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50, No. 0, pp.7-45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9
Received 15 Sep 2019 Revised 14 Nov 2019 Accepted 15 Nov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12.50.7

해방 후 인천 내리교회의 우익과 좌익의 국가 수립 활동
이은선
안양대학교 교수, 교회사 (eunlee@anyang.ac.kr)

Right-wing and Left-wing Nation-Building Activities of Incheon-Naeri Church after Liberation
Eun Seon Lee
Ph.D. Professor, Church History Anyang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초록

인천은 해방 정국에서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파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일제 시기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이승엽과 조봉암, 이들에게 동조하는 내리교회 출신의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하여 보안대,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영섭과 정해궁, 최진하, 하상훈, 이범진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회와 한민당 인천 지부를 조직하였다. 좌우파 세력은 임시정부 환영식과 신탁통치 반대 선언문 작성을 둘러싸고 충돌하였다.

1946년에 접어들어 좌파는 민전을 조직하였고 우파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천 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46년 3.1절 행사는 함께 진행하였으나, 8.15 기념행사는 좌우파 조직은 참여하지 않고 시주관으로 진행하였다. 좌파는 1947년 1월에 남로당을 조직하였고, 1947년 3.1절 행사는 좌우파가 대립하여 따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좌파는 3월에 파업을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핵심인물들이 검거되어 이후에 세력이 약화되었다. 좌파들은 끝까지 인민공화국을 주장하며 미군정과 대립하여 국가 수립에 참여할 수 없었고, 하상훈과 곽상훈 등의 우파는 민주공화국 정부를 구성하는 1948년 5월의 총선거에 참여하였다.

Abstract

Incheon was a place where the left wing was strong enough to be called the Moscow of Korea in the post-liberation political context. Here, Lee Seung Yeop and Jo Bong Am were involved in communist activities from the time of the Japanese occupation. Kim Yong Gyu, Park Nam Chil, Lee Bo Un who were Naeri Churchmen worked with them. When Korea received liberation, they organized Security Guards, Preparation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and the People’s Committee. Among these, the pastor Kim Young Seop, Chung Hae Gung, Choi Jin Ha, Ha Sang Hoon, and Lee Bum Jin were the main members of the Naeri Church. They organized the National Assembly and the Incheon branch of the Korea Democratic Party. Left-wing and right-wing forces clashed ov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welcoming ceremony and writing of a declaration against the trusteeship.

In 1946, the Left Wing organized the Democratic National Front and the Right Wing organized the Incheon branch of Society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These were conducted in conjunction with the event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46, but the 8.15 commemorative event which was hosted by Incheon City proceeded without the participation of the left-wing organizations. The Left Wing organized the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in January 1947, and in 1947, the March First Movement commemoration was held by the left and right wings separately. In the process, the left strike was conducted in March. In the process, key figures such as Kim Yong Gyu, Park Nam Chil, and Lee Bo Un were arrested and the left forces weakened soon afterwards. The left wings insisted on a peoples democracy to the end and could not participat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 in opposition to the US Military Government. Right-wing members such as Ha Sang Hoon and Kwak Sang Hoon participated in the general election in May 1948, which constituted a liberal democratic government.


Keywords: Naeri Church, Right Wing, Left Wing, Korea Democratic Party, Society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People’s Council,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키워드: 내리교회, 우파, 좌파, 한국민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민위원회, 남로당

I. 들어가는 말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의 국가 수립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었다.1) 일제의 식민통치가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여 미군정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이념에 따른 국가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국가 수립 활동에 대해 우익과 좌익이란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연구하기도 하였고, 인물들의 활동에 주목하기도 하였으며, 청년 조직들의 활동과 국민운동 조직과 정치단체들의 활동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국가 수립 활동에 참여하여 주목받은 조직들은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비상국민회의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한민당과 한독당을 비롯한 다양한 정당 조직, 그리고 다양한 청년 조직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정치활동에 참여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직이 교회였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장로교공의회가 이미 1901년에 정교분리의 원칙을 정하였다. 이후 한국교회는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교인들에게 교육하였다. 이 원칙이 준수되어 한국교회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반면에, 일제 식민통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서 다양한 조직들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2) 물론 일제 말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였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당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교회는 해방 후에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잘 조직되고 서구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지역의 중심 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국가 수립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많은 교회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신앙에만 정진하였지만, 일부 지역의 중심적인 교회 출신 기독교인들은 지역의 중요 정치세력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현재 각 지역에서 국가 수립 활동을 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해방 공간에서 이루어진 정치활동을 특정한 교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분석한 연구들이 거의 없어서 그러한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3)

그래서 본고에서는 해방 공간에서 인천 내리교회 출신들이 인천의 좌우익 진영에서 전개했던 활동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4) 인천의 내리교회 출신들 가운데 김영섭 담임목사, 하상훈, 이범진, 서병훈, 최진하, 그리고 정해궁 등은 우익에서, 박남칠, 김용규, 그리고 이보운 등은 좌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의 중심 교회들이 우익세력을 형성한 경우가 많은데, 인천의 내리교회 출신들은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에서도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첫째로 해방 이전 좌우익 양 세력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둘째로 내리교회 교인들이 해방 공간에서 만들었던 다양한 조직들의 인적 구성과 그들이 수행했던 역할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셋째로 내리교회 출신들이 이승만의 총선을 통한 대한민국 건설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해방 공간의 인천 지역 사회에서 내리교회 출신 기독교인들이 수행했던 국가 수립 활동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들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이 믿는 정치 이념에 따른 국가를 건설하고자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우익은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받아 교회에서 실천하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총선을 통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지지하여 총선에 가담하였고,5) 좌익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활동하다 탄압받으며 지하로 들어갔다.


II. 해방 이전 내리교회의 좌우 세력의 형성 과정

해방 후에 인천의 우익과 좌익의 중심 세력을 형성한 많은 사람들은 인천 영화학교 출신이면서 1920년대 내리교회의 청년단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 활동하던 영화학교 출신들은 이범진, 김용규, 하상훈, 차태열, 이동오, 이보운 등이다.6) 이 학교 출신들이 3.1운동이 일어난 후 1920년대 인천의 청년 조직들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분화하게 된다.

내리교회가 운영하던 영화학교 출신들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 5월에 대한제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가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1906년에 해산당하였다.7) 1908년 엡윗청년회는 재조직을 요청했으나, 해리스 감독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내리교회는 그 해 즉시로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중을 선도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8) 1918년에 부목사로 부임한 김영섭9)의 지도하에 청년회는 다음 해에 회원이 173명이 될 정도로 성장하였고, 여자청년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10) 그러나 오기선 감리사의 3.1운동에 대한 미온적 태도로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은 불만을 품고 교회를 이탈하여 1920년에 청년회원이 46명으로 급감하였고, 청년회를 이끌었던 김영섭 목사도 그 해 5월 미국유학을 떠났다.11)

1920년 6월에 김진호 전도사가 박봉래 목사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했다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된 상태였는데, 오기선 감리사의 주선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22년 6월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배재고보 교목으로 갈 때까지 이년 동안 청년 중심 목회를 하여, 청년회가 311명의 규모로 성장하였다.12) 그 결과 내리교회 청년회는 1920년대 인천 청년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떠난 후에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2년여의 옥고를 치른 신홍식 목사가 부임하여 5년간 목회를 하였다. 그는 전임자의 청년 중심 목회를 장년 중심 목회로 전환하여, 1923년에 남녀청년회를 통합하고 별도로 소년회를 조직하였다.13)

1920년대 인천에는 이우구락부, 한용청년단, 제물포 청년회 등이 있었지만, 내리교회 청년회가 가장 규모도 크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청년회는 야학, 웅변대회, 토론회, 강연회, 연주회 등 다양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전반기에 내리청년회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하상훈, 서병훈, 최진하, 이동오, 이범진 등이었고, 그 후에는 박남칠, 정우, 윤대석, 이보운 등이었다.14) 이렇게 엡윗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후에 인천의 우익과 좌익을 형성하게 된다.

