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No. 0, pp.125-153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9
Received 09 Oct 2019 Revised 13 Nov 2019 Accepted 15 Nov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12.50.125

동질집단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
최동규
서울신학대학교 부교수, 목회와 교회성장 (dongkyuc@hanmail.net)

Correct Understanding and Application for the Homogeneous Unit Principle
Dongkyu Choi
Ph.D. Associate Professor, Ministry and Church Growth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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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동질집단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이 목회적 현실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색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을 비롯한 초기 교회성장학자들이 주창한 동질집단의 원리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비판한 학자들의 논점과 문제점을 살펴본 뒤에 그것의 신학적, 실천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동질집단의 원리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 그들의 사회문화적 장벽을 넘지 않도록 동질집단형 교회를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부류의 하나 됨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동질집단의 원리가 차별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원리는 본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적 개념이다. 또한 이 원리는 불신자들이 예수에게로 나올 때 적용되어야 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어야 할 이질집단의 원리와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교회 차원에서는 동질집단형 교회를 지향해야 하지만 교단과 같이 좀 더 넓은 차원에서는 혼합형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properly understand the homogeneous unit principle and to explore where it can function in pastoral ministry. To this end, I first examine what exactly was the principle advocated by Donald A. McGavran and other early church growth scholars, as well as the arguments of critical scholars; I then endeavor to reveal its theological and practical meaning. The homogeneous unit principle implies the formation of a homogeneous unit church by unbelievers, wherein they do not have to cross their sociocultural barriers when they want to follow Jesus Christ. Critics argue that the principle encourages discrimination, based on the fact that the Bible teaches the unity of diverse groups in Christ. But this principle is inherently not an absolute concept applicable to every situation, but rather an instrumental concept used for God’s mission. Furthermore this principle should be applied when unbelievers come to Jesus, and used in conjunction with the heterogeneous unit principle required of mature Christians. While local churches should seek to be homogeneous unit churches, the church at a broader level, such as a denomination, should make an effort to be conglomerate congregations.


Keywords: Homogeneous Unit Principle, Heterogeneous Unit Principle, Homogeneous Unit Church, Conglomerate Congregation, Church Growth, Donald A. McGavran
키워드: 동질집단의 원리, 이질집단의 원리, 동질집단형 교회, 혼합형 교회, 교회성장, 도널드 맥가브란

I. 들어가는 말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국제복음화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가 열렸다. 당시 풀러신학교의 교수였던 랄프 윈터(Ralph D. Winter)가 이 대회에서 동질집단의 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에 관한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그러자 다음날 인종 문제에 민감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신문은 “풀러신학교가 인종차별정책에 서명했다.”고 주장하였다.1) 이 사건은 그 당시에 동질집단의 원리가 얼마나 논쟁적인 이슈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후 이 원리를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교회성장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확산과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는 원리라고 주장한 반면,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이 원리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이 원리가 적용되는 곳마다 파벌과 차별을 불러온다고 비판하였다.

목회 현장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교회성장학의 초기 이론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혔다. 과거의 이론들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신학적 관심들이 생겨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초기 교회성장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교회성장 이론들을 외면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성장 개념을 단순히 개교회의 이기적인 양적 성장에 한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불순한 성공 철학과 결합시킨 목회자들의 행태는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더 크게 부각시켰다. 연구자는 초기 교회성장 이론들에 논쟁적인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초기 교회성장 이론 중에는 여전히 유익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동질집단의 원리다.

연구자는 동질집단의 원리에 쏟아진 비판들이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 쏠려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자들은 그것이 가진 실천적 효율성을 고려하기 전에 신학적 이상(理想)의 잣대로 성급하게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긍정적인 입장이든지 부정적인 입장이든지 간에 많은 사람이 교회성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 원리에 관해 제대로 비판하거나 해명한 논문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는 본 논문을 통해서 동질집단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이 목회적 현실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을 비롯한 초기 교회성장학자들이 주창한 동질집단의 원리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비판한 학자들의 논점과 문제점을 살펴본 뒤에 그것의 신학적, 실천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서 초기 교회성장학자들이라 함은 맥가브란을 비롯하여 동시대에 함께 논의에 참여했던 교회성장학파 학자들을 가리킨다.


