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No. 0, pp.395-429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9
Received 19 Sep 2019 Revised 14 Nov 2019 Accepted 15 Nov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12.50.395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와 전도: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윤은석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공동연구위원, 교회사 (startag222@hanmail.net)

Early Protestant Missionaries in Korea and Evangelism: Focused on Rosetta S. Hall
Enseok Yun
Ph.D. Researcher, Church History Institute for the Study of Modern Christianity of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로제타 홀(Rosetta S. Hall)을 사례로 하여 내한 의료선교사의 복음전도를 연구하는 것이다. 교회사 학계에서 내한 복음선교사의 복음전도는 어느 정도 연구가 되었지만, 의료선교사의 복음전도의 경우 거의 연구가 되지 않았다. 의료선교사는 의사로서 의료봉사에 최적화된 인물이지만, 한국 땅에서 의료선교에만 매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그러한 의료선교사들 중 1890년에 내한한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의료선교사의 복음전도의 모습들을 다루고자 한다.

본 논문은 먼저 로제타 홀의 전도 이해를 다룬다. 당시 내한 선교사들은 의술과 복음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다. 의술이 복음의 도구인지, 의료봉사 자체를 강조하는지에 따라 견해가 양분되었다. 로제타 홀은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인한다. 또한 로제타 홀이 피전도자에게 직접 전도한 기록들과 전도부인 등을 양성하여 간접적으로 전도한 사례들도 정리한다. 이를 통해 로제타 홀의 한국에서의 전도의 모습을 개관하게 될 것이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the evangelism of medical missionary in Korea, using Rosetta S. Hall as an example. The evangelism practices of evangelical missionaries in Korea has been studied to some extent within the academic world of church history, but little has been done in the case of medical evangelists. A medical missionary is an optimist for medical services as a doctor, but he did not focus solely on medical missionary work in Korean field. They tried to preach the gospel in many ways to non-Christians whenever they had the opportunity. This study focuses on the evangelistic work of a medical missionary, Rosetta S. Hall who arrived in Korea in 1890, along with other medical missionaries.

This thesis first deals with the Rosetta Hall’s understanding of evangelism. Missionaries in Korea at the time disagre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cine and the gospel. Opinions were divided depending on whether medicine was an instrument of the gospel or whether medical services themselves had to be emphasized. It will determine to which of these sides Rosetta Hall belongs. It also synthesizes the records that indicate Rosetta Hall evangelized directly to non-Christians and the cases which Rosetta Hall indirectly evangelized by fostering Bible Women. This will open up an overview of the evangelistic work of Rosetta Hall in Korea.


Keywords: Medical missionary, Evangelism, Rosetta Hall, Repentance, Bible Women
키워드: 의료선교사, 복음전도, 로제타 홀, 회개, 전도부인

I. 들어가는 말

연구자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의 복음전도 활동이다. 의료선교사는 의술을 통한 사회봉사, 사회참여에 보다 전문화된 선교사이다. 그들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인들에게 의술을 통해 선을 베풀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한국 선교 기간 동안 의료봉사만 하지는 않았다. 복음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의료선교사도 직접 피전도자에게 복음을 전했다. 의료선교사의 직접전도와 간접전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바로 본 논문의 목적이다.

여기서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만일 모든 내한 의료선교사들의 복음전도를 조사한다면, 분량도 많아지겠지만, 그들의 모습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의료선교사들은 의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복음전도에 대해 일치된 견해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면서 적절한 분량의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자는 초기 한국 선교 당시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홀(Rosetta S. Hall)을 대표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로제타 홀은 “조선에 둘째 도성되는 평양에 온 후 二十五주년간 병 고치는 일과 맹아 교육과 직접 간접으로 구령(救靈) 사업에 여간한 힘을 썼다.”1) 직접전도와 간접전도는 로제타 홀이 이후 한국 선교에서 계속했던 선교 방식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그녀가 전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실천했는지가 다루어질 것이다.

현재 복음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되어있다.2) 하지만 의료선교사의 복음전도 활동의 경우 일부 연구되었으나, 제한적으로 연구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에 대한 연구는 의료선교사(간호사)로서 서서평이 어떻게 토착화되어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통전적 선교를 했는지 밝히는 데 주 목적을 둔 것으로 복음전도가 주된 관점이 아니다.3) 또한 의료선교사인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를 다룬 연구가 존재하지만, 이것 역시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의료 활동이 전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과 그녀가 순회전도여행을 했다는 것을 언급할 뿐 자세하게 의료선교사의 전도 활동을 추적하지는 않았다.4) 미국 남장로교의 의료선교에 대한 연구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어떻게 한국에서 병원을 세우며 의료선교사를 파송했는지를 연구한 것으로 전도를 크게 다루지는 않았다.5) 차신정의 연구 일부에서 의료선교와 복음전도의 상관관계가 언급되었다. 이 연구는 의술이 복음전도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하였고, 병원에서는 전도가 이루어졌고, 의료선교사들도 복음전도를 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의료선교사들의 전도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정도여서, 의료 선교사의 복음전도 활동을 충분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6) 당시 로제타 홀과 함께 의료선교 활동을 하였던 박에스더에 대한 연구도 존재하며, 박에스더의 전도 활동은 로제타 홀의 전도 활동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개신교 의사의 활동이지, 내한 선교사의 활동이 아니다.7) 이 외의 의료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들도 의료선교 또는 의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으로 전도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8) 로제타 홀에 대한 연구들도 복음전도의 관점에서 진행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9)

로제타 홀은 결혼 전에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윌리엄 홀(William J. Hall)과 결혼 후에는 로제타 홀로 불렸다. 본 논문에서는 편의상 로제타 홀로 통일할 것이다. 또한 직접전도와 간접전도의 용어에 대한 정의도 내려야 한다. 하도균은 “간접전도란 전도자가 피전도자에게 복음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거나 선포하는 형식이 아니라, 어떤 도구나 방편을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였다. 하도균의 간접전도의 정의에 따르면, 소책자와 전도지 배포, 찬양 등은 간접전도이다.10)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로제타 홀이 직접 행한 전도 활동을 직접전도, 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한 전도 활동은 간접전도로 정의하였다. 그리하여 로제타 홀이 소책자, 전도지 등을 피전도자에게 직접 나누어 주는 것은 직접전도로 분류하였다. 반면 한국인 전도자를 훈련시켜서 전도하게 한 것은 간접전도로 분류하였다.

