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8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8, No. 0, pp.331-364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19
Received 27 Mar 2019 Revised 05 May 2019 Accepted 13 May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6.48.331

이천석 목사의 포용적 성령운동:칼빈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윤은석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교회사 (startag222@hanmail.net)

Rev. Cheon-seok Lee’s Inclusive Holy Spirit Movement: Calvinism, Wesleyan Holiness Movement and Pentecostalism
Yun, Enseok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1970-80년대 이천석 목사의 성령운동을 초교파적 체험, 이해, 사역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이천석은 장로교 목회자였다. 하지만 그가 체험한 성령은 장로교를 넘어 오순절운동의 요소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요소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그의 이해와 사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에게 방언의 표현과 죄성 제거, 능력과 유사한 표현이 성령과 관련하여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역에서 이러한 표현은 현실화되었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그의 성령운동을 포용적이라고 묘사하였다.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이천석의 설교집, 전기, 그의 아내의 전기는 그를 연구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이천석의 저작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문인〈기독신보〉,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 등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이천석의 포용적 성령운동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look at the Holy Spirit Movement of Reverend Cheon-seok Lee in the 1970s and 1980s in terms of interdenominational experience, understanding and ministry. Cheonseok Lee was an Presbyterian pastor. However, the Holy Spirit, which he experienced, went beyond the Presbyterian Church to include the elements of Pentecostalism and Wesleyan Holiness Movement. His experience was equally visible in his understanding and ministry. To him, expressions of speaking in tongues, and expressions similar to eradicating sinful nature, Power, etc. were found in connection with the Holy Spirit. And in his ministry, this expression became a reality. So the researcher described his Holy Spirit Movement as inclusive.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look at the Holy Spirit Movement of Reverend Cheon-seok Lee in the 1970s and 1980s in terms of interdenominational experience, understanding and ministry. Cheonseok Lee was an Presbyterian pastor. However, the Holy Spirit, which he experienced, went beyond the Presbyterian Church to include the elements of Pentecostalism and Wesleyan Holiness Movement. His experience was equally visible in his understanding and ministry. To him, expressions of speaking in tongues, and expressions similar to eradicating sinful nature, Power, etc. were found in connection with the Holy Spirit. And in his ministry, this expression became a reality. So the researcher described his Holy Spirit Movement as inclusive.

The methodology of this study is literature research. Cheon-seok Lee’s sermon book, biography and his wife’s biography are the most basic and important materials to study him. Based on the works of Cheon-seok Lee, we look at The Christian Times, Christian newspaper and others’ autobiographies. Through this, this study will present Cheon-seok Lee’s inclusive Holy Spirit Movement.The methodology of this study is literature research. Cheon-seok Lee’s sermon book, biography and his wife’s biography are the most basic and important materials to study him. Based on the works of Cheon-seok Lee, we look at The Christian Times, Christian newspaper and others’ autobiographies. Through this, this study will present Cheon-seok Lee’s inclusive Holy Spirit Movement.


Keywords: Cheon-Seok Lee, Inclusive Holy Spirit Movement, Calvinism, Wesleyan Holiness Movement, Pentecostalism
키워드: 이천석, 포괄적 성령운동, 칼빈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I.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지 1900년가량 후, 1907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는 겨울의 추위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평양대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에는 많은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성령의 임재는 개인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소생시키며, 다수의 불신자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하는 마중물이 되며, 사회에 빛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과 한국교회에 드러난 성령의 역사는 시대만 달랐을 뿐, 그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이 같을지라도, 이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개인들의 다양한 삶의 배경과 성령 체험의 상황과 인식의 차이는 여러 성령 이해를 양산해 내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성령세례에 대한 관점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오성욱은 도널드 데이턴(Donald W. Dayton)에 의지하여 19세기 부흥운동의 성령 이해의 5가지 주요 흐름을 소개하였다.

요약하자면, 오순절 성령세례를 강조하며 19세기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담론은, 성결과 능력을 동일시했던, ‘주류 성결파의 가르침’, ‘두 개의 구별된 성령의 역사로 분리’해서 세 가지의 축복을 강조한 오순절 경향의 성결파, 그리고 성령세례를 ‘봉사를 위한 능력받음’으로 해석하는 개혁신학적 부흥운동 전통의 해석,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개혁신학적 부흥운동의 중간에 위한[sic] 케직 운동, 그리고 케직 운동의 ‘고위한 삶’[sic] 신학의 입장에서 기독론적 사중복음을 전개한 심슨과 고든의 부흥운동으로 다양화되었다.1)