II. 초기 교회성장학자들의 주장
1. 기본 개념 이해

동질집단(a homogeneous unit)이란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로서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일정한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맥가브란은 그가 선교사로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부족 중심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했던 경험을 통해서 동질집단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 원리를 처음으로 주창한 맥가브란 자신은 그의 저서『교회성장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에서 이 용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동질집단은 모든 구성원이 공통으로 어떤 특성을 띠는 사회의 한 무리를 가리킨다.”2) 한마디로, 일정한 동질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켜서 동질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매우 다양한 영역과 수준 안에 수많은 집단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매우 복잡한 구조체이기 때문에 각 집단을 어느 영역과 수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질집단이 될 수도 있고 이질집단(a heterogeneous unit)−특성이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질집단이라는 용어는 매우 신축적이다.”3) 그것은 사회의 다층적, 복합적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동질집단을 판단하는 근거는 혈연이며, 혈연에 기초한 동질집단은 대표적으로 가족, 친척, 민족이다. 그러나 동질집단을 판단하는 근거에는 혈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직업, 심지어 생활양식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될 수 있다.4) 또한 사람들은 사회의 다양한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질성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수준에서 어느 한 사회집단을 동질집단으로 간주했다고 하더라도 그 집단을 여러 개의 하위집단(subunits)으로 구분하면 그 하위집단들 사이에 이질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국가 차원에서 보면 한국인 전체를 동질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하위 범주인 지역 차원에서 보면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 등 이질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집단으로 구분된다.

분명한 것은 동질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이 적어도 어떤 한 가지 관점에서 강한 유대감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의 한 부정기 문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용어는 매우 폭넓고 신축적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공동의 유대감은 지리적, 인종적, 언어적, 사회적, 교육적, 직업적, 경제적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 결합된 것일 수도 있다. 집단 구성원들이 그것에 대해서 선뜻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특성으로 인해 서로 편안하게 느끼며 서로에 대해 ‘그들’이 아닌 ‘우리’로 인식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 이상의 동질집단에 소속된다는 점에 동의한다.5)

그런데 맥가브란의 동질집단의 원리를 옹호하고 지원한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맥가브란의 이 원리가 종족 운동(people movement)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비서구 사회에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6) 종족 운동이 같은 사회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의 회심 운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동질집단의 원리를 종족 운동과 연결시킨 와그너의 설명 방식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동질집단의 원리가 종족 운동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이 원리의 의미와 중요성을 무시한 처사로 보인다.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원리야말로 맥가브란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교회성장 이론에 기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게 좋을 듯싶다. 또한 동질집단의 원리가 비서구 사회에서 작동하는 원리라고 말한 와그너의 평가에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종족 운동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원리의 근거와 정당성