본 연구는 로제타 홀이 내한한 1890년부터 1914년까지를 그 범위로 한다. 그녀의 전도 이해는 1915년부터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선교 초기에 로제타 홀은 전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의술은 복음전도를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1915년에 이르면 전도를 강조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의술 자체에 대한 강조점도 나타났다.11) 이 어간부터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동등한 위치에서 이해하였을지 모른다. 1925년에는 사회복음에 대한 언급도 나타났다.12) 192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개신교계에 YMCA를 중심으로 사회복음이 강조되었고, 다수의 감리교인들이 YMCA에서 활동하였다.13) 로제타 홀의 사회복음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전도 이해의 변화에 따라,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 1914년까지를 연구 범위로 정하였다.


II. 전도 이해: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의료선교사

초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관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았다. 알렌과 에비슨(Oliver R. Avison)은 의료 등의 사회적 봉사를 기독교 정신으로 수행하는 것이 선교라고 인식했다. 반면 빈튼(Charles C. Vinton)과 마펫(Samuel A. Moffett)은 복음전도가 기독교 봉사보다 우선한다고 믿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부부, 헤론(John W. Heron) 부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등은 시기에 따라 입장이 변하지만, 1885-1890년까지는 복음전도에 우선을 두었다.14) 이러한 선교관의 차이로 인해 에비슨이 1900년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기부한 1만 불로 선교 병원을 지으려고 했을 때, 5,000불은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며 문제제기를 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15) 당시 복음전도의 우위를 강조하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적 봉사를 강조하는 선교사들의 선교관의 차이로 인해 의견 불일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의술은 복음전도를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의술 자체가 복음적인지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복음전도의 우위를 강조했던 것이라면, 후자는 의술을 통한 사회봉사가 가지는 무언의 기독교적 메시지를 강조했다.16) 이것은 폴웰(E. D. Follwell) 선교사는 의술을 통한 복음전도를 강조한 반면, 샤록스(A.M. Sharocks)와 러들로(Alfred I. Ludlow) 선교사가 의료선교가 가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에서도 확인 가능하다.17)

그렇다면 1890년 10월에 내한한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은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먼저 로제타 홀이 의료선교사로 내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그녀는 외국 땅에 간 최초의 독신여성 선교사인 엘리자 애그뉴(Eliza Agnew)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면서 선교사에 대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버티 노말 인스티튜트(Liberty Normal Institute) 등에서 교사 훈련을 받을 때, 케너드 챈들러(Kennard Chandler)가 주일 아침에 인도에 여성 전도자와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자, 다시 한 번 선교사로의 삶을 다짐했다. 로제타 홀의 말에 따르면, 챈들러가 요청한 것이 교사였으면, 교사를 준비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의료선교사가 된 것에는 챈들러가 인도에 의사가 필요하다고 한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의료선교사를 준비했던 것은 스스로 복음 사역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신학대학교가 아닌, 필라델피아의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at Philadelphia)에 들어가 1889년에 졸업하였다.18)

내한 전 로제타 홀이 행한 전도 실천들은 그녀가 전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로제타 홀은 전도에 적합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전도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내한 전인 1890년 8월 24일자 일기에 보면, 그녀가 기차를 타고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중 한 나이 든 남자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녀는 강신론자인 이 남성에게 “『어린아이의 세대』(Child’s Generation)라는 소복음 책자를 읽어 주었”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게 함을 전해주었다.19) 1890년 8월 27일자 일기에 보면 기차역에서 야간 경찰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음주법과 관련하여 시작된 대화는 기독교 주제로 이어졌는데,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경찰관에게 로제타 홀은 “『영적교감』(Communion)과『언젠가는』(Sometime)”이라는 기독교 소책자를 전해주었다.20)

그녀의 글에 발견되는 영혼구원에 대한 강조점들도 그녀의 전도 이해를 확인할 수 있는 한 단면이 된다. 1890년 9월 7일자 한국행 선박에서 쓴 일기에 따르면, 중국어 예배에서 테프트(Taft) 목사의 설교와 중국인 천싱의 통역이 있었는데, 로제타 홀은 “이것이 오늘 오후 예배에 참석한 한 사람뿐 아니라 더 많은 중국인들에게 천국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고 기도한다.”라고 하였다.21) 그녀가 말하는 천국의 길이란 결국 영혼구원을 의미한다. 1892년 10월 22일자 일기에서는 그녀의 남편 윌리엄 홀의 평양 개척 선교에 대해 기록하면서 “나는 의사 선생에게 풍성하고 영화로운 내일이 되고, 또 많은 한국인이 천국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을 그가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22) 여기서 표현된 천국 시민 역시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관용어이다.

로제타 홀은 복음전도에 대한 갈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1891년 5월 17일자의 일기에 보면, 그녀는 요한복음에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으니”라는 표현이 30번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들 한국인들을 그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라고 기록하였다.23) 1891년 6월 29일자 일기에서도 그녀의 전도에 대한 갈망이 드러난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을 보고 벵겔(Margaret Bengel)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벵겔은 하나님께서 이 여인이 오래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누군가가 예수님을 전해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로제타 홀은 한국어를 빨리 습득하여 복음 전하기를 바랐다.24) 그녀는 한국의 농아(聾啞)는 “복음전도자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영구적인 침묵 속에 사는 한국의 14,000명 이상”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영혼이 있지만 그것이 있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25) 이 표현 속에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농아에 대한 그녀의 안타까움과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갈망이 내재되어있다.

그렇다면 로제타 홀에게 의술과 복음은 어떠한 관계가 있었을까? 그녀는 의술이 전도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1890년 10월 9일자 일기에 보면, “지금 나는 이교도들을 위한 의료선교의 길을 가고 있다. 나 자신이 이렇게 미약한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내가 그들에게 우리 구세주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나온다.26) 그녀의 표현에는 자신은 의료선교사인데, 이를 통해 구세주에 대해 가르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묻어있다.

로제타 홀의 의술과 복음전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의료선교를 통한 영혼구원에 대한 그녀의 바람이다. 1892년 4월 12일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양반의 딸의 목 주위의 경부 림프절 종대 제거 수술을 준비하면서 이 환자가 병원에 머물면서 “우리와 잘 지내기를 바라며 그녀가 잘 낫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세주를 배우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소망을 피력했다.27) 병원을 통해 단순히 낫는 것뿐 아니라 전도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의료선교를 통한 영혼구원에 대한 그녀의 바람은 또 발견된다. 1892년 3월 8일자 일기에는 윌리엄 홀이 조지 존스(George H. Jones)와 함께 시골 여행 간 것이 기록되었다. 이때 윌리엄 홀은 “올라가는 도중에도 가능하면 전도와 의료 사역을 겸할 예정”이었는데 이에 대해 로제타 홀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옥토’(막 4:20)를 풍부하게 준비해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기록하였다.28)

로제타 홀은 의료선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복음전도를 하려고 하였다. 1894년 5월 19일자 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홀 부부는 평양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아직까지는 어떤 종교적인 사역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부터 진료를 마친 뒤 구경을 끝낸 후 시작해 볼 작정이다. 이 단계에서 그 전에 뭔가 시도한다면 많은 관심을 끌 수 없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라고 하였다.29) 결국 로제타 홀에게 의술은 전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매개였다.