이러한 성령 이해의 다양성은 한국교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여파로 성령세례를 중생 이후의 이차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던 초기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령 이해는 해방 이후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장로교 그룹, 성결교 그룹, 오순절운동의 성령운동으로 보다 분명해졌다. 오순절운동의 입장은 성령세례를 방언, 예언, 이적 등의 능력과 연관시켜서 전도와 교회성장의 도구로 이해하는 것이다. 특별히 오순절운동은 성령세례의 첫 번째 증거로 방언을 제시하였다. 반면 성결교 그룹은 성령세례를 통해 죄성의 제거와 온전한 성결을 이루는 것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성령세례는 아담에게 유전된 죄성을 제거하여 신자의 온전한 성결로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장로교 그룹은 성령세례와 방언을 연결시키는 것을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안에는 성령 이해에 대한 두 흐름이 있었다. 박형룡을 비롯한 전통 개혁주의의 입장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였다. 회심과 성령세례의 이중 구조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인한과 차영배 등의 근대 개혁주의 성령운동의 입장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였다.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오는 개별적인 사건인지 여부에 따라 장로교 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것이다.2)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장로교의 이천석 목사는 성령을 체험했고, 신학을 공부하였고, 성령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령운동은 전국적으로 왕성하여 이천석은 1979년까지 10년 동안 500개 이상의 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할 정도였다.3) 지인인 김세창에 의하면, 이천석은 “365일 계속하여 부흥회를 인도”하였다.4) 자신이 설립한 한얼산기도원을 통해서도 많게는 수만 명에게 부흥회를 하였으니 당시 이천석의 부흥 목사로서의 활동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5) 그래서 전재동 목사는 성령론을 성서적, 교회사적으로 고찰하며 1970년대 한국교회의 주요 부흥사로 조용기, 신현균, 이천석, 이호문을 꼽았던 것이다.6)

그렇다면 이천석의 성령운동은 해방 이후 다양해진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에서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하게 이해하는 전통적인 장로교에 충실한 부흥사였을까? 아니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계승한 부흥사였을까? 아니면 그에게 오순절운동과 성결교회의 입장도 나타났을까? 연구자가 자료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의 성령운동에는 장로교로 대변되는 칼빈주의, 성결교로 대변되는 웨슬리안 성결운동, 순복음교회로 대변되는 오순절운동의 요소가 모두 내재되었다. 그리하여 본 연구는 1970-80년대에 한국교회의 주요 부흥 목사였던 이천석의 성령운동을 “포용적”이라고 묘사하며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천석 목사를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기도원 운동을 연구하면서 한얼산기도원을 조금 언급한 연구 정도가 전부이다.7) 동시대 인물인 조용기 목사에 대한 연구의 방대함에 비하면, 이천석은 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 연구는 이천석과 성령에 대해 집중할 것이다. 그가 체험한 성령, 그의 성령 이해, 그의 성령 사역이 여기서 주로 다룰 내용들이다. 그의 체험과 이해와 사역은 상당 부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현재 그가 쓴 설교집 2권과 요약설교집 1권, 그의 자서전 2권, 그리고 그의 아내가 쓴 전기가 1권이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간혹 나온다. 당시 장로교 합동 측의 기관지인〈기독신보〉에도 이천석의 성령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수집하여 이천석과 성령운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II. 방황의 끝에서 만난 성령

이천석은 1929년 6월 20일에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인 그의 장대한 기골은 동네에서 대장 노릇을 하기에 적합하였고, 그러한 리더로서 살아온 그의 유아 시절과 어릴 적 관찰했던 일본 헌병의 모습은 그로 자연스럽게 군인을 동경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대장 가와모도를 알게 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그의 일본 유학을 위한 중요한 접촉점이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후꾸다(福山)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이후 홍천에 머물며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이후 변씨의 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과거 군인에 대한 동경은 국방 경비대를 지원하게 만들었다.8)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여 그도 전쟁에 참여하였다.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목전에 바라보던 찰나 중공군의 개입은 전황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1951년 4월, 어느 밤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는 부하들과 함께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다가 불빛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총탄은 그의 한쪽 발목에 부상을 입혔고, 5일 동안 방치된 탓에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장애인이 된 그는 절망 속에 수면제 50알을 먹으며, 4층에서 뛰어 내리며, 면도칼로 할복을 시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살아났다. 결국 그는 자살을 포기하고 상이군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9)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지만, 사회는 상이군인들에게 온정적이지 못했다. 이천석은 이러한 세상에 분노를 느끼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은 상이군인들은 같은 처지에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이천석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일종의 폭력 단체를 이루었고, 패싸움을 했고, 식당에서 무전취식했고, 미군과 싸움을 벌였고,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심지어 정치 깡패인 이정재에게까지 30만 환을 받아냈다. 이천석의 목숨에 일천만 환의 현상금이 걸릴 정도였으니 당시 그의 행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0) 그가 정치 폭력배인 임화수와 유지광 밑에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그의 방황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11)