인천의 우익세력을 형성했던 인물들은 주로 동아일보 인천 지국에서 활동하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과 조선일보 기자 최진하 등이었다.15)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은 1-3대 동아일보 지국장들이었고, 하상훈과 서병훈은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16)의 부조합장과 이사가 되어 민족 상권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 이범진은 1915년 영화남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1921년 내리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함께 활동한 임원은 하상훈, 서병훈, 정우, 나시극 등이었다.17) 이들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유두희, 조봉암, 이승엽 등과 교류하며 함께 활동 하였다.

인천의 우파의 핵심이던 하상훈과 서병훈과 이범진은 1920년 후반에 좌우합작으로 두 개 조직을 만들었다. 먼저 이들은 인천 전체를 망라하는 신정회를 조직하였다. 신정회는 1927년 5월에 발기인 대회를 가졌으며, 강령에서 생활의식 각성을 촉구하고,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며, 정의를 함양하고 단결의 혁신을 기하고자 하였다. 창립준비위원은 양제박, 곽상훈, 최진하, 고일, 서병훈, 이범진, 강복량 등으로 좌우익이 함께 참여하였다.18) 신정회는 6월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하상훈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상무위원은 곽상훈, 고일, 강복량, 위원은 유상근, 김용규, 홍원표 등이었다.19)

신정회가 조직된 직후 인천 좌우익은 1927년 12월 5일에 신간회를 조직했다. 신간회 지부는 입회 회원 67명에 당일 36명이 참가했으며, 하상훈이 회장, 총무간사 곽상훈, 강복양, 최진하, 유두희, 고일, 간사 서병훈, 이범진, 양재박, 권충일 등으로 결정되었다.20) 이러한 구성원들 가운데 하상훈, 곽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진하 등은 우파이고, 강복양, 유두희, 고일, 권충일 등은 좌파에 속하였다. 신간회는 1931년 2월 10일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위원장 하상훈, 집행위원 권충일, 곽상훈, 고일, 이보운, 검사위원장 홍재범, 검사위원 조준상, 서병훈 등으로 결정한 후에 해소를 결정하였다.21) 최진하는 1931년 조선일보 인천지국장으로 인천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에 참여하여 호외를 제작하여 배포하였고 시위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다.22) 이와 같이 인천 우파는 내리교회 출신인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진하와 교회 밖의 곽상훈 등이 중심이 되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엡윗청년회 안에 기독교 사회주의가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배재고보와 YM CA 중등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1920년대 후반이었다. 배재고보 출신 내리청년회 임원은 홍호, 갈홍기, 이보운 등이며 YMCA 중등부 출신은 박남칠이었다.23) 1920년대 후반 박남칠과 이보운은 내리교회 청년회와 소년척후대에서 함께 활동했다. 박남칠은 부친 미곡상을 계승했으며, 큰 정미소를 운영하며 다양한 사업을 하던 김용규24)를 만나 정미업으로 업종을 확대하였다. 연전을 졸업한 이보운은 1929년 내리청년회 회장을 맡았으며, 인천에서 양품업과 정미업에 종사했다. 그는 김기범 목사 아들이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인천에서 미국 교포를 상대로 무역업을 하던 김태진과 사업관계를 맺었고 사위가 되었다.25)

내리교회 청년회에서 1920년대 후반에 활동하면서 소년척후대에서도 함께 활동했던 박남칠과 이보운은 김용규와 권충일26)과 함께 해방 후 인천 좌파의 중심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다음의 여러 경로를 통해 기독교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한다. 첫째는 YMCA의 이대위와 신흥우 등을 통해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서울 YMCA 중등부를 다니던 박남칠과 1923년 배재고보를 다니던 이보운은 YMCA를 통해 기독교 사회주의를 전파하던 신흥우와 이대위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27) 신흥우는 1924년 3월 23일 인천 내리교회에 와서 특별 강연을 하였고28) 이대위는 1927년 11월 20일에 조병옥, 김창준 등과 함께 특별전도대회에서 “기독교와 청년”이란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하였다.29)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남칠과 이보운 등을 비롯한 내리교회 청년들은 기독교 사회주의를 접했다. 둘째는 여운형이 1930년대에 인천에서 했던 두 번의 강연을 통해서다. 먼저 1933년 5월에 시국경제강연회를 열어 미국의 경제공황에 따른 세계경제의 흐름과 우리의 나아갈 길을 강연했고 1935년 10월에 시국강연회를 열어 이탈리아 문제를 중심으로 한 열국의 동태에 대해 강연했다.30) 이 시국강연을 들으면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31) 셋째로 이들은 1925년에 이보운과 함께 배재고보를 졸업한 김요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김요한은 내리교회 교인으로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에 동경제대 상과에 입학하여 사회주의에 물들었다. 그는 1928년 졸업 후 인천으로 돌아왔으며 1929년에 내리교회 권사가 되어 청년회 회장인 이보운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1937년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공산주의자인 것이 알려져 인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32) 김요한은 처남 이보운을 통해 김용규, 윤석준, 박남칠 등을 중심으로 미곡상, 정미업자, 미곡 중개인 등에게 주 1회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고, 각종 사회주의 관련 유인물을 배부하였다.33) 김요한과 이보운은 김태진의 사위들로 동서 지간이다.34) 넷째로 김요한의 연결로 이승엽이 미곡상 조합의 사무장으로 채용되었고 조봉암은 비강업 조합장이 될 수 있었다. 조봉암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32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7년간의 감옥 생활을 한 후에 1939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된 후 이들과 연결되어 인천에 와서 비강업 조합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승엽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가담했고, 1937년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9년에 출옥했다. 그는 1940년에 다시 검거되어 감옥에 있을 때 조봉암의 전향 권고를 받아들여 전향하여 출소했고35) 인천 미곡상 연합회의 사무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상호밀접하게 연계되어 생활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하였다. 해방 후 인천 좌파에 속하는 박남칠, 이보운, 김용규, 이승엽, 조봉암은 1940년대 이후에 인천의 미곡상 조합과 함께 지연과 학연을 통해 깊게 상호연결되어 있었다.36) 조봉암과 이승엽의 활약은 인천의 조선인 정미업자와 미곡상 100여 명이 사회주의자나 후원자가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김용규와 박남칠은 미곡상과 정미소 등을 운영하면서 친일적인 인천상공회의소에서 활동하였다. 박남칠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인천상공회의소 조선인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8년 2월에는 인천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37) 김용규는 인천부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3년 조선인 최초로 인천상공회의소 부회두(부회장)가 되었다.


