlung, 1903.
5. Enders, Ernst Ludwig, ed. Dr. Martin Luther’s Briefwechsel 13. Calw & Stuttgart: Verlag der Vereinsbuchhandlung, 1911.
6. Greschat, Martin. Martin Bucer: A Reformer and His Times. Stephen E. Buckwalter, trans.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7. Gropper, Johannes. Christliche und Catholische Gegenberichtung Köln 1544.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2006.
8. Lau, Franz & Ernst Bizer.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to 1555. Brian A. Hardy, trans.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69.
9. Lenz, Max,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des Grossmüthigen von Hessen mit Bucer I. Osnabrück: Otto Zeller, 1965.
10. Lenz, Max, ed.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des Grossmüthigen von Hessen mit Bucer II. Osnabrück: Otto Zeller, 1965.
11. Neuser, Wihelm Heinrich, ed. Die Vorbereitung der Religionsgespräche von Worms und Regensburg 1540/41. Neukirch: Neukirchener Verlag, 1974.
12. Nijenhuis, Willem. Calvinus oecumenicus. Calvijn en de eenheid der kerk in het licht van zijn briefwisseling. ’s-Gravenhage: Martinus Nijhoff, 1959.
13. Ortmann, Volkmar. Reformation und Einheit der Kirche: Martin Bucers Einigunsbemühungen bei den Religionsgesprächen in Leipzig, Hagenau, Worms und Regensburg 1539-1541. Mainz: Verlag Philipp von Zabern, 2001.
14. Pauck, Wilhelm. The Heritage of the Reformation. Chicago: The Modern Franklin, 1950.

<기타 자료>
15. BDS = Stupperich, Robert, ed. Martin Bucers Deutsche Schriften Band V. Zur auswärtigen Wirksamkeit 1528-1533. Gütersloh: Gerd Mohn, 1975.
16. CO = Calvini Opera Om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