그러던 그가 개신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성봉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이천석은 서울 경찰의 요청에 의해 한강에서 열리는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방해하고자 상이군인들을 데리고 출동했다가 이성봉의 설교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성봉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12) 이후 그의 아내가 두통을 호소하며 병석에 눕게 되었다. 3개월간 병세는 지속되었지만, 병원에서는 병명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무당을 불러서 굿도 해보았고, 절간에 가서 빌어보았지만 아내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할머니는 개신교의 기도를 제안하였고, 순간 그는 잊고 있던 이성봉 목사를 기억하였다. 그리고 그 할머니와 10여 명의 교인들은 매일 밤마다 이천석의 집에 찾아와서 기도해주었고, 아내는 증세의 완화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의 조언에 따라 이천석은 아내를 삼각산기도원에 보냈다. 이천석은 기도원 작정 기간인 10일이 지나기도 전, 9일째 되는 날에 삼각산기도원에 방문하였다. 그때 발견한 것은 병이 나은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천석이 준비한 장례비는 그날 부흥회에 천막 헌금으로 드려졌다.13) 아내가 삼각산기도원에 갔을 때, 그는 자녀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14)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천석이 성령을 경험하게 된 것은 1959년 10월 24일이었다. 그는 삼각산기도원의 부흥회에 참여했다가 성령을 체험하였고, 동시에 방언을 하게 되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날 아내가 느닷없이 이야기해왔다. ... 5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아이들은 양어머니에게 맡겼다. ... 아내가 이끌어 간 곳은 엉뚱하게도 삼각산기도원이었다. ... 삼각산 제일 기도원엔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따라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찬송 소리 박수 소리! 북소리! 통곡 소리! 그는 시끄러움을 느꼈다. ... 예배가 끝나자 아내에게 하산할 뜻을 말했다. 아내는 하루만 참아보라고 애걸했다. ... 아내의 말을 듣고, 저녁 집회에 참석했다. ...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지붕이 뚫려지며 새빨간 불덩어리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 갑자기 온몸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졌고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풀썩 앞으로 쓰러지며 외쳐 대었다. “하나님! 나도 죄인입니다. 이 천석이도 죄인입니다.” ... 그는 가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배당 마룻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소리 질렀다. ... 한참을 그는 뒹굴면서 울었다. 갑자기 그는 혀가 빨라짐을 느꼈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혀는 총알처럼 마구 움직였다. 그는 방언을 하고 있었다.15)

당시 이천석의 아내는 그의 방언을 은혜 체험 후 3일째 목격하였다.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나는 남편을 주님 곁으로 불러주신 데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남편이 회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의 기도에 방언이 터져 나왔고 남편의 입에서도 방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16) 아내는 이천석의 성령 체험 첫째 날에 그가 회개하는 광경에 놀란 나머지 입에서 나오는 방언기도는 미처 듣지 못했을 수 있다.

이천석이 성령 체험을 통해 경험한 것은 단순히 방언만은 아니었다. 그의 성령 체험은 성결한 삶으로의 여정을 예비하였다. 그는 늘 찬송과 기도를 부르며 욕을 멀리하였다. 과거에는 버스에서 행패를 부렸다면, 이제는 차비도 내며 전도를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변화를 대화 거리로 삼을 정도로 그의 변화는 분명했다.17) 그의 아내는 그의 변화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그이는 어쩌면 바보와 같이 되어버렸다. ... 한전 창고에서도 그이는 늘 찬송과 기도를 하였으며 그이는 거의 점심을 굶다시피 생활하여도 아무런 짜증도 불평도 없이 어쩌면 멍한 바보처럼 되어 있었다.”18) 가난으로 인해 한 번은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천석은 아내의 뺨을 때렸고, 아내는 이천석을 밀어 넘어뜨렸다. 다시 이천석이 일어나 칠 것이라 예상했던 아내의 생각과 달리 이천석은 누운 채로 가만히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후 이 둘은 서로 집에서 울면서 회개하였다.19)

성령 체험 이후 그에게 나타난 또 한 가지의 현상은 능력이었다. 그가 용산역에서 탄 전차에는 한 아주머니가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를 업고 있었다. 이천석은 그 광경을 보고 기도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가서 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기도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변의 냉랭한 반응과 함께 기도의 긍정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의 다리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불광동의 한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당시 소아마비 아이를 업고 있던 부인이 나와서 간증을 하였다. 내용인즉, 당시 기도를 받은 후에 집에서 아이의 다리 뼈마디가 뚝뚝 거리며 아이가 아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이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그 부흥회 장소에 나와서 신유의 증거가 되었다. 이후 이천석은 보광동의 한광교회에 출석하면서 안수기도를 하여 8개월 동안 72명의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20) 그의 아내는 이천석의 신유 은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럴 즈음에 남편에게선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 고치는 은사가 남편에게 임한 것이었다. 남편이 기도하기만 하면 병자들이 거뜬거뜬 나아버리는 것이었다.”21)

또한 이천석에게는 타인의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주어졌다. “하나님은 전도사님에게 투시의 능력을 허락해주셨다. ... 사람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마귀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를 알아보았다.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가도 알았다.”22) 아들을 낳기 위해 이천석에게 안수기도를 요청했던 여인에게 “당신의 속에 있는 부적을 먼저 떼어 내시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시오.”라고 말했던 것은 단적인 예였다.23)