III. 해방 공간에서 조직된 정치단체들에 내리교인들의 참여와 활동
1. 좌익들의 정치단체들과 내리교인들의 참여

해방 후 인천에서 가장 발 빠르게 조직을 만든 인물은 조봉암이었다. 그는 1945년 1월 해외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예비검속 되었다가 해방 당일 오후에 풀려났다. 여운형이 그를 만나 건준 중앙조직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인천으로 내려왔다. 그는 다음날 인천경찰서 유도 교관을 지낸 이임옥에게 청년들을 모아 인천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여 8월 17일에 결성하였다.38) 이렇게 조직된 보안대는 각 동리별로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여 인천 지역에서는 거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보안대 회장은 김용규가 맡았고, 이임옥과 함께 권충일과 김석영 등이 좌파 청년들을 모아 치안활동을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보안대는 건준 인천 지부 결성의 토대가 되었다. 1945년 8월 18일 영화극장에서 인천 건준이 조봉암의 주도로 조직되었다.39) 그런데 건준 임원진은 내리교회 출신들이 맡아 건준 위원장은 김용규, 부위원장은 박남칠이었고, 이보운과 윤석준 등이 주요 임원을 맡았으며, 조봉암과 권충일은 고문으로 위촉되었다.40) 건준에는 인천 미곡상들이면서 영화학교 출신, 내리교회 출신이 많았으며, 이러한 공통점을 토대로 서울 조직과 별개로 신속하게 결성되었다. 이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은 일찍부터 공산주의자인 조봉암과 이승엽 등과 연계되었고, 일정 부분 여운형의 영향도 받았다. 건준 인천 지부는 보안대를 통해 치안유지 활동을 계속 했고, 9월 중순에 지부 내에 조선인민원호회를 조직하고 각종 의연금을 모금하여 일본, 중국 등지에서 귀국하는 전재동포를 구제하는 활동을 했다.41) 이 원호회는 회장 김기선, 부지부장 정우, 총무부장 서병훈, 사업부장 차태열,42) 선전부장 최경득이 임원으로 활동했다.43) 건준 인천 지부는 이같이 치안과 구호를 담당하는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으로 발전했는데, 좌익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건준 인천 지부는 서울의 중앙조직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나서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자, 여기에 발맞추어 10월 16일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시정방침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며 비몰수 토지는 소작료를 3:7로 한다고 하는 등 조선인민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따르고 있었다.44) 그리고 11월 5일에 위원장 김용규, 부위원장 박남칠,45) 총무부장 이보운, 노동부장 한기동 등으로 인민위원회 책임 부서를 결정하여 내리교회 출신들이 주도하였다.46) 이러한 구성은 인공의 중앙조직을 따른 것이지만 노동부장은 인천의 산업 항구도시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다.47) 이러한 인민위원회로의 개편 과정에서 더욱더 좌익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11월 10일에 경기도 인민위원회 결성식에서 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으며, 위원장 박형병과 부위원장 박남칠과 하규항이 선출되었고, 이보운은 산업부 차장으로 선출되었다.48) 또한 박남칠은 박형병, 하규항과 함께 1945년 11월 20-22일 3일간 천도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경기도당 대표로 참석했고, 미군정의 인공에 대한 해체 압력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확대위원회에 경기도 위원으로 참석하였다.49) 이로써 인천 인민위원회는 지역에서는 경기도 인민위원회에, 중앙에서는 조선 인민공화국에 연결되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50) 이같이 내리교회 출신인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은 인천과 경기도 인민위원회의 핵심세력이 되어 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2. 우익들의 정치단체들과 내리교인들의 참여

내리교인들이 중심이 된 좌익세력들이 보안대와 건준을 조직할 때, 같은 교회 출신을 중심으로 우익들도 서서히 조직을 정비하였다. 당시 내리교회의 김영섭 담임목사와 함께 1920년대 내리청년회 출신으로 동아일보 인천지국장들이었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과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진하 등이 우익의 중심이었다. 김영섭 목사는 이승만과 일제 강점기부터 교류하였으며 흥업구락부에 소속되어 옥고를 치렀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활동을 하였다.51) 김영섭은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인 1945년 10월 19일에 제일 먼저 면담한 국내 인사 80여 명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으며, 임정에 대한 적극 지지를 선언했던 남부대회에서 부회장이 되어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였다.52)

1945년 9월에는 민족진영의 국민회가 인천에서 독자적으로 조직되었다. 국민회는 김영섭 목사가 내리교회의 김경내, 최진하, 정해궁 등과 함께 김화순, 하연숙, 원경희 등을 규합하여 조직하였다.53) 내리교인들의 상당수가 좌파에 가담하자, 교회의 좌경화를 막고자 김영섭 목사가 우파세력을 적극 결집하여 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내리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10월에 우익 정치조직으로 한민당 인천 지부가 조직되었다. 한민당은 건준을 토대로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임정을 지지하며 인민공화국 세력의 타도를 목표로 조직되었다.54) 한민당은 당시 사적 소유를 인정하나 대기업의 국가 경영을 주장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주장하는 정당이었다.55) 당시 좌파들이 먼저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가를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에, 한민당은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적인 우파와 중도 좌파들까지 포용하고 있었다.56) 9월 7일 서울에서 송진우가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임정을 지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였고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자, 전국에서 제일 먼저 10월 1일에 동아일보 인천 지국에 관여하였던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체육인, 사업가, 정회장 등으로 한국민주당 인천 지부를 결성하였다.57) 한민당 인천 지부는 위원장 곽상훈, 부위원장 양제박, 사무국장 이범진, 총무 하상훈, 감찰위원장 서병훈 등으로 조직되었다. 사무국장 이범진, 총무 하상훈, 감찰위원장 서병훈은 모두 내리교인들이었다. 한민당 간부인 이범진과 양제박은 10월 7일 군정장관을 면담하고 친일분자를 제외한 강력한 고문기관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58)

3. 미군정의 실시와 우익세력의 확장

해방 후에 미군정이 제일 먼저 실시된 곳이 인천이었다. 인천에는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제일 먼저 상륙하였고, 따라서 인천에서 제일 먼저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9월 중순에 스틸맨 소좌가 인천 군정관으로 임명되었고, 9월 20일 일본인 부두국장을 해임하고 표양문을 새로운 부두국장으로 임명하였다.59) 그는 9월 26일 일본인 과장들을 해임하고 9명의 조선인 과장들을 임명했으며, 9월 29일에는 며칠 내에 인천 부윤과 경찰서장을 선임할 것을 발표하였다.60) 미군정관은 이같이 인천의 행정과 경찰을 새롭게 조직하여 장악하고자 하였다.

미군정은 인천 시장 선출 과정에서 일제 말기 구성된 정회장 회의에서 선출하고자 했으나,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10월 4일 새로운 정회장을 민주적인 절차로 선발하기로 결정했다.61) 당시에 인천의 정은 76개였다.62) 시장 선출 과정에서 10월 6일에 인천 건준은 미군정에 “시장과 (경찰)서장 선거는 시민의 총의에 따라야 한다.” 등의 4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63) 그날 인천시 과장 9명과 각 정회장 등 98명이 모여 구성된 정회장 회의에서 임홍재를 비롯한 조봉암, 박남칠, 김용규, 김세완, 이승엽, 장광순 등 7명이 구두 추천을 받았다. 이 가운데 박남칠과 김용규는 내리교회 출신이었고, 조봉암, 박남칠, 김용규, 이승엽은 좌파 출신이었으며, 임홍재와 김세완과 장광순은 우파였다. 정회장들의 기명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임홍재가 67표로 추천됐다.64) 미군정은 그를 초대 인천 부윤으로 임명했다. 광복 직후 간선제를 통해 민의를 상당 정도 수렴한 정회장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시장 선거에서 우익이 상당한 지지를 받아 승리하였다.65) 임홍재는 인천시 농림과장을 하던 중에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시장에 취임함으로써 인천은 우익 중심의 행정기반을 마련하였고, 우익에 우호적이던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다.66) 물론 그가 시장으로 선출되는 데는 이범진을 비롯한 우익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67) 이로써 인천시에는 우익적인 정회장들의 후원 속에 우익들이 세력을 확장하며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의 시장 취임 후인 1945년 10월 31일 32명으로 구성된 시 고문회를 조직했는데, 이범진, 하상훈, 서병훈,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6명이 내리교인이었다. 이 가운데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신태범 등 좌익인사 4명이 시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들을 제외한 28명은 모두 우익계열이었다.68) 우익계열 의원 중에는 친일경력 소유자들이 포함되어 있어 대표성과 자질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어났다.69)

미군정은 경찰 조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일제하에서 15년 동안 인천부회의원을 지낸 김윤복을 보안서장으로 임명했는데, 민족주의자인 이범진이 그의 친일행위를 비판하였다.70) 이에 대해 미군정은 한민당 지부에 순경 183명 선출권을 제공하였고, 10월 20일부터 이들 선발 시험을 치렀다.71) 11월 초에 경찰 조직을 개편하면서 김윤복을 서장으로 임명하고 보안대장인 이임옥을 경무주임으로 임명하여 보안대 인력을 흡수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11월 18일에는 인천경찰서의 새로운 진용을 임명하였는데,72) 이임옥을 해임하여 보안대 세력을 배제하였다.73) 이와 같이 경찰 조직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친일활동을 한 김윤복이 서장이 되고 우익세력의 추천자들이 채용되면서 좌익들은 배제되어 갔다.