맥가브란이 이 동질집단의 원리를 주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사회적 근거가 작용한다. 일차적인 근거는 모자이크처럼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사회적 특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제적인 인구 구성은 마치 모자이크와 같이 다양하다.”7) 두 번째 근거는 복음 전달의 사회적 특성에 있다. 복음 전달에 관한 그의 사회학적 통찰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로 집약된다. “사람들은 인종, 언어, 계급의 벽을 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한다.”8)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벽을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은 “십자가의 걸림돌”뿐이다(갈 5:11).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맥가브란은 그것을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하였고, 그 걸림돌은 “세 가지 필수적인 행위” 곧 “회개, 세례, 등록”을 포함한다.9) 앞에서 언급한 맥가브란의 명제는 이런 행위 외에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종, 언어, 계급의 벽을 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와그너는 자신의 책 Our Kind of People (『우리와 같은 사람들』) 제5장에서 신약성경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원리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갈릴리 출신인 예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헬라인 등을 그의 제자로 부르지 않았으며, 대부분 갈릴리 출신자들을 제자로 불렀다. 그의 제자들 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은 아람어 방언을 하는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였지만 그를 대신하여 선출된 맛디아는 갈릴리 사람이었다.10)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어느 정도 동질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또한 와그너는 민족집단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도 동질집단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초기 기독교 교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동질집단의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먼저는 유대인 가운데서, 그다음에는 사마리아인 가운데서, 그다음에는 헬라인 또는 이방인 가운데서 설립되고 발전되었다.”11) 예수가 자신의 공생애 동안에 유대인을 향한 선교에 집중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된다. 예수는 12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지시할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말하였다. 맥가브란은 그의 저서 The Bridges of God (『하나님의 다리들』)에서 1세기의 초기 기독교 운동이 “한 종족의 교회”(a one-people Church) 곧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다고 말한다.12) 그 이후 복음이 유대인의 영역을 넘어 이방인의 세계로 퍼져나갈 때에도 가족, 친척, 민족 등 다양한 동질집단이 ‘하나님의 다리’로 활용되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맥가브란의 명제는 모든 인간이 동질집단 안에서 좀 더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낀다는 현실적인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이 점에서 와그너는 사람들이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동질집단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13) 인간은 근본적으로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에 마음이 가게 마련이다. “불신자들이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서 복음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14) 동질집단의 원리는 이런 인간의 심리적 본성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각 교회에서 구역, 속회, 목장 등으로 불리는 소그룹을 구성할 때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끼리 묶지 않는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여러 민족집단들은 왜 저마다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는가?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끼리 예배하고 교제할 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회심 과정에서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경로를 조사해 보면 대부분 자신과 가까운 사회적 관계망에 속한 사람에게서 전도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써도 알 수 있다. 한 예로 맥가브란은 자신의 책에서 라일 샬러(Lyle E. Schaller)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의 60-90%가 “친구나 친척의 인도로 교회에 나왔다.”15) 이런 경향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998년, 2004년, 2017년에 조사한 결과를 비교 분석한 어느 한 자료에 의하면 교회로 인도한 사람이 3년 모두 친구/선배-부모-이웃 순으로 나타났다.16) 이런 자료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동질집단에 속한 사람 곧 자신과 사회문화적 조건이 비슷한 동질집단에 속한 사람에게서 복음을 들을 때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맥가브란이 이렇게 동질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에게 불신자들의 회심에 신학적 요인보다도 사회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복음 전도와 신앙 성장에 작용하는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맥가브란 교회성장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동질집단의 원리에 담긴 사회문화적 동질성을 회심의 중요한 매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회심에 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신학적인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요인이다. 엄청난 수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은 오직 그들이 가족들과 관계를 끊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발견할 때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들과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배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분명한 것은 높은 종족의식을 가진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각 개인이 공동체 구성원들과 관계를 끊지 않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나님께서 교회성장의 복을 주신다는 사실이다.17)

그러나 여기에서 맥가브란이 “높은 종족의식을 가진 사회”를 특정하고 그런 사회에서의 복음 전도는 그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다소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가 인용문에서 사용한 ‘종족의식’(people-consciousness)이란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일정하게 형성된 동질집단 의식에 가깝다. 따라서 ‘종족의식’이란 특정한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복음 전도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동질성을 깊이 고려해야 하는 것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사회에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III. 동질집단의 원리에 대한 비판과 응답
1. 비판적 의견

동질집단의 원리에 대한 비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 원리가 다른 부류 또는 다른 집단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질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하지만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편하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배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일차적으로 동질집단의 원리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데럴 구더(Darrell Guder)의 비판을 직접 들어보자.