의술의 시행 여부에 대해서는 고민할지라도, 병원을 통한 전도는 고민하지 않았다. 1890년 11월 9일자 일기를 보면, 난소의 종양 또는 자궁근종으로 추정되는 질병을 가진 이 씨 부인은 로제타 홀에게 성공 확률이 1/50인 수술을 요청하였다. 이때 로제타 홀은 수술이 실패할 때 받게 될 사역의 해로움으로 인해 고민하였다. 이 씨 부인은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몇 달밖에 살 수 없지만, 수술의 실패로 인해 환자들이 로제타 홀에게 수술을 받지 않으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저했던 것이다. 그녀는 수술 여부의 결정은 미루면서 한글 소책자를 주었고, “비록 이생의 삶은 연장되지 않더라도 그녀가 영원한 삶을 얻고 죽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그녀에게 가장 값진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썼다.30)

심지어 로제타 홀이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의술은 복음전도에 영향을 받았다. 1906년에는 17년 동안 요루(尿瘻)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로제타 홀을 찾아왔다. 로제타 홀은 수술로 효과를 보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이것을 설명하자 이 여인은 수술해주지 않으면 강에 뛰어들겠다고 했다. 그러자 로제타 홀은 무엇인가 시도해보기로 했는데, 이는 그녀의 생명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또한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그녀가 편안하게 느끼며 병원에 머무는 동안 개종할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다.31) 치료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그녀의 생명과 더불어 의술을 통한 개종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복음전도 중심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복음전도의 결과에 만족하였다. 1893년 3월 28일자 일기에는 의료선교를 통해 두 가족에서 5명의 세례 청원자가 나왔음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소망을 적었다. “주님께서 겨울 동안 우리가 뿌렸던 노력을 이런 방법으로 축복하셨다는 느낌이 든다. ... 주님께서 우리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그분의 사역을 위해 쓰임 받게 해주시기를 소망한다.”32) 이러한 그녀의 복음전도에 대한 만족은 1893년 9월 19일의 일기에도 나온다.

지난 일기를 쓴 이후 연례회의가 있었다. ...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6,260명을 치료했는데, 2,125명은 새 환자였고, 3,495명은 재방문 환자였으며, 531명은 왕진 환자, 119명은 입원 환자였다고 보고 했다. 내가 이곳에서 3년 동안 치료한 환자는 14,000명이 넘는다. 이 사역의 진정한 영적 열매는 아직 작아 보이지만 이 미약한 첫 수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이것이 머지 않아 거두게 될 풍성한 수확에 대한 약속임을 믿는다. 작년 회의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회심자 다섯 명 모두 올해 입교인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모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세례 받은 예비신자들 가운데 적어도 네 명은 병원에서 들은 복음으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33)

로제타 홀은 3년 동안 14,000명의 환자를 치료했지만, 이에 대한 만족감은 글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사는 아직 작아 보이는 영적 열매에 있었다. 그녀는 작년 회심자 5명과 올해 병원을 통해 세례 받은 사람 4명을 미래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했다. 그녀의 진정한 관심과 만족은 많이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복음전도를 하는가에 있었다.

물론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사이에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은 복음전도보다 의료선교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1891년 3월 7일자 일기에 보면, 아펜젤러가 로제타 홀에게 언어 습득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로제타 홀은 역시 자신은 “몸을 치료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영혼을 치유하시는 분을 만나게 하려고 온 것”이기에 언어 습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동시에 언어 습득을 위해 병든 사람들의 도움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복음전도를 위해 언어 습득 시간을 할애하는 것과 이로 인해 의료적 도움 요청을 거부해야 하는 상황 사이에서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결론은 모든 것을 복음전도로 해석하면서 해결되었다. 병원을 통해 복음전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서 “나는 늘 말을 하기보다는 일을 하기 위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즉 다른 이들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일을 하면서 길을 여는 것 말이다!”라고 기록하였다.34) 즉, 자신이 지금 직접 전도하지는 못하지만, 병을 치료함으로 전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해석하며 언어 공부로 인해 환자 진찰을 거부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복음전도 중심적 사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로제타 홀이 이처럼 전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였다. 1891년 6월 29일자 일기에서 로제타 홀은 사람을 4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복음을 듣고 선을 행하며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사람(롬 2:7)이며, 두 번째는 듣기만 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본성으로 율법의 행위를 하며 자신의 양심이 증거가 되는 자들(롬 2:14-15)이며, 네 번째는 자연계시를 보고도 무시하는 자들(롬 1:21)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구원을 받을 것이기에 그녀는 두 번째와 네 번째 사람들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에스겔 33장 7-10절을 언급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구원을 받을까 못 받을까 헤아리는 마음을 항상 멈추지 말고, 오직 순수한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행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 것 같다.”라고 기록하였다.35) 전도 대상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전도자의 책임을 인식하였기에 그녀는 전도에 열정을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로제타 홀이 전도를 전도자의 복음 전파와 피전도자의 수용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91년 6월 29일자 일기에서 그녀는 복음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닌, 듣고 회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를 회개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전하도록 말이다.”라고 하였다.36) 그녀가 산부인과 치료를 해준 의상(wae-sang)의 한 집에서 매주 수요일에 기도모임을 열었던 것은 회개를 진정한 전도로 생각하는 로제타 홀의 사고에서 나왔던 것으로 이해된다.37) 영적 각성을 해야 회개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제타 홀의 인식은 그녀의 한국인 사역자에게도 발견된다. 로제타 홀의 진료소 전도부인인 노수잔은 1899년에서 복음전도와 회개와의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대한 형제들은 어찌하여 회개치 못하며 구세주 밝은 빛을 본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고 어서 속히 깨달아 믿는 형제 되기를 바라오.”38) 노수잔의 이러한 인식에는 로제타 홀의 영향이 있었을 수 있다.39) 단순히 그리스도를 듣는 것이 아닌, 회개를 복음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은 이후 로제타 홀의 복음전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III. 직접전도: 소책자 및 성경 배포, 순회전도여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제타 홀은 복음전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실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로제타 홀은 이해한 대로 실천하였다. 그녀가 1890년 10월에 내한한 후 한동안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없기에 한국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말을 못할지라도 로제타 홀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색했다. 그리고 나온 방법은 왕진을 갈 때 전도용 소책자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1890년 10월 27일에 로제타 홀은 아기가 울지 않는다는 집에 김점동(훗날 박에스더)을 데리고 찾아갔다. 그러나 아이는 죽어 있었고, 그녀는 단지 어린 산모를 위해 약을 지어주었다. 이때 로제타 홀은 전도는 할 수 없었지만, 전도용 한글 소책자를 준비해서 나눠줘야겠다고 다짐했다.40)