4. 우익과 좌익의 대립

인천 지역의 좌우익의 정치단체들 사이의 첫 번째 대립은 귀국한 임정 환영행사에서 발생했다. 10월 25일에 한민당 인천 지부와 인천 인민위원회 등의 대표 20여 명이 모여 임정 혹은 인공을 지지할 것인지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중앙 정계의 추이를 따라가기로 하였다.74) 임정 1진이 11월 23일 귀환한 후인 26일에, 한민당 지부는 임정 환영식을 성대하게 치르고자 대회 비용 5만원을 각 정회와 유지들로부터 갹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한민당 지부는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임시정부를 우리 민족의 주관적 정통정부로 봉양함은 금후 정치노선의 여하를 막론하고 36년간 왜적에 대립 투쟁한 민족적 전통을 분명히 하는 대의명분이다.”라고 하면서 이 행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민위원회와 조공 인천 지부를 중심으로 한 좌파들은 “임시정부가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하는데 그들을 정부 자격으로 환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환영대회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것은 한민당이 ‘자기 당의 허세를 과장하려는 교묘한 선전술, 기만적 행위’라고 비난하였다.75) 12월 1일에 열린 정회장 대회에서 일부 정회장들은 이 대회를 지지하고자 하였으나, 좌파 정회장들은 반대하여 정회장 회의에서 임정 환영대회 지지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76)

1945년 12월 3일에 진행된 환영행사에 다양한 단체들이 입장한 후에 하상진 대회위원장의 개회사, 임홍재 시장의 환영사 후에 임정을 절대 지지한다는 결의를 하고 시내 행진을 하였다.77) 이러한 행사를 통해 우파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이 행사를 통해 임정에 대한 좌우파의 인식이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우파는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환영하는 데 반해, 좌파들은 임정을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환영회 개최 자체도 서민생활의 어려움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인천의 좌우익 갈등은 이른바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악화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후에 인천에서는 29일까지 좌우익이 별다른 입장표명이 없었다. 인천에서의 첫 번째 반탁 움직임은 29일에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결의한 정회장 모임에서 표출되었다.78) 12월 31일에 인천시청 직원들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1월 5일까지 결근하기로 결정하였고, 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90명이 내리교회에서 모여 신탁통치반대인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탁통치 절대반대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결의문 작성 기초위원으로 김용규(인민위원회 위원장), 이보운(인민위원회 총무부장), 김요한, 곽상훈(한민당 인천지부장), 손계언(인천신문기자회 부위원장) 등 5명을 선정하였다.79) 그러나 좌우익 공동의 ‘신탁통치반대공동위원회’는 좌익이 찬탁으로 선회함으로 무산되었다. 이러한 좌익의 찬탁 결정은 즉각적인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뜻과 배치되었고 좌익이 인천 시민들 사이에서 점차로 지지를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1월 1일에 인천 국군 해상대가 탁치 절대 반대를 결의하였고,80) 각 학교 학생들과 경인 통학생들이 1월 4일 창영초등학교 강당에 모여 신탁관리 절대 반대 결의회를 개최하였다.81) 인천시 의원들 32명 전원이 신탁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전원 사직원을 시장에게 제출했는데, 1월 8일 임시장이 반려하였다.82) 이후 인천에서 별다른 반탁활동이 없었는데, 1월 16일에 우익의 한민당 인천 지부가 발의하여 인천체육회, 전재민동맹 외 23개 단체와 정회 대표들이 참여하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최진하의 사회로 ‘반탁각단체대표연합회’ 회의를 열어 국민운동으로 반탁운동의 전개와 반탁인천시민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9명의 상임위원을 정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83) 그리고 이러한 반탁운동의 전개를 계기로 우익은 좌익에 비해 열세에 놓여있던 정치적 기반을 점차 넓혀 나갔다.

5.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 인천 지부와 인천애국부인회 조직

중앙에서 한민당, 인민당, 공산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을 비롯한 5당 연합이 실패한 후에 우파가 비상국민회의와 독촉으로 개편되어 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좌파들은 2월 초에 조선공산당과 인민당이 중심이 되어 민전을 결성하고자 20여 명의 발기위원을 결정하였다.84) 민전은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에 대비하여 조공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하는 좌파세력들의 연합체였다. 1946년 초부터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점차 비법화됨으로써 민전이 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국가 건설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85) 이 시기에 우파의 비상정치국민회의와 좌파의 민전이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다. 민전 인천 지부는 중앙보다 1주일 앞선 2월 7일 130여 명이 모여 결성되었는데,86) 의장 조봉암, 부의장 신태범을 선출하였다.87)

조봉암은 인천에서 의장이 됐으나, 2월 15-16일에 서울에서 결성된 전국 민전에서는 박남칠과 신태범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월 26일 결성된 경기도 민전에서도 이보운과 신태범이 부의장, 박남칠이 재정부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조봉암은 어떤 직에도 오르지 못했다.88)

민전 인천 지부가 조직되자 내리교회 출신 우파들이 중심이 되어 독촉 인천 지부와 인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독촉은 지방 우파세력을 조직화하고자 이승만과 김구 지지 세력이 연합하여 1946년 2월 8일에 조직했는데89), 이틀 후에 인천 지부가 조직되었다. 이승만과 친분이 두터웠던 김영섭 담임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여 내리교회 출신 최진하와 정해궁이 지부장과 부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정해궁은 이 조직을 도맡아 운영했으며, 대공 투쟁의 전위조직으로 대한건청을 조직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평안청년회를 유치하였다.90) 1946년 8월에 이루어진 임원개편에서 회장 윤병덕, 부회장 최진하와 정해궁이었다.

2월 18일에 내리교회 출신인 안인애, 김경내, 이순희 등이 중심이 되어 내리교회에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91) 내리교회 여자청년회 부회장과 근우회 인천 지회 집행위원을 지낸 안인애는 해방 후 애국부인회 부회장을 맡았다. 김경내는 1936년 영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내리교회에 다니면서 안인애와 함께 교회활동을 했다. 이순희는 내리교인으로 1928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36년 3명의 불우한 소녀들을 데리고 계명학원을 시작했다. 이 학원은 광복 때 학생수가 700명이나 되었으나 신흥초등학교와 축현초등학교에 전학생을 나누어 전출시키고 폐교됐다. 애국부인회 결성에서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 당시 인천 을구에서 출마해 인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후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부인회는 매월 월례회를 개최하였고, 박승호, 박순천, 안인애를 강사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부녀층에 대한 계몽과 일선에서 반공 투쟁을 하는 애국청년단체들을 지원하였다.