전도와 교회성장 분야에서 사용되는 동질집단의 원리는 지극히 당연한 심리학적, 사회적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우리가 속한 교회의 신자들이 어느 정도 우리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확대되면 기독교 증언과 교회의 형성이 문화적으로 배타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지금까지 기독교 증언은 자주 인종주의, 계급주의, 자민족 중심주의에 의해 오염되었다. 개인적 경험의 차원이나 집단적 문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심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꽤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증언과 완전히 모순된다.1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허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는 모든 사회적 제한을 초월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종 사이를 평등하게 만들고 두 집단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한다(갈 3:28).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에 따르면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트리톤 게노스’(triton genos)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기존의 두 종족을 뛰어넘는 ‘제3의 종족’으로 부름으로써 이 정신을 표현하였다.”19) 바울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한 몸’(one body)의 은유 역시 각 지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 됨을 강하게 암시한다(롬 12:5; 고전 12:12-13; 엡 2:16; 골 3:15).

따라서 비판자들은 동질집단의 원리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문화적 편의성을 이유로 인종 간의 구분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관점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보쉬는 신약성경에서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는 “신학의 문제이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동질집단의 원리를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20)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문화적 장벽을 허무는 것을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은 누구든지 공동체 안에 형성된 장벽을 넘어가야 한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골 3:11). 지도자 집단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지도자들이 서로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이런 차별 없는 교회의 좋은 성경적 모델이 될 수 있다(행 13:1).

이렇게 볼 때, 회심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불편함을 이유로 동질집단형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태도는 비판자들에게 용납되기 어렵다. 제3세계 복음주의를 대변하는 르네 빠딜라(Rene Padilla)는 문화적 장벽을 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질집단의 원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직설적인 어조로 신약성경 어디에도 교회가 동질 단위로 설립되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교회는 성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장벽들을 초월하여 성장했다. 동질집단이라는 용어가 단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 때,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이 하나의 동질집단을 모아 지역 교회를 세운 예는 전혀 없다. 반대로 신약성경은 새사람 안에서 장벽들이 어떻게 폐지되었는가에 관한 많은 예들을 제공한다.21)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 자신의 문화적 영역 안에 안주하는 태도를 버리고, 불편하더라도 문화적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맥가브란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이미 자신의 유익을 희생할 각오를 하는 것이므로 희생이 없는 동질집단의 원리는 자칫 ‘값싼 은혜’(cheap grace)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비 콘(Harvie M. Conn)은 좀 더 나아가 “악마적 동질성”(demonic homogeneity)이라는 강한 비판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동질집단의 원리 이면에 숨어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콘에 따르면 “전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가시적인 새 인류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부름을 뜻한다.” 하지만 새 인류의 하나 됨을 파괴하는 “인종주의, 부족주의, 억압적 부(富)”와 같은 것들이 인간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생겨나는 “악마적인 요소들”이다.22) 일정한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동질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의 의도와 거리가 멀며,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위험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2. 비판에 대한 응답

그렇다면 동질집단의 원리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과 맥가브란의 주장 사이에는 어떤 괴리가 있는가? 연구자는 이 둘의 입장이 절대로 서로 연결될 수 없는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 얼마든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으로 비판적 이슈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성경적 근거에 대하여