이후 로제타 홀은 왕진을 가면 꼭 소책자를 가지고 갔고, 치료 후에 나누어 주었다. 1891년 3월 7일자 일기에는 로제타 홀이 한 여승의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2번 방문하였고, 기독교 교리문답도 전해주었음이 나온다.41) 1891년 3월 12일에 로제타 홀은 서소문 밖의 가난한 농부의 집에 방문하여 잔류태반을 치료해주었고, 몇 권의 소책자를 주었다. 비록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없었지만 말이다.42)

이러한 로제타 홀의 소책자 전도는 나름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1891년 1월 21일에 로제타 홀은 로드와일러 양과 함께 위장병을 앓고 있는 선대 왕후의 질녀인 조 씨 부인을 방문하여 약을 조제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떠나면서 성경 소책자 한 권을 읽으라고 주”었다.43) 그리고 1891년 1월 24일에 조 씨 부인 집을 다시 방문했는데, 이때 조 씨 부인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 소책자를 읽고 있었다.44) 1892년 4월 12일에 경부 림프절 종대 수술을 위해 양반 가문의 할머니가 자신의 딸을 로제타 홀에게로 데리고 왔다.45) 이 수술은 잘 마쳐졌고, “할머니는 복음 이야기에 점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자신의 책으로 매일 공부하고 있다.”46) 이 당시 문서전도를 로제타 홀이 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로제타 홀의 문서전도로 인해 이 할머니가 소책자로 추정되는 책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1893년 3월 28일자에 따르면, 김 씨 여성이 로제타 홀의 병원에서 치료받았었고, 겨울 동안 로제타 홀은 루이스 양과 함께 이 여성의 집으로 왕진을 갔다. 그 과정 속에서 김 씨 여성은 교리문답서를 배우고, 한국어 찬송가도 배웠다. 로제타 홀이 사도신경을 주고 오면서 다음에 다 외우리라 기대했던 것으로 보아, 교리문답서나 찬송가도 로제타 홀이 가르쳐주었을 수 있다.47) 로제타 홀이 왕진 시 전해주었던 교리문답서, 찬송가 등의 문서가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로제타 홀이 문서전도에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1892년 10월 5일자 일기에서 로제타 홀은 병원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가마를 타고 애오개 쪽으로 가서 한 산등성이에 올라갔다. 이때 한 여인이 나와서 자신의 부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로제타 홀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기독교 서적이나 한글 복음서나 찬송가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정말 주님을 위해 작은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다음 기회를 위해 좋은 교훈이 되었다.”48) 왕진을 넘어 매 순간 전도 소책자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은 그녀의 전도 열정을 잘 보여준다.

로제타 홀은 1894년 11월 24일 그녀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망하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1897년 11월 10일 다시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돌아왔다.49) 이때부터는 로제타 홀의 전도 방식이 조금 더 발전되었다. 단순히 문서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이러한 순회전도여행에서는 가가호호 방문 전도와 집회(성경반 등) 개최를 추진했는데, 이러한 집회에서는 불신자가 참여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입교로 이어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집회는 모인 사람들의 회개의 통로의 역할도 했다.50)

1899년 2월 1일자 〈죠션 크리스도인회보〉 에 보면 그녀는 성탄절 이후에 “노씨수슨”(노수잔)과 함께 “왁매머루”라 하는 곳으로 순회전도여행을 가서 전도하였다. 이때 불신자의 가정도 방문했고, 김 참봉 부인의 집에 머물면서 찬송과 성경공부를 하였다. 30여 명이 모이던 중에 여자는 8명, 남자는 5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51) 로제타 홀은 1899년 3월 순회전도여행에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도 데리고 갔다. 삼화, 남포, 강서를 경유하며 3일이 소요된 이 전도여행에서 “총 여섯 마을을 방문했고, 450리(약 150마일)를 여행했다. 우리는 열한 가정에서 가르쳤고, 하루 두세 번 정도 여성 모임을 가졌으며 때로는 네 번 모임을 갖기도 했다.”52) 이때 방문한 남포의 경우 1909년 여름에 로제타 홀이 성경반 개최를 목적으로 다시 방문하였는데, 이곳은 홀과 노수잔이 방문한 이후 10년 동안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다.53) 또한 1899년 11월 15일에도 로제타 홀은 노수잔과 함께 “은산 모읍에 가서 전도할 새 여러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으로 가르”쳤다.54) 로제타 홀은 1907년에 셔우드 홀과 대두래(Tai-tu-rai), 놋골(Note Kole)을 다시 방문했고, 군조배(Chophai)와 노골(No Kole)도 방문했다. 대두래에서는 사역이 지난 방문 이후 퇴보한 상태였지만, 노골에서는 한 집회에 사람들이 모였고,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는 남자 27명, 여자 12명의 명단을 로제타 홀에게 주었다.55) 로제타 홀의 순회전도여행을 통해 총 39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를 표현했던 것이다.