6. 좌우합작으로 열린 3.1절 기념대회

좌우 정치세력이 임정 환영대회와 신탁통치에서는 대립했으나, 해방 후 첫 번째 맞이한 1946년 3.1절 기념식은 좌우연합으로 치렀다. 2월 17일 기념식 준비모임에서 천도교의 김종원과 내리교회 김영섭 목사를 대표로, 임홍재 시장을 고문으로 추대했다.92) 20일의 준비모임에서 인천시내 한민당, 공산당, 인민당,93) 천도교와 기독교의 종교단체, 사회, 노동, 문화 등의 100여 명의 대표자가 모여 서울의 3.1 기념행사의 분리 개최 상황과 관계없이 인천은 좌우연합으로 전민족적 성전을 성대히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행사 진행을 위해 총무부 하상훈과 윤규호, 기획부 곽상훈과 이보운, 진행부 이범진과 박남칠, 재정부 김용규와 진해창, 경호부 최진하와 권충일, 선전부 조봉암과 심만택을 위원장과 책임위원으로 정하였다.94) 3.1절 행사에 5만여 명이나 운집했고 한민당 위원장 곽상훈의 개회사, 혁명투사에 대한 하상훈의 감사사, 이범진의 독립선언서 및 결의문 낭독, 미군정 스틸맨 군정관의 축사 등의 순서로 기념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조직은 좌우합작으로 했는데, 행사 진행 담당은 주로 우파가 하였다. 이어 내리교회 목사 김영섭 대회장의 대한독립만세, 연합군 만세삼창과 범시민적인 시가행진을 끝으로 장장 5시간의 행사가 막을 내렸다. 3·1 운동 기념식은 서울에서는 좌우가 서로 별개의 행사를 치러 좌우의 대립이 심해졌지만 인천과 부산, 대구 등 지방에서는 좌우공동의 민족적 행사로 치렀다.95) 이날 저녁 7시에는 내리교회 예배당에서 3.1독립기념예배를 드렸다.


IV. 조봉암의 전향과 우파 청년 조직의 재편
1. 조봉암의 전향과 내리교회 출신들의 인천 민전 지부 장악

좌우합작으로 진행된 3.1절 기념대회 이후 좌우익이 각자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조봉암 전향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던 조봉암은 상해에서 ML당 활동을 하다가 1932년에 체포되어 39년까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석방된 후 인천에서 비강조합장을 하면서 적극적인 공산당 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후 중앙의 건준, 조공, 민전 조직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인천을 중심으로 좌익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1946년 5월 7일에 대동, 한성, 동아, 조선에 조봉암이 박헌영을 비판하며 띄우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그의 편지가 공개되자 5월 15일 조봉암은 민전에서 탈퇴하여 의장직이 공석이 되었다.96) 그래서 인천 민전 지부를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사회주의 진영 인사 10여 명이 맡게 되었다. 6월에 인천 수해를 맞이하여 조직된 민전구호위원회에 위원장 김용규, 부위원장 박남칠, 남기목, 위원 이보운, 권충일 외 10명으로 되어 있다.97) 이것이 구호위원회 조직이지만, 당시의 민전 조직인 것으로 보인다. 김용규는 8.15 행사 준비 과정에서도 민전위원장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내리교회 출신들이 민전을 장악한 것을 알 수 있다.98) 그 후 조봉암은 6월 23일에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공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하였다.99)

이 무렵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나자 우익들은 실패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면서 전국적으로 독립전취대회를 개최하였다. 5월 12일 서울독립전취대회가 열린 직후인 19일에 인천에서도 한민당과 독촉 인천 지부가 연합하여 전취대회를 개최하였다.100) 이 대회에서 회장 김영섭, 부회장 곽상훈과 최진하, 총무부 이범진과 하상훈, 기획부 정해궁, 선전부 안인애 등으로 결정되어 내리교회 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101)

이 행사는 인천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6만 명이 참가하여 열렸다. 김영섭 목사가 독립전취의 총진군을 하자는 개회사를 하고 양제박의 미소공위의 경과 보고, 곽상훈의 선언문 낭독, 최진하의 결의문 낭독이 있었다. 그 후에 한민당 지부장 곽상훈, 독촉국민회 대표 원경희, 기독청년회 한충식, 독촉애국부인회 김경내 등 각 단체 대표의 독립전취의 결의 표명이 있었다. 이 대회가 끝나고 이승만 박사 환영대회가 열렸다. 이범진의 사회로 국민의례, 김영섭 목사의 환영사 후에 이승만 박사가 등단하여 소련을 조국으로 삼는 소련분자는 소련으로 가고 대한사람은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자는 연설을 하였다.102)

좌익의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태도 변화, 미군정의 좌익세력 탄압, 그리고 조봉암의 전향성명서 발표 등이 이어지면서 광복 후 인천 지역의 정국은 점차 한민당과 독촉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가운데, 좌익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인천에서 이러한 좌우의 극단적 대치는 한국 문제가 유엔에 이관된 1947년 말까지 계속되었다.103)

2. 내리교인 정해궁의 평안청년회와 서북청년회 인천 지부 조직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우익은 좌익보다 열세였던 청년 조직을 강화하고자 1946년 7월에 평안청년회 인천 지회를 조직하였다. 해방 정국의 청년회 조직에서 좌익은 보안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청년 조직에서 열세였던 우파들은 서울 청년 조직들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내리교인이자 독촉국민회 부지부장 정해궁104)은 곽상훈과 함께 1946년 5월경에 평안청년회 서울 본부를 방문하여 부위원장 선우기성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평안청년회는 7월 31일에 송태윤을 지부장으로 신흥동 정토사 회관에서 인천 지부를 조직하였다.105) 이들은 지부를 조직하고 나서 해방 후 인천으로 남하했던 평안도 청년들을 조직화하였다. 이렇게 세를 확보한 평안청년회 인천 지부는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 아래 인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의 노조가 있는 공장에 본격적으로 침투하여 전평 노조를 와해시키고, 평안도 청년들이 취업하여 대한노총을 결성하였다.106) 대한노총 인천연맹은 9월 1일 이승만 박사 외에 다수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답동 독촉국민회 인천 지부에서 결성식을 열었다.107) 이 행사에서 독촉국민회 인천 부지부장인 정해궁이 개회사를 하였고, 위원장은 류창호, 부위원장은 정해궁의 처남인 김화순과 김영주가 선출되었다.108)

1946년 11월에 황해도 청년들도 김태준을 부장으로 하여 황해회 인천 지부로 결집하였다. 그 후 평안청년회 인천 지부는 ‘대구 10월 폭동’의 여파로 강화된 인천 좌익세력의 활동에 대항하고자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평안청년회 인천 지부는 황해도와 함경도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6년 12월 14일에 서북청년회 인천 지부를 결성했으며, 현석종이 지부장, 이영진이 부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109) 이렇게 조직된 서북청년회 인천 지부는 1947년 1월에 경기도 서북청년회 본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서북청년회 경기도 본부는 이후 대한청년단 인천 시단에 흡수 통합되었고, 그 후에 대동청년단 인천 시단으로 계승되면서 인천 우익을 형성하게 되었다.110)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철저한 반공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의 반공 투쟁은 곧 기독교 수호 투쟁이 되었다.111) 내리교인 정해궁은 좌파가 우세하던 인천의 청년 조직들을 극복하고자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평안청년단을 조직하여 대한노총을 결성하고 서북청년단으로 결집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V. 1946년 8.15 행사와 1947년 3.1절 행사와 좌익의 파업
1. 1946년 8.15 행사

인천에서 좌우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맞이한 1946년 8.15 행사는 좌우 진영이 함께 행사 준비위원회까지 조직했다. 그러나 마침내 양자의 의견이 불일치하여 행사를 연합으로 진행하지 못하였다. 중앙에서 3.1절 행사가 좌우익이 분리되어 치름으로 많은 갈등이 발생했기 때문에, 미군정 당국은 8.15 행사를 군정청 중심의 단일 행사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임홍재 시장이 관공서와 좌우익이 함께 단일 행사로 진행하고자 곽상훈 한민당 지부장과 김용규 민전 의장과 의견을 교환하였다.112) 하지만 8월 2일에 인천의 8.15 기념행사도 시보다는 미군정청이 주관하여 시청과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하기로 하고, 5명의 시 상임고문과 각 단체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기로 하였다.113) 8월 6일에 준비위원회 1차 회의를 개최하여, 준비위원회 위원장 하상훈, 진행위원회 곽상훈, 하연숙, 박남칠, 하상훈 등을 위원으로 선정하여 행사 진행 일체를 위임하였고, 행사 명칭을 8.15 해방기념 인천시민대회로 정했다. 대회 행사 부서는 좌우합작으로 대회장 김종원, 부회장 곽상훈, 박남칠, 재정부 윤석준, 이중찬, 진행부 권충일, 하연숙, 선전부장 임남희,114) 정해궁 등으로 결정되었다.115)