그가 전국적인 부흥사가 된 것은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임재 후였다. 이후 그는 40일 금식기도를 하였고, 이후 90일 철야기도를 하던 중 목회자 사명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중앙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68년 7월 17일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 광희동의 4층 건물에서 성복교회를 시작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리 모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기도하고자 삼각산에 올라갔고, 다리 굵기의 소나무를 잡고 기도하였다. 능력을 달라고 구하는 그의 기도는 8시간 후 소나무가 뽑히면서 응답이 왔다. 이후 전국의 교회들의 요청에 의해 부흥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4)


III. 이천석의 포용적 성령 이해: 중생, 성결, 방언, 능력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성령 체험 후에 바로 방언을 하였고, 성결한 삶을 추구하였고, 능력이 나타났다. 이러한 3가지 요소는 그의 성령 이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쉽게 말하면, 그의 성령 이해에는 칼빈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오순절운동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아담의 타락과 원죄의 유전을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죄의 죄성(부패성)은 모든 인간에게 유전되어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인간은 부패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중생을 체험할 수 있다. 칼빈주의나 웨

슬리안 성결운동은 여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죄성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이 세상 안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인 반면에, 칼빈주의에서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25)

그는 큰 틀에서 칼빈주의의 중생 이해를 고수하였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빚어놓고 보시기에 매우 아름다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육체의 생명은 아름다움이 미입니다.”26)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창조 자체의 선함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연구자는 그에게서 아담의 타락과 이로 인한 원죄의 유전을 직접 언급하는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로마서 3장 23절을 인용하며 죄의 회개를 촉구했으나,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원죄라기보다는 자범죄에 가까웠다.27)

그러나 그가 설명한 돼지의 예화에는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나온다. 한 공주는 부왕이 선물로 준 돼지새끼에게 왕관, 귀걸이, 목걸이, 옷 등으로 치장해주고 산보를 나갔다. 그러나 돼지는 더러운 시궁창을 보더니 거기에 들어가서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이를 본 공주가 울자 왕은 꽃사슴의 내장과 돼지의 내장을 바꾸어 주었다. 그러자 돼지는 몸은 돼지이나 마음은 꽃사슴이 되어서 다시는 시궁창에 들어가지 않았다.28) 그는 아담의 타락과 그로 인한 인간의 부패성을 인정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인간 안에 유전된 죄성(부패성)과 유사한 의미의 용어들이 등장했다. “우리에게 양심체라 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양심체에 하나님이 생명을 집어 넣으셨습니다. ... 그런고로 오늘날은 생명이 와서 내 양심체를 선한 데로 끌고 가려 하는데 악마는 악한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29) 이러한 악마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유전된 원죄의 죄성과 같은 의미이다. 더 나아가 그는 로마서 7장 20절의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는 말씀을 언급하며 죄성과 자범죄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였다. “내가 원치 않은 일을 할 때가 있으며 원치 않은 생활을 할 때가 있으며 원치 않은 곳에 갈 때가 있으며 원치 않은 것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30) 그에게서 아담의 원죄의 유전이라는 분명한 표현은 확인할 수 없으나, 죄성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그가 이를 인정하였다고 말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부패성에 사로잡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바로 성령의 임재였다. 성령의 임재는 회개를 촉발시켰다. 그는 회개에 해당하는 단어를 언급하며 이러한 회개는 성령의 불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나 같은 더러운 육의 사람은 깨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의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 이렇게 변화받자면 하나님의 불을 받아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31) 문맥상 이러한 하나님의 불은 성령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임재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 “빛을 발하기”로 표현하였다.32) 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급으로 성령의 임재가 이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성령의 임재를 통한 회개와 거듭남을 중생(重生)이라고 표현하였다.

마음을 찢으란 말은 마음으로 애통하라 마음으로 회개하라 마음으로 자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애통하고 회개하는 심령 위에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진정으로 여호와를 찾으라 하는 말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하는 말은 중생하라는 말입니다. 중생이란 말은 거듭나란 말입니다. 거듭나란 말은 새 사람이 되란 말입니다.33)

여기까지는 칼빈주의의 성령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의 성령 이해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유산으로 보이는 언급도 존재한다.