맥가브란이나 와그너가 동질집단의 이론에 대해서 다양한 성경적인 사례와 설명을 제시하지만 많은 경우 가정(假定)과 추론에 의존하는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논증이 약점을 가지고 있는 만큼 초대 교회가 동질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초대 교회가 다양한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된 이질집단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 역시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설득력의 핵심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들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있다. 연구자는 대체로 초대 교회를 각 지역에 존재하였던 다양한 가정 교회 관점에서 보는 와그너의 이해 방식을 지지한다. 그는 ‘안디옥 교회’, ‘고린도 교회’와 같이 각 도시의 이름이 붙은 지역 교회들이 그 도시 내에 존재한 다양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강조한다.23) 1세기 가정 교회들이 혈연과 가내 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확대된 가족공동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교회들이 일정한 동질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동질집단형 교회들(the homogeneous unit church)이 좀 더 넓은 도시 차원에서 모일 때에는 당연히 서로 이질적인 여러 집단이 모인 혼합형 교회(the conglomerate congregation)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보쉬의 견해와 같이, 이방인의 할례를 단지 신학적인 문제로만 보는 태도는 옳지 않아 보인다. 물론 바울서신을 통해서 그가 그 문제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신학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신학적인 차원만의 문제라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퍼지기 전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할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와그너가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의 의도는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고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각 문화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온전하게 유지되어야 했다.”24) 따라서 아마도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후에도 여전히 할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예수 운동은 처음부터 유대교적인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맥가브란과 그의 동료들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동질집단의 원리의 필요성을 이해하였으며, 신약성경 역시 이런 시각으로 해석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동질집단 안에서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심지어 동질집단의 원리에 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빠딜라조차도 “교회의 성장은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게 되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 문화와 다른 문화 사이에 놓여 있는 장애요소들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는 사실은 더는 증명이 필요 없다.”고 말함으로써 원리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학적 현실에 대해서 인정한다.25) 그런데 이런 성향은 현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1세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일정하게 동질집단의 원리를 따라서 복음이 흘러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2)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종종 맥가브란과 그의 동료들에게 쏟아진 가장 큰 비판은 동질집단의 원리가 인종차별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맥가브란이 동질집단의 원리를 제시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언어와 계급 등 문화적인 불편함 때문에 주류 집단과 분리된,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하는 사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한인 교회들을 형성하고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브라질에서 온 이민자들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회중을 형성하고, 멕시코 이민자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회중을 형성한다. 한국에 온 베트남 노동자들도 자기들끼리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예들을 통해서 맥가브란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사람들이 굳이 문화적 장벽을 넘어 불편한 상황에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동질집단형 교회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원리가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자칫 백인과 흑인의 분리정책을 옹호하고 강화하는 것처럼 비쳐진 것이다. 그러나 맥가브란의 의도가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동질집단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인종분리 또는 인종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내가 깊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미국의 그 어떤 교회라도 흑인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26) 따라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은 동질집단의 원리의 진정한 의도와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맥가브란이 동질집단을 강조한 것은 불신자들이 주께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서지 어떤 특정한 부류 또는 집단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동질집단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필요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어떤 부정적인 의도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동질집단을 활용하는 과정에 윤리적인 패악이 있어서도 안 된다.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기 위해 가난한 자들과 구분된 모임을 만드는 것과 같이 의도적으로 갈라 다른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는 윤리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특성이 다른 각 동질집단들은 더 큰 영역 안에서 일치하고 단합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사회적 행동보다 복음전도를 더 중시하는 맥가브란의 생각이 이런 인종차별적 상황을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동질집단의 원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종차별과 같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회적 행동도 “당연히 교회가 해야 할 활동”이지만 그것보다도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이 더 중요하며 일차적인 과제라고 주장했던 맥가브란의 생각이 녹아 있다.27) 그가 보기에 “기독교 형제애”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구원받고 신앙이 성장했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먼저는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 중요하며, 이 일을 위해 동질집단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3. 동질집단의 원리를 이해하는 지혜
1) 하나 됨을 향한 과정과 수단으로서의 원리

단적으로 말해서 맥가브란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을 부정한 적이 없다. 다만 그는 갓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하나 됨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지 구원의 전제조건이 아니다.”28) 맥가브란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때 가급적 그들의 관점에서 보려고 애썼다. 그 결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므로 신앙에 따르는 윤리적인 실천사항들은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진 뒤에 요구해도 늦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지하게 전도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맥가브란의 이 결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르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이렇게 반문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술과 담배를 끊기 어려운데 그래도 교회에 나갈 수 있나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신앙은 자발적일 때 큰 힘을 발휘한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유대인과 헬라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엡 2:14-18). 그러나 신앙인인데도 아직 성숙하지 않아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하다면 억지로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맥가브란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마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이 형제애를 지향하도록 강권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많은 사회적 행동을 할지라도 그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29) 게다가 그가 아직 신앙인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인 요구는 나중 문제다. 차후에 신앙이 성숙해지면 그런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질집단의 원리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과정에 꼭 필요한 도구적 개념이다.