이렇게 좌우익이 단일 행사로 준비한 8.15 기념행사는 좌우익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서 인천시가 단독으로 행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8월 15일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임홍재 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기념사와 독립전취결의문 낭독, 만세삼창으로 마치며 거리 행진을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116) 이에 앞서 조봉암은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에 걸쳐 “8.15 해방 기념일을 어떻게 맞이할까?”라는 기고를 통해 좌우 대립을 떠나 민중이 중심이 되어 하나 된 행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117) 8.15를 맞이하여 곽상훈 한민당 지부장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대동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소망은 자주독립이나 지난 일 년간은 민족분열의 한심한 해였다고 평가하면서 위폐사건이나 모종의 대음모사건 같은 민족반역적 사건같이 민족분열을 일으키는 사건을 비판하였다. 반면에 김용규 민전지부장은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분열을 극복하려면 국제민주주의를 기초로 좌우합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8) 이와 같이 우익과 좌익의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8.15 행사가 시주관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2. 1947년 3.1절 행사

인천에서 1946년에는 좌우연합으로 3.1절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8.15 행사부터는 서로 견해가 달라 행사를 함께 치르지 못했는데, 1947년 3.1절 행사는 아예 따로 행사를 추진하였다. 민전상임위원회에서는 인천시 민전위원회가 주최하는 3.1 운동 기념 인천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명예회장 김종원과 김용규 등이고, 위원장 박남칠, 부위원장 남기목, 이보운, 권충일 등이었다.119) 민전 측의 3.1 기념대회에 대해서는 27일에도 아직 장소와 시간이 미정이었다. 참가 단체는 인민위원회, 조공 지부, 민전위원회 등 16개 단체였다.120) 민전 산하 각 단체 주최의 3.1 기념대회는 11시에 용강학교 교정에서 열었다. 남기목이 사회를 보았고 박남칠이 독립선언서 낭독과 3.1 운동 약사 보고를 한 후에 성주식의 기념사가 있었는데 7천 명이 참여하였다.121) 이 시기에 박남칠은 민전 의장으로 이 행사를 주관하였고, 서울에서 성주식이 민전 대표로 참여하였다.

우익단체들은 한민당과 독촉을 중심으로 15단체가 참가하여 준비하였다. 위원장 정해궁, 부위원장 이범진, 함효영 등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에,122)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 역원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명예위원장 곽상훈, 하상훈, 최진하, 김종원, 대회위원장 김영섭, 부대회위원장 유창호, 안인애, 양제박 등이었다.123) 28일에 발표된 단체에는 인천체육협회, 전재민동맹, 대한독립해상노동총연맹 등이 새로 추가되었다.124)

우익단체에서는 11시부터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열었는데, 1만 5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대회장 김영섭 목사가 3.1 운동 당시로 돌아가 독립의 새로운 열쇠를 찾자는 개회사를 하였고, 최진하의 기념문낭독, 하상훈의 대회선언문 낭독, 이중찬의 4개국에 보내는 결의문 낭독 등을 한 후에 정해궁의 폐회 선언 등으로 끝났다.125) 준비위원장인 정해궁은 3.1 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하여 해방의 씨를 뿌린 것이니, 올해 해방의 씨를 고이고이 육성하여 해방의 열매를 거두자고 호소하였다. 1947년 인천 우익의 3.1절 행사는 한민당과 독촉 인천 지부와 내리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좌파 행사보다는 거의 배가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3. 좌익들의 총파업과 지도부 검거

3.1절 행사가 끝난 직후에 남로당의 파업 투쟁이 이어졌다. 1947년 1월 12일 인천에서 민전 산하의 남로당이 조직되었다.126) 이때 이보운은 남로당 인천 지부 위원장, 박남칠은 부위원장, 윤석준은 선전부장 등 임원으로 선출되었다.127) 남로당 인천 지부가 조직된 후에 3월 중순에 파업에 대한 선동 삐라가 뿌려졌고, 3월 22일에는 24시간 총파업이 일어났다. 제주도에서 3.1절 시위에서 발포 사건이 발생하고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 총파업에 참여하라고 선동하는 삐라가 인천의 관공청과 상가에 뿌려졌다. 이에 대해 우익의 총본영인 대한독립전취 인천최고위원단은 이러한 선동에 현혹되지 말고 시민들은 자중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삐라가 뿌려진 후에 검거에 나선 경찰은 17일에 남로당 인천시위원회 간부급 3명인 위원장 이보운, 부위원장 박남칠, 선전부장 윤석준을 구속하였고, 18일에 김용규를 검거하였다.128)

그리고 1947년 3월 22일 인천의 좌익세력들은 남로당의 지도부가 검거된 상태에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인천은 전평 산하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철도 관련 노동자, 부평 조평창 노동자들이 24시간 파업을 하였으며 학교도 일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129) 이 파업이 진행되던 3월 23일 밤 10시에 구속된 이보운, 박남칠, 김용규 등은 유치장에서 다른 구속자들과 함께 적기가를 부르며 구속에 항의하였다.130) 이 파업은 24일에 종료되었는데, 인천 경찰서는 이 파업의 주동자들의 검거에 나서 3월 26일까지 157명을 검거하여 취조 중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의사이면서 민혁당131) 인천 부지부장인 남기목, 의사이며 과학자연맹 민전 인천 지부 간부인 김창식, 인민원호회 인천 지부장인 장완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32) 이들 가운데 무허가 집회를 이유로 체포되었던 민혁당 인천 지부장 김용규, 부지부장 남기목 박사, 운동본부장 한동석 등은 5월 9일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133) 이보운이 7월 27일에 민전 의장인 남기목과 함께 미소공위 재개를 경축하는 행사를 주최하는 것으로 볼 때, 그도 이 무렵에 석방된 것으로 보인다.134) 그러나 이보운은 다시 9월 6일에 체포되었다.135) 박남칠과 김창식은 검찰이 3개월씩 구형했지만, 9월 23일 무죄판결로 석방되었다.136) 이후에도 인천에서 좌익세력에 대한 검거가 계속되어 11월 17일에 권충일, 주민갑, 김영석, 김기양 등 30여 명이 체포되었다.137)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공세적 압박전술”과 선제적 공격이 가능한 우익에 대한 “정당방위의 자위전술”이라는 신전술을 채택하였고,138) 이 신전술에 따라 남로당 인천 지부가 1947년 3월에 일으킨 파업 사건 이후에 좌익 지도자들이 자주 체포되고 대중 조직과의 연계성이 약화되어 좌익은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활동 영역도 축소되었다.


VI.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와 우익세력의 참가

1947년 5월 21일에 열린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에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유엔은 10월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되어 총선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였다.

유엔임시위원단이 서울을 중심으로 의견을 청취했는데, 인천의 대한독립전취 인천최고위원단은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곽상훈, 전두영, 정해궁 3인을 서울로 파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위원단에 제출하였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선거와 남북통일정부를 희망하나, 소련이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는 현하의 정세로는 남북통일총선거는 불가능하므로 부득이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전제로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총선거를 급속히 실시하여 우리의 최고 목표인 독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9)

이와 같이 한민당과 독촉국민회 인천 지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들은 총선거 실시를 주장하여 5월 10일 총선거에 임하였다. 인천에 갑과 을의 두 개 선거구가 있었는데, 한민당은 갑구에 양제박과 을구에 하상훈을 공천하였다. 한민당에서 갑구를 희망했던 곽상훈은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갑구에 출마하였다. 을구에 출마한 김석기는 1945년 10월 부평이 인천에 편입될 때, 미군정에 의해 부평지구장에 임명되었고 독촉국민회 부평지부장으로 독촉의 공천으로 출마하였다. 조봉암은 자주독립론과 민족통일론을 내세우며 을구에 출마했는데, 을구는 소시민층이 많은 지역이었으며, 민족청년단의 후원을 받았다.140) 이 선거에 유일한 여성 후보자는 독촉애국부인회의 후보로 나선 이순희였다.141) 갑구에서는 7명이 출마한 가운데 곽상훈이 과반을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을구에서는 조봉암과 김석기가 각축하다가 조봉암이 당선되었다. 인천의 5.10 총선에서는 인천 내리교회 출신인 하상훈과 이순애가 출마하였고, 우익의 중심인물이었던 곽상훈과 양제박 등이 출마하여 이승만의 총선을 통한 국가 수립 활동에 동참하였다.