순회전도여행은 종종 환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했고, 역시 전도의 결실이 있었다. 1905년에 로제타 홀은 요루(尿瘻) 환자 2명을 치료해주었고, 이 둘은 개종하였다. 그중 더 젊은 김 씨는 병원에 있으면서 글을 배웠고, 로제타 홀 등이 수술하기 전에 기도해주었다. 그녀는 로제타 홀과 노수잔이 40마일 떨어진 자신의 집인 영유(Yong-yu)에 방문하여 자신이 친척들과 이웃에게 복음을 가르치도록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로제타 홀은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부활절 주일에 김 씨의 집에서 보냈고, 3개의 집회를 열었고, 김 씨와 김 씨 남편 외에 6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자산(Cha-san)에서는 보배의 아버지와 보배의 형제, 삼촌과 4명의 이웃이 구도자로 등록했다. 그녀는 보수적이며 양반 계층의 지역이자 베커(Becker)의 구역인 대두내(Tai-tu-nai)에서 나이 든 할머니들을 전도하였는데, 이때 전도된 할머니들은 다시 방문하여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였다.56)

순회전도여행의 성경반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회심도 나타났다. 로제타 홀은 1907년에 베시(Bessie)와 함께 순회전도여행을 떠났다. 귀욤(Que-Yom)에서 성경반을 4일간 열어서 32명의 여성들이 참여했고, 솔모루(Sol-mo-ru)에서는 26명이 참여하였다. 보통은 40명이 참여했다. 로제타 홀은 이 집회들에서 성령께서 성경반에 역사하시는 것을 느꼈고, 우는 등의 신체적인 표현이 동반된 죄의 자백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1907년 부흥운동과 유사했다.57) 1899년 11월 10일자 로제타 홀의 일기는 로제타 홀의 순회전도여행의 모습인 전도, 집회, 회심을 잘 보여준다.

셔우드의 생일이 지나고 그다음 주에 우리는 다시 시골 여행을 떠났다. ...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운산에 도착하게 되어 기뻤다. ... 루시 외에도 어린 여자아이들 여섯 명을 매일 오게 해서 주간학교를 시작했다. 이후로 주간학교는 평균 출석률이 양호한 열 명의 학생이 모이는 학교로 성장했다. 우리는 많은 가정으로부터 심방을 와달라는 초대도 받았는데, 각 가정에서 교리 문답과 복음서를 팔았다. 여성들을 위한 저녁 모임에서는 많은 사람이 우리가 알려주는 복음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마지막 일요일에 여러 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제출했다. 그리고 주물들(fetishes)을 버리고, 술을 만들지도 않고 팔지도 않기로 서약했다.58)

1899년의 순회전도여행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회개의 결과들이다. 사람들은 주물을 버리고 술과 절연하였다. 여기서 주물(呪物)이란 무속신앙과 관련된 물건들을 의미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들이 비신앙적인 것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것은 로제타 홀의 회개와 관련된 복음 이해와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로제타 홀의 회개와 관련된 사례들은 여럿 있다.59)

또한 지난 계삭회(季朔會)부터 1900년 1월까지, 대략 3달 동안 박에스더는 102개의 가정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고, 노수잔은 27개의 가정을, 로제타 홀은 35개의 가정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들이 이 집에서 성경말씀으로 권면한 사람들은 500명이었고, 성경책은 154권을 팔았다.60) 이러한 방문이 전도를 위한 방문인지, 아니면 왕진을 갔다가 전도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로제타 홀이 전도에 열정을 가진 의료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IV. 간접전도: 전도부인 양성 및 파송, 병원을 통한 전도

로제타 홀은 한국인 전도자들을 양성하여 전도의 결실을 맺곤 하였다. 선교 초기에는 한국인들을 성경으로 훈련시켰다. 1891년 7월 19일자 일기를 보면, 로제타 홀은 주일학교에서 성경공부반을 인도했다. 내용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는 장면이었다. 황 씨 부인과 로제타 홀의 생리학 수업을 듣는 소녀들이 참여했고, 종종 외부인들이 20-30명까지 추가로 참여하기도 했다.61) 1891년 11월 29일자 일기에도 주일학교 성경공부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부 내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였고, “수잔나, 에스더, 애니, 봉선이”와 “메리(황 씨 부인)”가 참여하였다.62) 당시 로제타 홀의 생리학 수업을 듣던 에스더와 봉선, 수잔, 애니와 오와가와 황씨의 부인인 여메례는 로제타 홀이 “내 아이들(my girls)”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던 사람들이었다.63)

뿐만 아니라 로제타 홀은 병원에서 진료 전에 신앙 교육의 시간을 가졌다. 로제타 홀의 1893년 3월 28일자 일기에는 루이스(Ela A. Lewis)와 황메리가 진료 전에 대기실에서 신앙 교육을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64) 이러한 신앙 교육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녀가 본토인들에 대해 훈련을 하였기에, 1896년 3월 미국에서 한국에 문이 넓게 열렸지만, 사역자들의 부족을 말하며 “젊은 본토인을 훈련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특권인가!”라고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65)

로제타 홀이 훈련시켰던 한국인들은 선교 초기에 한국어에 서툴렀던 로제타 홀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1890년 11월 9일자 일기에 보면, 자궁근종 또는 난소의 종양으로 추정되는 환자가 찾아왔다. 이 여인은 여러 가지 상황 상 수술을 해도 생존확률은 1/50밖에 되지 않았다. 로제타 홀이 수술을 결정하기에 앞서서 강장요법으로 환자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고, 한두 권의 기독교 소책자를 나누어주었을 때, 병원의 직원들은 이 여인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로제타 홀의 전도에 힘을 실어주었다.66)

특별히 내한 초기에 전도하는 데 있어서 로제타 홀의 입이 되어주었던 여성은 바로 “사라”였다.67) 사라는 봉선의 어머니이자, 병원 수간호사로 1891년 1월 25일에 세례를 받고 “사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던 인물이다.68) 사라는 한국인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는데, 사라의 전도가 결실을 맺는 경우도 있었다. 1891년 12월 6일의 일기에 따르면, 한 여인이 자신의 딸의 건락성 림프절을 로제타 홀에게 치료받았다. 이 여인과 딸은 붕대 교체를 위해 몇 번 더 병원에 왔다. 이때 사라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책 몇 권을 팔았는데, 이로 인해 이 여인의 시아버지가 복음에 관심을 갖고 자기 아내와 며느리를 이곳에 보냈던 것이다. 이 가족은 더 깊은 믿음을 바라며 주일을 지키고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진료소 대기실에서 이 씨 부인이 인도한 모임에 이 여인과 그녀의 시어머니가 참석했다.69) 1895년 1월에 기록된 로제타 홀의 글에 보면, 그녀가 “자기가 훈련시킨 한국인 소녀에 의해”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전도부인(the Bible Woman)이 대기 중인 환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70) 이 전도부인이 사라였을 수 있다. 또한 사라 외에도 여메례가 로제타 홀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보구여관에서 전도와 함께 의료 활동을 도왔다.71)

이 외에도 로제타 홀의 한국인 전도자들의 활약은 많이 기록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황유니스(Eunice Whoang)이다. 의상에 살던 황유니스는 산부인과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이 로제타 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제타 홀이 치료해준 이후 그녀의 집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 기도모임을 열 수 있었고, 이 여성과 여성의 어머니가 구도자가 되었다. 이 수요집회를 통해 다른 여성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가족은 교회 예배와 성경반에 열심히 참석했고, 로제타 홀은 이 여인을 전도부인으로 고용하고 싶었지만, 평양에서 이 여인의 집까지의 거리와 이 여인이 집에서 좋은 사역을 하고 있어서 고용하지 못하다가, 황유니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집을 잃게 되자 1904년경에 전도부인으로 고용하였다. 이 여인은 진료소와 그녀의 집에서 사역하여 다수의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72) 황유니스의 연도별 전도 활동은 다음과 같다.