아브라함에겐 두 아들이 있었읍니다[sic].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두 형제는 싸웠읍니다[sic]. ... 싸우는 집은 불안합니다. 괴롭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상태가 이스마엘과 이삭과 싸우는 형태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을 뽑아내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뽑아내기만 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즐겁게 살 수 있읍니다[sic]. 오늘 이스마엘을 뽑으러 오셨으니 뽑아야 합니다. 네 속에 이스마엘 같은 시기, 질투, 사치, 허영, 고집, 방탕, 음란과 호색, 남을 미워하는 마음 가득히 들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스마엘이 마음에 가득 들어 있으니 뽑아버리고 거기에 성령의 충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34)

이러한 언급에서 이스마엘은 죄성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싸우는 형국은 달비(John N. Darby)에게서 나타나는 두 본성 이론(two nature theory)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비는 아담에게 물려받은 첫 번째 본성에 두 번째 아담으로부터 새 본성을 받는 것이 중생이며, 중생 후에도 두 본성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무디(Dwight L. Moody)였다. 무디 역시 중생 이후에 영육 사이에 갈등이 계속된다고 보았다.35)

그런데 이들과 이천석의 분명한 차이는 이스마엘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한 회개와 성령이다. 그는 회개를 언급하고는 “주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나를 쪼개내면 내 속의 이스마엘은 튀어나옵니다.”라고 하였다.36) 앞서 그는 이스마엘을 제거하고 그 안에 성령으로 채우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성의 제거의 문을 열었다면, 그 완성은 성령이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에게 중생 이후의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는 표현이 있었다. 이것은 그만이 사용하는 용어인 “와장창, 중창, 추장창창”이다. “와장창”은 성령으로 죄의 육체가 깨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활의 변화는 생겼고, 이후 심령이 성경말씀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 “중창”이다. 이후 천국이 믿어지는 것이 “추장창창”이다.37) 즉 최초의 성령의 임재는 중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와장창”이다. 이후의 사건은 말씀을 통한 심령의 변화인 “중창”과 내세적 믿음의 “추장창창”이다. 그런데 “중창”도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사건이었다.

저는 점심도 안 먹고 29일 만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와장창했습니다. ... 세 번째 읽어 가는데 말씀에서 얻어지는 은혜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 네 번째 읽어 가는데 말씀이 가슴에 은혜가 되기 시작하니 살아서 움직여요. ... 가슴에 불덩어리가 쏟아지는데 처음엔 머리를 때리더니 나중엔 가슴을 울려서 그만 중창해버리고 기도를 하는데 내세관이 심령에 확신으로 믿는 기도가 되었습니다.38)

그에게 “와장창”은 삼각산기도원에서의 성령 체험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인용 문장에서 “와장창”은 성경을 1독 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성경을 4독하다가 그는 말씀을 통해 중창을 경험했는데, 이를 “가슴에 불덩어리가 쏟아지는데”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보이며, 중창 역시 성령의 역사로 이해된다. 즉 “와장창”이 중생을 의미하는 성령의 역사라면, 그 이후에 말씀을 읽다가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중창”으로 본 것이다. 그에게 성령의 이중적 역사로 볼 수 있는 표현이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에게는 오순절운동의 유산도 나타났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방언과도 연관지어 이해하였다. 그는 성령을 통해 “와장창”을 경험할 때 방언이 나온다고 이해하였다. “와장창이란 내 육신이 부서지는 소리인데 와장창하는 순간에 방언이 나옵니다.”39) 이것은 그의 체험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그동안 지었던 죄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이때 그의 입에서는 방언기도가 나왔다. 이러한 그의 경험에 기반한 성령세례와 방언 이해는 오순절운동과도 유사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세례의 일차적 증거를 방언으로 이해했다.40) 이천석에게 “와장창”은 첫 번째 성령의 임재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오순절운동의 유산은 바로 성령의 임재를 능력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오순절운동에서 성령세례는 전도와 교회 봉사를 위한 능력과 은사이다.41)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으며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할 수 있고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42) 이천석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그의 언급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속에 모셔보셔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깊은 곳의 비밀을 통달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 생각나는 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모든 환난 속에서 보호받을 수가 있습니다. 막혔던 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43)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비밀을 알며, 지혜가 생기고, 환란에서 보호받고, 막혔던 일들이 풀리는 것이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의 임재는 곧 능력이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영력이라고도 표현하였다. 그는 사명자가 되려면 박력, 영력,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고난의 세례를 통하여 박력이 나옵니다. 성신의 세례를 통하여 영력이 나옵니다.”44) 그리고 이 영력 안에는 마귀를 제압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는 차 세우는 권한을 가진 순경이 차를 세우듯이 “권세 받은 능력 있는 자가” 마귀를 제압할 수 있다고 하였다.45)

그는 성령의 은사들과 그 특징들도 설명하였다. 그는 입신과 환상과 몽상과 예언을 설명하였다. 먼저 입신은 고린도후서 12장 1-2절과 같이 “내 영이 바깥으로 내 몸을 떠나는 상태”라고 하였다.46) 이러한 입신의 상태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사람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리지만, 좀더 깊은 입신의 상태에 들어가면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환상을 볼 수 있었다. 몽상은 은사가 임해야 했다. 그는 이 몽상의 은사를 제일 크게 보았는데, 예언은 하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지만, 몽상은 정확하게 보여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몽상을 해석하는 기준도 물, 짐승, 열매와 관련하여 제시하였다. 예언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사람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7)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이 나타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은사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값없이 병든 자, 길 잃고 방황하는 자, 눌린 자들에게 십자가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쓰임받아야 하며 사랑을 위주로 하고 열매를 충실히 맺”어야 한다고 하였다.48) 실제로 그는 은사를 값없이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가 한얼산기도원을 건축하는 중에 재정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때 한 여인이 국내에서 못 고친 유방암의 문제로 찾아왔는데, 그녀는 재벌의 며느리였다. 이때 그가 기도하자 그 여인은 신유를 경험하였다. 이 여인은 신유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려고 하였으나 이천석은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돌려보냈다.49)