VII. 나가는 말

인천에서는 해방 후에 좌익이 먼저 조직한 보안대와 건준, 인민위원회 등을 조직하는데 주역은 조봉암과 함께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내리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자 미곡상들이었다. 좌익들이 먼저 조직을 만들어가자 우익에서는 내리교회 담임목사인 김영섭을 중심으로 그 교회 신자들인 최진하, 정해궁, 하상훈과 이범진 등이 국민회와 한민당 인천 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2월에 열린 임시정부 환영대회와 반탁대회 선언문 작성 등에서 의견이 충돌하였다. 1946년 2월에 민전 인천 지부와 독촉 인천 지부와 애국부인회 인천 지부가 조직되었고, 탁치를 둘러싼 좌우의 충돌이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3.1절 기념행사는 함께 진행하였다.

그 후에 조봉암은 5월 7일에 박헌영을 비판하는 그의 편지가 신문들에 공개되자 15일 민전 의장직을 사임하고 6월 23일에는 공산주의를 떠나는 전향서를 발표하였다. 독촉국민회의 인천 지부와 한민당 지부를 중심으로 인천의 우파들은 5월 19일에 이승만을 초청한 가운데 독립전취 인천대회를 열었고 정해궁의 주도로 청년 조직 강화 필요성에 따라 7월에 평안청년회를 조직하고 12월에는 서북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946년의 8.15 행사는 준비위원회까지 같이 구성했지만 단일 행사를 치르지 못하였다. 갈등은 더욱 심해서 47년 3.1운동 기념 사업은 처음부터 각 단체들이 따로 준비하여 행사를 치렀다. 이렇게 좌우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인천의 남로당과 민전 등이 중심이 된 좌익이 제주도 파업에 동조하는 삐라를 살포하며 3월 22일에 총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 사태로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 좌익의 중심인물들이 검거되면서 이들의 세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우파세력들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난 뒤에 한국 문제가 유엔총회로 넘어가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여 총선을 실시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선거 과정에 내리교회 출신은 하상훈과 이순애가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인천 갑구에서는 한민당 출신이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곽상훈이, 을구에서는 공산당에서 전향하여 선거에 참여한 조봉암이 선출되었다.