[표 1] 
황유니스의 연도별 전도 활동
1904-0573) 1905-0674) 1906-0775) 1908-0976) 1912-1377) 1913-1478)
가정 방문 990 1674 2,700 4,250 2,083 1,118
만난 여성 1,498 3,249 7,770 7,007 5,095
교회 등록 150 32 398 88
학습교인 23 200 37
세례교인 29 59 33
전도책 판매 254 643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습교인과 세례교인은 당해 연도에 전도해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 연도에 전도한 결실들이 그다음 해, 혹은 몇 년 뒤에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또한 연구자는 황유니스의 전도 결과들을 연도별로 다 정리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연도별로 정리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로제타 홀 역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녀의 사역 현황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통계화할 수 있는 자료의 부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79) 1913-1914년의 기록도 다 통계된 것은 아니며, 전도부인 장 씨(Tyang)의 전도 결과와 합산된 것이다. 연구자가 정리한 자료는 로제타 홀이 양성한 전도부인 황유니스의 활동의 일면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912-1913년 전도부인 장 씨는 병원과 진료소에서 3,995명의 기독교인들과 1,803명의 비기독교인들을 만났고, 이 중 1,158개의 기독교 가정과 295개의 비기독교 가정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1,520명의 중환자들의 집을 방문했고, 13번의 장례식과 5번의 결혼식에 참여했다. 그녀의 병원 사역을 통해 16명의 입원환자들이 믿기로 약속했다.80) 홍헬렌(Helen Hong)도 로제타 홀의 전도부인이었다. 그녀는 대기실에서 환자들을 전도하고,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했다. 425개의 가정을 방문했고, 52권의 책을 팔았다.81)

로제타 홀은 맹인학교 학생들을 통한 복음전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이들에게 복음전도 하는 법을 가르쳤다. 로제타 홀의 맹인학교 학생인 의상네(Wae Sang-nai)는 로제타 홀과 가장 오래 있었는데, 로제타 홀은 의상네가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쳤다. 20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맹인 여학생도 그녀의 부모가 개종하는 통로가 되었고, 부모는 평양의 교회에 자주 참석하였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로제타 홀은 노수잔과 황유니스를 이번 여름에 방문하게 하였다. “지금까지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의 맹인 소녀들은 그들의 가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라는 언급은 로제타 홀의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통한 전도 계획과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82)

로제타 홀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환자들 중에서도 종종 병원 전도자들을 따라서 전도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었다. 1890년 12월 22일자 일기에는 로제타 홀이 한 소녀의 손 피부 이식을 위해 자신의 피부를 떼어낸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로제타 홀에게 이러한 식피술을 받은 소녀는 “누가복음을 두 번이나 읽었다. 하루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우리 병원 여직원을 대신해서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83)

또한 틈틈이 사경회의 강사로 서기도 했다. 매티 노블(Mattie W. Noble)에 따르면, 1904년 봄에 평양 여성 사경회가 열렸을 때, 로제타 홀은 2일 동안 가르쳤다. 1904년 가을과 1905년 봄에도 로제타 홀은 평양 여성 사경회 강사였다. 봄, 가을 열리는 정기적인 사경회는 평양 주변(100마일 반경)의 여성 교인들을 성경적 지식으로 훈련시켜 전도부인으로 양성하는 장이었다. 1904년 봄 사경회의 과목은 “히브리서 연구,” “교회사,” “바울 여행의 지리,” “몇 권의 구약성경의 특징들,” “위생”이었다.84) 이때 로제타 홀이 가르친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로제타 홀이 봄 사경회에서 가르친 것은 병실을 위한 실용적인 도움(Practical Helps for the Sick Room)이었다.85) 의사인 박에스더가 1905년 가을 사경회에서 가르친 과목이 누가복음과 위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제타 홀이 사경회에서 한 것들은 복음전도라기보다는 위생 교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86) 어쨌든, 로제타 홀은 선교부 차원의 전도부인 양성 과정에 일조했던 셈이다.

로제타 홀의 병원도 전도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로제타 홀이 전도 문서를 준 것과 그녀의 전도자들이 전도하는 것은 병원에서도 이루어졌다. 병원은 전도의 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에 로제타 홀이 평양에서 개원한 여성 진료소의 “의료 사역을 통해 많은 여성들은 일요일 예배에 오라고 권면을 받았고, 어느 정도는 구원의 추종자들이 되었고, 지금은 교회의 어머니들이다.”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었다.87) 실제로 1891년 1월 25일에 세례를 받은 6명의 여성들 중 5명은 로제타 홀의 병원 사람들이었다.88) 1906년에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올해의 우리 입원환자의 거의 전부는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 개종하였다.”89) 이러한 로제타 홀의 의료선교의 결과들을 연도별로 정리해보았다.

[표 2] 
연도별 평양 여성 의료선교 결과
1892-9390) 1903-0491) 1904-0592) 1905-0693)
진료 수 6,260 4,857 4,260
불신자의 교회 참석 181 600 988
입교 수 5 10 57 55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연도별 의료선교 결과를 다 정리할 수는 없었다. 불신자의 교회 참석 수와 입교 수가 명확히 나온 자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이 자료로도 로제타 홀의 병원을 통한 전도의 밑그림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진료 받은 만큼 많은 수의 불신자들이 개신교로 귀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환자들은 병원 전도를 통해 교회에 참석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비율은 더 높아졌다. 병원이 불신자들의 개신교 접촉의 장으로서 충분히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적은 표본으로 이 이상 분석하는 것은 성급할 수 있기에, 로제타 홀의 의료선교 결과를 미약하게 정리한 것에 만족해야겠다.