IV. 이천석의 포용적 성령 사역: 방언, 중생, 성결, 능력

이천석이 체험한 성령의 임재는 그의 성령 이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성령 사역을 전개했을까? 그의 체험과 그의 이해는 사역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먼저 그는 성령 중심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한얼산기도원의 부흥회들은 일부〈기독신보〉에 광고가 되었다. 연구자가〈기독신보〉의 광고들을 분석한 결과 그가 설립한 한얼산기도원에서는 매년 반복적으로 주제 중심의 부흥회들이 열렸다. 연초엔 신년축복대성회, 4월엔 오순절산상대성회, 6월 25일 주간엔 6·25구국대성회, 여름엔 여름산상대성회, 추석엔 추석특별산상대성회가 열렸다.50) 특별히 4월에 개최되는 오순절산상대성회의 주제는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였고, 7주간 지속되기도 하였다.51) 즉 매년 4월을 중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는 부흥회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얼산기도원의 부흥회는 성령 충만했던 것 같다. 훗날 목회자가 된 곽희선이 한얼산기도원을 처음 방문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다. “목사님 말씀대로 그곳은 정말 은혜의 동산이었다. 그런 복잡한 틈에도 성령의 역사는 여기저기 뜨거웠다.”52)

그렇다면 그의 부흥회에서는 어떤 성령 사역이 있었을까? 먼저 그는 부흥회가 끝나면 회중들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문용자는 금요일 철야기도를 소망교회 기도팀과 함께 주로 한얼산기도원으로 갔다. 그녀에 따르면, “예배가 끝나면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고 각자 산에 올라가 잣나무를 붙잡고 밤새 기도를 했다.”53) 그리고 종종 이러한 안수기도는 방언과도 연관이 있었다. 정덕환은 장애로 인해 신앙을 잃다가 천마산기도원에서 이천석 목사에게 방언을 위한 안수기도를 받았다.

아내와 나는 천마산기도원을 찾았다. ... 성령으로 충만해 기도하는 모습과 방언을 하거나 병이 보는 데서 낫는 것 등은 내겐 신세계였다. 이천석 목사님이 방언을 받고 싶은 사람은 오후 3시에 오라고 해서 찾아갔다. 목사님이 한 사람씩 안수기도를 해주는데 다른 사람은 바로 방언을 하는데 난 방언이 나오지 않았다. 더 기도하라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내게 오더니 나를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자며 기도해주기 시작했다. 얼마를 기도했을까 드디어 내 입에서도 방언이 터지며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기쁨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54)

정덕환 외에도 이천석 목사의 안수를 받고 방언을 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차범근은 1972년부터 무릎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X레이 사진상에 문제가 없어서 진통제를 맞으며 계속 경기를 뛰다가 1977년 10월 쿠웨이트와의 경기 후에 통증이 악화되어 움직이기도 어렵게 되었다. 다시 검사해보니 무릎뼈 인근에 염증과 이물질이 발견되었다. 이때 그는 이천석 목사로부터 안수를 받아 신유를 경험하였다. 이에 대한 차범근의 말은 다음과 같다. “갑자기 뜨거운 電流[전류]가 全身[전신]을 훑으며 흐르는 가운데 저는 할렐루야를 외쳤고 方言[방언] ... 을 수없이 외고 있었다는군요. 그런데 정말 무릎의 통증이 없어졌어요.”55)

연예인 고은아도 한얼산기도원에서 이천석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다가 방언을 하게 되었다. “당시 원장이던 고 이천석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았다. ‘목사님이 제 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엄청난 지남철이 와서 딱 붙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기도를 하기 시작했지요.’”56)

이천석이 안수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천석과 관련된 곳에서 방언기도를 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이천석이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을 때였다. 그 교회의 여집사 한 명은 남편이 육군상사였는데, 그는 아내가 교회 가는 것을 엄청 핍박하였다. 이 여집사가 이천석의 부흥회에 참여하고 귀가하자 육군상사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방 안으로 끌고 가서 발로 걷어차며 구타하였다. 이때 이 여집사의 입에서 방언이 나왔다. 남편은 미쳤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결국 남편은 아내를 업고 부흥사였던 이천석에게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육군상사는 결국 이천석을 통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57)

어떤 교회에서는 회계 집사가 교회 돈을 같은 교회의 다른 집사에게 빌려주었다. 그러다가 교회는 돈이 필요하게 되어 돈을 찾는 과정에서 두 집사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빌려간 집사가 빌려간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이천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천석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 두 집사는 방언을 하였는데, 방언 통변이 가능했던 이천석이 들으니 둘 다 방언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교회의 문제는 두 집사가 회개하면서 잘 해결될 수 있었다.58)