동질집단의 원리의 의미와 가치가 여기에 있다. 이 원리는 결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이상적인 목표는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질집단의 원리는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 가운데 꼭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혼합형 교회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 모습이 이상적인 목표이며, 동질집단형 교회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빠딜라의 다음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는 때로 같은 지역 내에서 언어와 문화를 기초로 서로 다른 교회들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선교를 위한 임시방편들이어야 한다.”30) 맥가브란 역시 진정한 선교를 위해서는 당연히 동질집단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가교 성장 또는 타문화 전도(cross-cultural evangelism)는 오래된 교회이든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교회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단지 동질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전도하는 동질집단형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족(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는 일을 해야 한다.31)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동질집단의 원리가 자기가 속한 집단 구성원들을 “구원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교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따라서 “교회는 이 원리를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2) 와그너는 이와 같은 맥가브란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정리한다. “[동질집단의 원리에 대한] 맥가브란의 진술은 규범적이지 않고 기술적(記述的)이다. 그의 진술은 신학적이지 않고 현상학적이다.”33) 성경이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신자들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과제다.

그런데 맥가브란이 이 원리를 주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두 가지 전제는 (1) “맥가브란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과34) (2) 종족 운동과 같이 주로 어느 사회의 한 부족이나 계급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현상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신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불신자 집단이 동질성이 강하고 다른 집단과 섞이는 것을 매우 꺼린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 돕는 방법이겠는가? 맥가브란에 따르면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어떻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가?’의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35)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을 돕고자 한다면 반대로 곧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가?’라는 문화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동질집단의 원리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선교를 뜻하는 교회성장에 유익한 도구일 뿐이다. 맥가브란 자신도 “분명히 말하지만, 동질집단의 원리는 결코 교회성장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말하며,36) 심지어 “만일 어떤 경우에 이 동질집단의 원리를 무시하는 회중이 이 원리를 준수하는 회중보다 더 잘 성장한다면, 교회는 맹목적으로 이 원리를 따를 필요가 없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라고 함으로써 이 원리의 상대적 특성을 말하고 있다.37) 이런 점에서 에디 깁스(Eddie Gibbs)는 이 원리를 ‘동질집단의 개념’(homogeneous unit concept)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말한다.38) 동질집단의 원리는 불신자들이 사회적 장벽을 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항구적인 진리도 아니고 궁극적인 목표도 아니다. 따라서 이 원리의 사용에는 일정한 조건과 상황의 제약이 따른다는 점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동질집단의 원리 vs 이질집단의 원리