V. 나가는 말

본 연구는 내한 의료선교사의 전도 활동을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로제타 홀의 전도 이해를 다루었다. 로제타 홀은 의술은 전도의 도구라는 관점 속에서 전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의술을 통해 영혼구원을 바랐고, 의술을 통해 전도하려고 하였고, 그러한 결과가 나올 때 만족하였다. 드물게 그녀의 복음전도와 의료선교에 대한 고민이 발견되었지만, 여기서도 복음전도 중심적인 사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전도 이해를 뒷받침해주었던 것은 바로 복음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였음도 확인하였다. 그녀가 이해한 전도란 단순한 메시지 전달이 아닌, 회개임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로제타 홀의 전도 이해는 실천에도 영향을 주었다. 연구자는 그가 직접 소책자나 복음 제시를 하는 등 직접적인 전도 활동을 한 것을 직접전도로 분류하였다. 그 외에 한국인 전도자를 통한 전도나 병원을 통한 전도는 간접전도로 분류하였다. 직접전도를 먼저 살펴보자면, 그녀는 1894년 11월 24일 그녀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전도 소책자를 나눠주는 등 문서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1897년 11월 10일 다시 내한한 후에는 순회전도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집회(성경반 등)를 열면서 전도하였다. 이러한 집회를 통해 불신자가 개신교로 개종하며, 회심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왕진, 혹은 방문을 통해서 전도했다. 사경회의 강사로 활동한 기록도 언급했지만, 전도와는 크게 연관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에서는 로제타 홀의 간접전도도 정리하였다. 그녀는 한국인 전도자들을 훈련시켜서 전도부인의 임무를 맡겨 전도시켰다. 초기에 그녀를 도와서 활동한 사람은 사라였고, 대표적인 전도부인으로는 황유니스가 있었다. 이외에 전도부인 장 씨, 홍헬렌의 활약도 살펴보았다. 시각장애인 학생들과 환자들을 통한 전도도 언급하였고, 병원을 통한 전도의 결과들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의료선교사의 전도라는 자주 연구되지 않은 영역에 접근하였다. 본 연구는 그동안 복음전도자의 전도에만 치중되어 있던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의료선교사들의 전도가 인물별로 계속 연구된다면, 의료선교사들을 통한 복음전도의 모자이크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1915년, 1925년에 로제타 홀의 전도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이를 더욱더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전도의 이해의 변화는 활동의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로제타 홀의 전도 이해의 변화와 그에 따른 활동의 변화는 새로운 주제로 접근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여기서는 따로 연구하지 않았다.

복음의 황무지와 같던 이 땅에 와서 복음의 씨를 뿌려준 복음의 개척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복음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의 노력의 땀방울을 드러내어 독자로 하여금 개척자들의 삶을 본받게 하는 데 본 연구가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라며 소고를 마치고자 한다.