또 다른 교회에서는 이천석이 부흥회를 인도하며 기도할 때에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일어나 방언을 하였다. 그 방언의 내용은 부모를 찾아달라는 것이었고, 이천석은 내용을 확인한 후 그 부모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 결과 이 부모는 누군가가 길에 내다버린 아이를 지금까지 키워왔음을 실토하였다. 이천석은 부모를 위로하며 친부모를 찾아주라고 권면하였다.59)

이천석의 안수기도가 아니더라도 그가 설립한 한얼산기도원에서 방언기도를 경험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조양현은 한얼산기도원의 이천석의 부흥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부흥회 후에 잣나무 밭으로 가서 잣나무를 부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내 말이 아닌 다른 말로 기도가 나오며 손에 진동이 오기 시작하더니 심하게 말싸움을 할 때 삿대질을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방언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되었고 회개의 기도가 나오기 시작하였다.”60) 이것은 김복철도 마찬가지였다. 이천석이 소천한 후에 한얼산기도원에 갔던 김복철은 정기예배가 끝나고 밤에 산기도하다가 방언기도를 하게 되었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이 혀를 더듬는 말이 계속 나오고 이상한 말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의 방언기도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자연스럽게 방언기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61)

한얼산기도원에서는 다른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도 방언기도의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수민 목사가 한얼산기도원에서 부흥회를 할 때에 나타난 현상들을 그의 아내 이승언이 증언하였는데, 증언에 따르면 수천 명이 모인 부흥회는 성령의 현현의 현장이었다. “병이 낫는 사람, 뒹구는 사람, 쓰러지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에 손이 닿을 때마다 목사님의 손에서 불이 퍽퍽 나갔다. 손이 닿는 사람마다 ‘따따따’ 하며 방언이 터지고 쓰러지고 난리였다. ... 아이들에게 안수하니 아이들도 막 방언이 튀어 나왔다.”62)

이천석의 방언기도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이천석은 1972년 미국 시애틀의 세계기독실업인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주최 측의 요청에 따라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다. 영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방언으로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우렁차게 외국인들 앞에서 방언 대표기도를 하였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서 대회장의 분위기는 조용했는데, 이때 한 외국 여자목사가 일어나서 그의 방언기도를 영어로 통변하기 시작했다. 통변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감동을 표현하였다.63)

그렇다면 이천석의 방언기도 운동은 한국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사실 한국교회에는 방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이미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목도하고자 만주 봉천의 중국인 장로 2명이 내한하였고, 길선주 등 한국 교인들과 함께 기도했는데, 이때 방언기도로 추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64) 1915년 5월 10일에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정윤화가 강화도 장봉도의 옹암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14일 밤에 방언으로 추정되는 현상들과 여러 가지 기적들이 일어났다. 또한 1915년 5월 22일에 정윤화와 유봉진 등의 부흥회가 열렸을 때, 유봉진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65) 이후 1928년 럼지(Mary C. Rumsey)를 시작으로 오순절 계통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방언은 한국교회에서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66)

그러다가 해방 이후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에서 방언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대중화한 것은 오순절운동이었다. 1970년대 조용기 목사가 설립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방언은 많은 교회들에서 대중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67)

그리하여 이미 1969년에는 각 교회마다 방언기도를 하는 무리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 문상희 교수는 1969년 7월부터 1970년 1월까지 서울 인근의 100개 교회를 대상으로 방언 현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한 교회에 평균적으로 10명 정도의 신자가 방언기도를 하였다.68) 또한 1970년대에 들어서면 목회자들의 60% 이상은 방언기도를 적어도 묵인하였다. 복음신학교 학감인 김진환은 200여 명의 목사와 40명의 부흥사를 대상으로 조사하여 “목사들이 부흥사를 선택할 때 38%만이 합리적인 설교를 원하고 나머지는 박수, 방언 등 이상한 짓을 묵인하고 있다.”라고 하였다.69) 묵인한다고 표현한 목회자들은 적어도 방언기도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방언기도가 상당히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1980년대에 방언기도는 상당히 널리 퍼졌던 것 같다. 그리하여서 방언기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들도 진행되었다.70)

이쯤에서 이천석의 방언기도 운동의 영향력을 짐작해 보고자 한다. 그의 부흥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있었다. 이미 1969년에는 방언기도가 대중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비판적인 연구들이 진행될 정도로 널리 확산되었다. 그의 부흥운동 기간에는 방언기도 운동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천석은 분명히 방언기도를 강조하였지만, 그는 방언기도 운동의 확산의 마중물이 아니었고, 영향력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제시할 만큼 기록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이에 여기서는 한국의 기도원 운동을 연구하면서 한얼산기도원도 다룬 박만용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의 영향력을 정리하고자 한다. “한얼산기도원은 이와 같이 특별한 사항은 없지만, 이천석 목사의 방언기도 운동은 한국 기도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71)