동질집단의 원리에 관해서 말할 때 맥가브란은 주로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경우 곧 신자가 되는 경우를 상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마도 일정한 부족이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회심하는 사례들을 많이 접했던 맥가브란으로서 이런 경향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동질집단의 원리는 맥가브란의 또 다른 이론 ‘제자화와 완전화’(discipling and perfecting) 중에서 제자화 단계에 필요한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개념을 규정하자면 제자화는 일정한 사회의 한 집단 또는 개인이 “비기독교 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며, 완전화는 제자화 이후에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39) 그런데 동질집단의 원리와 제자화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와그너 역시 “맥가브란의 진술은 완전화가 아니라 제자화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양육의 원리가 아니라 전도의 원리다.”라고 말함으로써 같은 생각을 표명한 적이 있다.40)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명칭보다도 개념에 주목해서 보자. 이렇게 보면 동질집단의 원리는 결국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단계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동질집단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제자화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이 원리를 믿음이 연약한 신자가 성숙한 신자로 성장하는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한 예로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을 생각해 보자. 회심하긴 했으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신자를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그룹에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는 문화적인 이질감 때문에 불편을 느껴 참여를 꺼릴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동질집단에 넣어줘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그가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자기와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런 변화 과정에 대해서 와그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원리[동질집단의 원리]에 깔려 있는 기본 전제는 언제나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일단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경의 윤리적 원리들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면 인종주의와 편견을 가지고 보는 성향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41) 결국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 보면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가급적 동질집단에 속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고, 성숙한 신자들은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으므로 이질집단에 소속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보쉬는 동질집단의 원리를 공동체의 초기 단계에 적용할 것으로 여기고 시간이 가면서 점차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증진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생각이 선을 위해서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의 사고방식이라고 쏘아붙인다.42) 그러나 그의 비판은 동질집단의 원리를 적용하는 행위가 과연 악한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낳는다.

앞에서 동질집단의 원리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진정한 교회성장에 요긴하게 쓰이는 도구적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는 동질집단의 원리가 온전한 선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개념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해 방식을 신앙의 발전 과정에 적용해 보면 신자들에 대한 신앙 지도를 위해 동질집단의 원리와 이질집단의 원리(heterogeneous unit principle)가 모두 필요하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동질집단의 원리는 불신자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과정 또는 초신자를 위해 유익한 원리다. 반면에 초신자의 신앙이 점점 성장할수록 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질집단의 원리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이질집단의 원리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며, 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질집단의 원리란 한마디로 말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선교의 사명을 뜻한다. 누구나 자신의 문화적 영역을 넘어서 다른 문화에 들어가는 것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자기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성숙하다면 자신의 문화적 경계를 넘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의 마음가짐이고 성육신의 자세다. 누가 선교사로 나가는가?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문화권으로 나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연말에 신자들의 소그룹 모임인 구역을 재편성할 때 종종 오래 믿어 성숙하다고 생각되는 신자들을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이 있는 구역으로 파송하는 경우가 있다. 신앙의 선배요 지도자로서 그들을 돌보고 양육하라는 뜻에서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목회자를 찾아와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불편하니 다시 익숙한 옛 구역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그럴 때 목회자는 그들에게 뭐라고 권면하는가?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불편해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품고 섬길 줄 알아야 한다고 지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질집단의 원리에 담긴 의미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원리에 대해서 맥가브란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질집단형 교회를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표가 아니라고 하였다. 와그너도 비슷한 논조로 말하였다. 그는 “동질성은 복음전도 위임 수행을 돕고 이질성은 문화 위임 수행을 돕는다.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43) 그런데도 그들은 동질집단의 원리를 너무 강조하느라 이질집단의 원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맥가브란이 동질집단의 원리와 함께 이질집단의 원리를 똑같이 강조했더라면 그렇게 심한 비판에 부딪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질집단의 원리는 맥가브란이 말하는 완전화와 관련이 있다. 성숙한 신앙인은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다.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성육신하려고 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우리에게 이런 사역에 대한 최고의 모범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선교적 교회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이와 같이 다른 문화에 성육신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지역사회와 세상에 다가가는 신앙공동체다.

그러므로 신자의 신앙 발달 과정과 교회공동체에는 이 두 가지 원리가 다 필요하며, 이 두 가지는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활용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활용할 때 구분하는 기준은 신앙의 성숙도다. 자기의 문화 영역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 신자요,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기의 문화 영역을 넘어 다른 문화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성숙한 신자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의 발전은 동질집단의 원리로부터 이질집단의 원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다만 원리의 적용은 현실과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문제다.