Notes
6) 차신정,『한국 개신교 초기 그리스도를 나눈 의료선교사』(경기도: 캄인, 2013), 233-40. 그 외에 선교사들에 대한 소개에서도 의료선교사와 복음전도가 일부 나온다. 51, 54: 헤론의 전도(John W. Heron)에 대한 언급, 57: 릴리어스 호튼(Lillias S, Horton)의 명성왕후 전도 언급, 60-61: 빈튼(Cadwallader C. Vinton)의 전도에 대한 언급, 70-71: 에비슨(Oliver R. Avison)의 전도, 75-76: 존슨(Woodridge O. Johnson)의 전도, 86: 아취발드 플레쳐(Archibald G. Fletcher) 등. 118: 여기서 로제타 홀의 경우 “로제타는 병원과 어린이 병동까지 에스더에게 맡기고 요리사와 수잔을 데리고 순회선교를 떠나기도 했다.”라고 그녀의 전도를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11) “홀 의사의 기념회(속),” 〈긔독신보〉 1915년 12월 15일자, 3면. “우리가 마땅히 생각할 것은 성경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 주의 일이 아니요 병을 고치는 것도 주의 일인 줄로 알아야 할지로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도 필요치 아니한 것이 없으니 전도하는 것은 복음의 말이요 병을 고치는 것은 복음의 일이 옵니다.” 박정희,『닥터 로제타 홀』(경기도: 다산북스, 2015), 422-23. 또한 1915년경으로 추정되는 때에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강 간호원의 이야기』(The Story of Nurse Kang)라는 소책자를 냈는데, 여기서 그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복된 과업을 교육, 의료, 전도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영역은 변이 서로 맞물려서 강력한 삼각형을 형성한다. 우리는 더 많은 교사, 의사, 전도부인과 간호원을 양성하기 위해 더 많은 장학금이 필요하기에 미국의 자매들에게 간절히 도움을 호소한다.”라고 썼다. 이를 볼 때, 1915년 어간에는 로제타 홀이 단순히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뿐 아니라 육체의 치료와 교육을 통한 계몽 등 사회 전반적인 구원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12) Rosetta Hall, “Medical for Women in Seoul,” The Korea Mission Field (September 1926): 194. “행해져야 하는 전도 사역은 한 명의 전도부인에게 너무 무겁다.”라고 말하며 “지난 2년 내에 2명이 항상 고용되었고, 우리는 다시 2명을 가지기를 바라며 3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가까운 미래에 사회복음전도 사역자(a social evangelistic worker)를 필요로 한다.”라고 하였다.
16) John. D. Bigger, “The Mission Hospital and Evangelism,” The Korea Mission Field (April 1928): 74. 이 글에는 의술이 복음전도의 전위대 역할을 했다는 것과 의사 자체가 복음적이라는 내용이 있다. 아마도 저자는 당시의 의료선교사들의 양분된 의견을 종합하려고 했던 것 같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의술은 복음전도의 도구라는 견해와 의술이 즉 복음이라는 견해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Louisa C. Rothweiler, “Our Work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October 1909): 167-68.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겠지만,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다수의 선교관은 의술을 통한 전도였을 수 있다.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는 초기 한국교회가 정동여성병원(Chong Dong Woman’s Hospital)에서 복음전도에 조심했지만, 복음전도가 가능해졌을 때는 기독교 소책자와 책을 팔거나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면하는 등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진료소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은 많이 있었다. 이 표현에는 병원의 존재 목적이 전도였음이 내포되어 있다. Bigger, “The Mission Hospital and Evangelism,” 74. “선교 사역의 초기에 병원이 한국 복음전도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을 보아도 초기에 선교 병원은 복음전도의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17) 차신정,『한국 개신교 초기 그리스도를 나눈 의료선교사』, 239-40. 해리 로즈,『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최재건 역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268. 당시 선교사들의 의술과 전도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해리 로즈(Harry A. Rhodes)의 글들을 보면, 적어도 당시 의료선교는 결국 복음전도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다. “1916년에 샤록스(Sharrocks) 박사가 지적하였듯이 복음전도를 동반하는 치료는 의료사역의 모든 목정 중에서 으뜸 되는 것이다.” Ibid., 419: 세브란스 병원의 “모든 과들이 의료사역의 와중에서 복음전도를 중시해왔다.” Ibid., 266: 1924년에 북장로교 선교부는 “의료선교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복음의 씨가 심어지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하여 모든 선교기지들의 개설과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해왔다.” Ibid., 265: “의료사역은 이 나라가 복음을 향해 문을 열게 만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사람들이 복음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고 있다.”
18) Rosetta S. Hall, “My Call to the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November 1927): 229. 또한 대학생활 당시 토번(Thoburn) 의료 선교사의 의료사역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에게 선교에 대한 감동을 주었다. 박정희,『닥터 로제타 홀』, 68-69. 엘리자 애그뉴를 통해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다는 것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5-106: 케너드 챈들러와 관련하여 선교의 소명을 확인한 것은 여기를 확인하라. 116: 토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확인하라.
20) Ibid., 48-50.
21) Ibid., 95-96.
28) Ibid., 13.
29) Ibid., 209-10.
33) Ibid., 141-42.
36) Ibid., 26.
37) “The Herald and Converted Patient as a Preacher,” The Korea Mission Field (October 1916): 264. (전체 262-65.) 여기서 의상이란 지역은 평양에서 거리가 있던 곳인데, 정확한 위치와 한글 지명은 알 수 없다.
39) 로제타 홀,『로제타 홀 일기』3, 131. 1891년 11월 29일자 일기에 보면, 로제타 홀이 인도하는 주일학교 성경공부 모임에 “수잔나, 에스더, 애니, 봉선이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노수잔은 초기부터 로제타 홀에게 성경과 기독교를 배웠고, 로제타 홀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0) 로제타 홀,『로제타 홀 일기』2, 129-30. “다음에는 전도용 한글 소책자를 싸가지고 다녀야겠다. 지금은 너무 늦었지만, 점동을 통해 그들에게 아기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뜻이 있어 다시 데려가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말해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배웠으니 다시는 잊지 말아야겠다. 예지력이 부족했던 나 자신을 질책하며 비록 지금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꼭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41) Ibid., 197.
42) Ibid., 200-201.
43) Ibid., 172-75.
44) Ibid., 177. “헤론 부인이 오늘 아침 이 댁을 방문했는데, 그녀는 그들이 내가 어제 준 한국어 성경 소책자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질문도 했다고 말했다. 헤론 부인이 누가복음서를 그들에게 주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로드와일러 양이 그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었다.”
46) Ibid., 37.
47) Ibid., 109.
48) Ibid., 70-73.
50) 최성훈, “복음전도의 역사와 패러다임의 변화,”『영산신학저널』46 (2018. 12): 302-303. 최성훈은 한국교회의 전도방법으로 대중전도, 축호전도, 소그룹전도를 들었다. 이러한 대중전도와 축호전도는 로제타 홀도 사용하던 방법으로 로제타 홀의 전도방법은 큰 틀에서 한국교회의 전통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59) 로제타 홀,『로제타 홀 일기』3, 149-50. 1891년 12월 6일자 일기로, 로제타 홀의 전도부인인 사라의 전도 책자를 읽고 복음에 관심을 가진 한 가족이 주일을 지키며 담배를 끊은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로제타 홀,『로제타 홀 일기』4, 14. 1892년 3월 8일자 일기에 보면, 담배를 끊은 이 가족은 신주(위패)를 제거했다. Hall, “Medical-Evangelistic Work for Women, Pyeng Yang,” 47. 자산(Cha-san)에서 온 한 여성은 과거에 자신의 딸을 로제타 홀의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고 자신의 딸이 아닌 척하며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이 여성은 하디 선교사(Robert A. Hardy)의 아침 기도 시간에 죄를 자각하며 회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다시 병원에 보내면서 이번에는 돈도 보냈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이 로제타 홀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회개에 대한 강조점을 이해할 수 있다.
62) Ibid., 131.
67) Ibid., 194. 1891년 3월 7일자 일기.
68) Ibid., 179.
72) “The Herald and Converted Patient as a Preacher,” 264; Hall, “Medical-Evangelistic Work for Women and Children, Pyeng Yang,” 54; Hall, “Medical-Evangelistic Work for Women, Pyeng Yang,” 49-50. 여기에 보면 올해의 전도부인으로 로제타 홀이 황유니스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같은 문단에 그 해의 방문과 책 판매 기록이 나온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연례회의의 기록은 작년 5월부터 그해 4월까지 12개월의 기록이다. 1905년에 보고한 이 내용은 1904년부터 황유니스를 전도부인으로 고용했을 것임을 추정하게 한다. 박정희,『닥터 로제타 홀』, 445. 황유니스의 본명이 황유례임이 여기서 나온다.
81) Rosetta Sherwood Hall, “Woman’s Medical Work, Pyeng Yang,” Sixth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4), 49; Hall and Cutler, “Koang Hyoe Nyo Won(woman’s Hospital of Extended Grace) and Woman’s Medical Class,” 42. 헬렌의 성이 홍인 것은 이 자료를 참고할 것. Hall, “Medical for Women in Seoul,” 193-94. 1920년대의 전도부인의 기록도 참고할 것. 전도부인 메이 벨(May Bell)은 1925년에 10,000명(신자, 불신자 포함) 이상의 환자와 친구들에게 접촉하여 연락을 유지했고, 744명의 산모와 486명의 환자의 가정(신자, 불신자 포함)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이중에 비기독교인들 59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고, 교회에 참석하고 있다.
84) Mattie Wilcox Noble, “Pyeng Yang church and Bible Institute,” Sixth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4), 44; Hall, “Medical-Evangelistic Work for Women, Pyeng Yang,” 50. 여기서 로제타 홀이 가을과 봄 사경회의 교사임이 나온다. Rosetta S. Hall and Mary M. Cutler, “Koang Hyoe Nyo Won,” Fifteenth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3), 98. 연례회의에서 보고되는 것은 보고하는 해의 이전 연도의 5월부터 4월까지(12개월)의 일들이다. 그러므로 1905년에 로제타 홀이 가을과 봄의 사경회 교사라고 하는 것은 1904년 가을과 1905년 봄 사경회 교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정희,『닥터 로제타 홀』, 416.
86) Ibid., 61.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주최 2019년 “닥터 홀 가족 자료 수집 연구 보고”(2019년 9월 16일)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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