내리교회 교인들은 한민당과 독촉 인천 지부에서 우파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독촉에서는 정해궁과 최진하가, 한민당에서는 하상훈, 이범진, 서병훈 등이 중심인물들이었다. 좌익에서 인민위원회, 민전, 남로당에서 중심인물들은 역시 내리교인이었던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이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인천 공산주의의 중심인물이었던 조봉암은 이탈하였고, 이승엽은 중앙 조직으로 들어간 후에 인천의 좌파 세력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던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등이 좌파 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해방 공간에서 같은 교회 출신이면서도 서로 다른 정치 노선에 따라 각자의 노선을 추구하였다. 좌파는 건준 후에 선포된 인민공화국이 한국사회에서 수용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우파들은 이승만이 주장하는 총선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관이었던 민주공화국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여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인천 내리교인들 가운데 중간파 내지는 좌우합작에 참여한 사람들을 발굴하지 못해 논의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Notes
1) 해방공간에서 수행된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의 활동을 정부 수립이라고 명명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 수립이라고 할 것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미 임시정부에서 국가가 수립되었고, 그 국가를 구현하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 헌법이 정한 민주공화국을 세울 것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민공화국을 세울 것인지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웠고, 민주공화국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그러므로 해방공간에서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치활동은 정부가 아닌 국가를 세우려고 한 건국투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된다(박명수,『건국투쟁: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서울: 백년동안, 2015).
4) 해방 후 인천지역에 관해 전재민과 박남칠 그리고 월남민에 대한 다음 연구들이 있다. 이현주, “해방과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인천,”『황해문화』제25호 (1999): 47-65; 이현주, “해방 직후 인천의 귀환 戰災同胞 구호활동:《대중일보》기사를 중심으로,”『한국 근현대사 연구』제29집 (2004): 35-59; 이현주, “해방 후 인천지역의 戰災同胞 귀환과 사회변화,”『인천학연구』4 (2005): 245-79; 이갑영, “해방직후 인천노동운동의 성격,”『인천학연구』5 (2006): 123-57; 해방 후 인천지역에 대한 연구는 이성진, “해방기 인천 좌익운동가 박남칠 자료 연구,”『인천학연구』7 (2007): 293-327; 이세영, “해방 ~ 한국전쟁기 인천 지역 월남민의 정착과 네트워크 형성,”『동방학지』제180권 (2017): 177-211.
6) 영화학교 학우회 임원 명단은 회장 이범진, 총무 김원규, 간사 김용규, 윤대석, 이창의, 갈홍기, 엄영섭, 임영균, 이길용, 평의원 임형상, 임정호, 강정희, 문장백, 차태열, 이동오, 이보운이다(“영화학교졸업생학우총회,” 〈동아일보〉 1924년 5월 15일자).
8) Ibid., 173.
9) 김영섭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3년간 유학한 뒤 인천지방에서 전도사로 잠시 활동하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14년부터 동경의 아오야마학원에서 1918년 6월까지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내리교회에서 사역하였다.
12) 이성진, “독립운동가 홍호,” 〈인천뉴스〉 2018년 10월 1일자.
14) Ibid.
15) 〈동아일보〉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제1대 지국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기자는 이범진과 박충희였다.
16) 인천물산객주조합은 인천신상협회까지 기원이 올라가며, 일제 강점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들 기관은 조선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민족계 단체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18) 〈동아일보〉 1927년 5월 11일자.
19) 〈동아일보〉 1927년 6월 9일자.
20) 〈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자.
21) 〈동아일보〉 1931년 2월 14일자.
24) 김용규는 강화출신으로 인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만석동 부두에서 객주를 운영하다 성공하여 강화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26) 권충일은 배재고보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과 해삼위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 3일자).
28) 〈동아일보〉 1924년 3월 22일자. 신흥우는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미국의 남가주대학에유학하여 1911년에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1920년 이상재의 뒤를 이어 YM CA의 총무가 되었으며, 개인구원 문제보다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사회구원을 추구하였다(김권정, “1920-30년대 신흥우의 기독교 민족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21권 (1999), 145).
29) 〈중외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이대위는 신성중학교에 다니다가 105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탈출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921년 3월경에 귀국하여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이후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사회주의에 대처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협력과 기독교 청년의 사회적 책임을 통한 기독교적 사회개조를 주장하는 기독교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김권정, “1920-30년대 이대위의 기독교 사회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57권 (2008): 99-100).
30) 〈조선중앙일보〉 1933년 5월 11일자; 1935년 10월 28일자.
31) 여운형은 1910년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1920년 1월에 소련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며 상해에 파견된 국제공산당 극동부장 보이친스키의 권고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이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에 함께 연계되어 활동했으며 1929-32년까지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 1933년에 〈조선중앙일보〉 를 창간하여 언론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모아 지국을 설치하고 대중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전재호, “여운형의 정치이념,”『현대정치연구』제6권 제1호(2013): 91).
34) 최태욱은 1930년대 인천 지역의 사상적인 흐름을 공산주의자인 이승엽과 조봉암, 기독교사회주의자인 김용규, 박남칠, 이보운, 우파인 곽상훈, 하상훈, 이범진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최태욱, “통일이후 한반도 신학 모색을 읽고,” 감리교신학대학교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통일 이후 신학 연구』4권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2), 194).
36) 박남칠과 이승엽은 인천 창영초등학교 동문이었고 김용규와 조봉암은 강화출신으로 어릴 때 같이 신앙생활을 하였다.
41) 조선인민원호회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전재동포 구제를 위해 설치했던 후생부의 업무를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에 인계받은 조직으로 좌익적 성향이 강했다(이현주, “해방 직후 인천의 귀환 戰災同胞 구호활동: ≪대중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43).
42) 차태열은 조상길, 장광순 등과 함께 인천의 부호였다.
43) 〈대중일보〉 1945년 10월 11일자. 이 당시 임원들 가운데 정우와 서병훈은 내리교회 교인들이었다.
44) 〈대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45) 미상조합은 8.15 이후 해산하였다가 동조합 간부인 박남칠과 수인의 활약으로 동 미상조합을 부활하여 1945년 11월 14일에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6일자.
46) 〈대중일보〉 1945년 11월 8일자.
48) 〈대중일보〉 1945년 11월 12일자.
49) 미군정은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이 인민공화국에 대해 국가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당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맞서 중앙인민위원회는 11월 20-22일에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열고 ‘인공절대 사수’와 ‘인민위의 조직 강화’를 결정하였다(정현석, “지방 인민위원회에 대한 사적 고찰,”『숙대학고』28 (1990): 191).
50) 〈자유신문〉 1945년 10월 20일자.
51) 김영섭 목사는 1943년 10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통리: 정춘수)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영화학교 교사 벽과 내리교회 벽에는 내선일체나 종교보국이라는 일제 전시구호를 붙였으며, 예배시간에는 ‘황국신민서사’를 복창하고 나서 예배를 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였다.
52) 〈자유신문〉 1945년 11월 21일자.
53)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미군정기의 인천자료』, 9.
58) 〈대중일보〉 1945년 10월 8일자.
59) 〈매일신보〉 1945년 9월 22일자.
60) 〈매일신보〉 1945년 9월 27일자, 1945년 9월 30일자.
62) 〈대중일보〉 1945년 12월 23일자.
64) 〈대중일보〉 1945년 10월 7일자.
65) 이후 동장들은 10월 10일에 인천부가 제물포시청으로 새로 출발하면서 정회장 연맹을 결성하고자 했다( 〈대중일보〉 1945년 10월 13일자).
66) 〈인천일보〉 2011년 6월 1일자.
69) 〈대중일보〉 1945년 11월 3일자. 대중일보는 이들 가운데 7명은 일제 치하에서 다년간 공직생활을 한 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미군정이 시장이 인선한 몇 사람을 빼고 선임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71) 〈대중일보〉 1945년 10월 20일자.
72) 경찰서장 김윤복, 서장 대리 겸 교양주임 박한춘, 경무주임 이창우, 보안주임 이근춘, 사법주임 강원규, 정보주임 김장흥, 외무주임 이조욱, 경비주임 강종구( 〈대중일보〉 1945년 11월 18일자).
74) 〈대중일보〉 1945년 10월 27일자.
76) 〈대중일보〉 1945년 12월 3일자. 인천시인민위원회에서는 11월 6일에 정인민위원회를 결성하도록 독려하였고( 〈대중일보〉 1945년 11월 11일자.), 이러한 과정에서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정회장 세력이 형성되어 이러한 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77) 〈동아일보〉 1945년 12월 5일자.
78) 〈대중일보〉 1945년 12월 31일자.
79) 〈대중일보〉 1946년 1월 1일자.
80) 〈대중일보〉 1946년 1월 4일자.
82) 〈대중일보〉 1946년 1월 10일자.
83) 〈대중일보〉 1946년 1월 18일자.
84) 〈대중일보〉 1946년 2월 2일자.
86) 〈대중일보〉 1946년 2월 11일자.
87) 신태범은 의사로서 죽산 조봉암을 치료하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민전에서 부의장이 되었으나, 죽산과 자신의 사상이 달랐다고 말하고, 한 달 뒤에 사표를 냈다(“의학박사 ‘한옹 신태범’,” 〈경인일보〉 2006년 7월 13일자).
92) 〈대중일보〉 1946년 2월 19일자.
93) 인천의 인민당 지부는 1945년 11월 12일 서울 창당대회에 참가한 인천 당원들이 11월 29일에 발기인대회를 가지고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 1945년 11월 29일자).
94) 〈대중일보〉 1946년 2월 22일자.
96) 〈대중일보〉 1946년 6월 20일자.
97) 〈대중일보〉 1946년 6월 29일자.
100) 〈대중일보〉 1946년 5월 14일자.
101) 〈대중일보〉 1946년 5월 16일자. 이들 외에도 총무부 박용돈, 기획부 정욱현, 원경희, 재무부 양제박, 이명호, 최두호 등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102) 〈대중일보〉 1946년 5월 20일자.
104) 정해궁은 중학생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유랑 생활 끝에 변사생활을 통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 1946년 2월 10일에 조직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천 지부 조직에 참여하여 지부장인 최진하에 이어 부지부장이 되었다(김영일,『격동기의 인천』, 348).
105) 〈대중일보〉 1946년 8월 2일자.
107) 〈동아일보〉 1946년 9월 3일자.
108) 〈대중일보〉 1946년 9월 3일자.
109) 〈대중일보〉 1946년 12월 17일자.
112) 〈대중일보〉 1946년 8월 1일자.
113) 〈대중일보〉 1946년 8월 3일자.
114) 인천 노동조합평의회에 소속되었던 좌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대중일보〉 1945년 11월 9일자.
115) 〈대중일보〉 1946년 8월 7일자.
116) 〈대중일보〉 1946년 8월 13일자.
117) 〈대중일보〉 1946년 8년 10일자, 11일자, 12일자.
118) 〈대중일보〉 1946년 8월 15일자. 5월 15일 조봉암의 사퇴로 공석으로 있던 민전회장직은그 이후에 김용규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119) 〈대중일보〉 1947년 2월 14일자.
120) 〈대중일보〉 1947년 2월 28일자.
121) 〈자유신문〉 1947년 3월 3일자.
122) 〈대중일보〉 1947년 2월 15일자.
123) 〈대중일보〉 1947년 2월 16일자.
124) 〈대중일보〉 1947년 2월 28일자.
125) 〈대중일보〉 1947년 3월 3일자.
126) 〈대중일보〉 1947년 1월 14일자; 〈자유신문〉 1947년 1월 22일자.
128) 〈대중일보〉 1947년 3월 19일자; 3월 20일자. 〈서울신문〉 3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용규는 인천시인민위원장, 박남칠은 민전인천지부장이다.
129) 〈대중일보〉 1947년 3월 23일자.
130) 〈대중일보〉 1947년 3월 25일자.
131) 김원봉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을 때, 남기목은 민혁당 인천지부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으로 김용규, 부위원장 남기목, 간부로 김석영, 정인옥, 한동진 등을 선출하였다(이성진, “화수동 건달 악어 정인옥,” 〈인천뉴스〉 2018년 11월 11일자).
132) 〈서울신문〉 1947년 3월 27일자.
133) 〈자유신문〉 1947년 5월 11일자.
134) 〈자유신문〉 1947년 7월 29일자.
135) 〈대중일보〉 1947년 9월 9일자.
136) 〈대중일보〉 1947년 9월 25일자.
137) 〈동아일보〉 1947년 11월 22일자.
139) 〈동아일보〉 1948년 2월 6일자.
141) 이순희 독촉애국부인회 인천지부장은 남존여비 타파, 탁아소 창설, 여성교육기관 확충 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공약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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