3) 지역교회 차원과 교단 차원

맥가브란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의 시선이 동질집단의 원리에만 고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부터 거리가 멀다. 오히려 맥가브란의 시선은 동질집단의 수준을 넘어 그것을 포괄하는 좀 더 넓은 영역에까지 닿아 있었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생각은 “다원주의적 모델” 곧 “개별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구성하는 문화적 모자이크”에 가까웠다.44) 그는 사회가 다양한 조각들로 구성된 일종의 모자이크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각 조각은 동질집단으로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지만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주로 지역교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교회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차원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지방회나 노회, 총회 등의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차원의 교회를 상정하면 동질집단의 원리가 어느 차원의 교회와 관련되는지가 중요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교단 차원에서 보느냐, 아니면 지역교회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 원리의 효용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와그너가 중요한 언급을 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동질집단의 원리는 주로 교단 차원이 아니라 회중 차원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지역교회 차원에서는 교인들 사이의 교제가 교회 생활에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45) 이런 점에서 맥가브란의 원리는 동질집단형 교회과 혼합형 교회를 모두 상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

지역교회 차원에서는 동질집단형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선교적으로 유익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역교회 차원을 넘어선 넓은 영역에서는 동질성보다 이질성 또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교단 차원에서는 다양한 동질집단형 교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문화적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내에는 서로 다른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다양한 민족집단이 존재한다. 같은 민족일지라도 사용하는 제1언어가 다르면 같은 회중으로 묶이기가 어렵다. 한인 교회들 가운데 1세들과 2세들이 서로 다른 회중을 구성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역교회 차원에서는 동질집단형 교회를 장려하는 것이 좋고 교단 차원에서는 그 다양한 동질집단형 교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혼합형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집단의 하나 됨을 강조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렇게 성경이 다양한 집단의 하나 됨을 강조한다고 해서 용광로 모델(melting pot model)처럼 다양한 재료들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여러 가지 증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초대 교회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끼리, 헬라인들은 헬라인들끼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사회적 모자이크의 각 조각과도 같은 이 동질집단형 교회들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기를 바랐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동질집단의 원리를 적용하는 방식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의 다양한 차원을 고려할 때 동질집단의 원리는 가급적 하위집단에 적용되어야 하며, 상위집단으로 갈수록 다양성이 존재하는 혼합형 교회를 강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동질집단의 원리는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나가는 말

동질집단의 원리는 맥가브란 교회성장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이다. 이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학자들이 마치 신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판적인 의견을 쏟아내면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의 비판은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선교 현장 또는 목회 현장의 복합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에디 깁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은 문화를 구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의 일치를 강요하지는 않는다.”46)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 문화적으로 다양한 삶이 구현되기를 원하신다. 동질집단의 원리와 이질집단의 원리, 동질집단형 교회와 혼합형 교회를 균형 있게 다루려면 이런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를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모자이크의 조각들인 각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동질집단의 원리와 같은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도 이런 교회성장학의 이론들을 다룬 논문들이 별로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과거의 이론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시대가 변천하였고 그런 세월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학문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점으로 과거의 이론을 재조명하고 다양한 현장에 적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본다. 앞으로 과거에 유용했던 교회성장학의 이론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Notes
3) Ibid., 280.
4) 피터 와그너는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요소로 9가지−종족, 종교, 출신국가, 융화 요소, 도시−농촌 지향성, 지역적 정체성, 출신학교, 직업, 경제 능력−를 제시한다. C. Peter Wagner, Our Kind of People: The Ethical Dimensions of Church Growth in America (Atlanta, GA: John Knox Press, 1979), 62.
6) 피터 와그너, “제3판 서문,”『교회성장이해』, 10.
8) Ibid., 277.
9) Ibid., 286.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벧전 2:8)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1) Ibid., 109.
15) Ibid., 281.
20) Ibid., 237.
24) Ibid., 147.
27) Ibid., 296.
28) Ibid., 287.
29) Ibid., 297.
32) Ibid., 300-301.
36) Ibid., 302.
37) Ibid., 301.
45) Ibid., 14; 같은 책 149쪽 참조.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2019년도 서울신학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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