이천석의 성령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중생이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그의 부흥회에서는 이전의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홍기가 한얼산기도원에 갔을 때이다. 그는 “조폭을 동경하던 어리고 철없던 시절, 전학과 자퇴의 반복, 싸움질을 일삼던 것들”로 요약되는 모범적인 사람은 아니었다.72) 그러던 그가 한얼산기도원에 가서 산기도하다가 과거를 떠올리며 회개하게 되었고, “이천석 목사님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고백을 쏟아내면 낼수록, 눈물과 콧물이 범벅될 만큼 가슴이 아파왔다. 그때 나오던 콧물의 점도가 어찌나 끈끈한지, 아무리 손으로 훔쳐도 계속 끊어지지 않고 흘렀다.”73) 그리고 그는 금주와 금연을 결단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74)

이천석이 부여에서 부흥회를 할 때에 여기에 참여한 여인은 남편과 시모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남편은 교회 출석을 막으려고 성경과 찬송을 불태우고, 옷과 신발을 숨겼지만, 이 여인은 시부모와 남편을 잘 섬기면서 신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여인은 이천석의 부흥회에 참여하려고 하였고, 남편은 방해하였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 머리카락이 잘렸지만 수건을 쓰고 부흥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남편은 아내의 옷을 다 찢어버렸지만, 이 여인은 이불을 두르고 부흥회에 참석했다. 이 여인은 부흥회 셋째 날 남편에게 장작불로 살이 지져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러자 이 남편은 몽둥이를 들고 교회로 갔고, 이때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고, 아내는 남편을 안고 같이 울었다.75)

어느 한 시골의 교회는 부흥회 때마다 동네 깡패가 와서 술값을 달라고 행패를 부려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천석이 이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 둘째 날에 그 깡패들이 교회로 찾아왔다. 이때 깡패 두목은 거드름을 피우더니 강대상 쪽으로 다가왔다. 이천석은 기도하며 “야! 거기 서 있지 못해!”라고 외쳤고, 그 깡패는 부흥회가 마칠 때까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부흥회 후에 이천석이 깡패 두목에게 안수하자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 깡패들은 다 회개하였다. 깡패 두목은 나중에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었다.76)

이천석이 춘천의 한 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을 때, 양공주가 회개하는 일이 있었다. 춘천의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며 살던 이 여인은 미군 철수로 인해 생계에 문제가 생겼다. 자살을 고민하다가 과거 다니던 주일학교가 생각이 나서 인근의 교회로 찾아갔다. 여기서는 마침 이천석의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고,

이 여인은 성령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77) 이후 이천석의 부흥회에서 한 장로의 망나니 아들이 성령의 은혜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청년이 이천석에게 신앙의 자매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이천석은 과거 양공주였던 이 여인을 소개해주었다. 그 결과 둘은 서로 결혼하였다.78)

그가 설립한 한얼산기도원도 중생의 장소였다. “깡패가 꺼꾸러지기도 했고, 도둑놈이 회개하기도 했”다. “한얼산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간 사람들의 간증만 해도 수백 권의 책이 넘을 것이다.”79) 그의 아내도 한얼산기도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기도원에는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종종 찾아왔다. ... 그들은 옛날 목사님이 예수 믿기 전에 어울렸던 패거리들이었다. ... 이렇게 거친 마음으로 기도원에 올라온 사람들도 기도의 역사로 새 사람이 되어갔다. ... 한번 꼬꾸라져서 회개하기 시작하면 며칠씩 계속되었다. 그들 중에는 옛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주님의 종이 된 사람들도 있다.80)

이러한 이천석과 관련된 집회들에서 나타난 성령의 은혜를 중생을 넘어 죄성 제거의 성결로 이해하는 회중도 있었다. 바로 이수민 목사의 아내인 이승언이다. 이승언은 1976년에 한얼산기도원을 찾았다.81) 이때 그는 그의 성령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붙같이 일어나는 성령을 체험하니 나를 듯 기뻤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기쁨이었다.”82) 많은 사례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집회에서 성결을 의미하는 체험을 한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천석의 성령 사역의 현장에서는 능력으로서의 성령을 체험하는 사례도 있었다. 김손진은 설교에 자신이 없는 전도사로 설교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에 1974년 1월 한얼산기도원에 올라가게 되었다. 평신도로 등록하고 부흥회에 참여했는데, 이천석의 부흥회 중에 그만 졸고 말았다. 그러자 이천석은 충청도에서 올라온 여자가 졸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또 졸자 전도사인 사람이 평신도 명찰을 달고 와서 자고 있다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김손진이 주위를 돌아보자 이천석은 화를 내며 김손진이 입고 있는 의상을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쓰실 일꾼이라고 하면서 다음날부터 찬양 인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부끄러움에 김손진은 그날 밤에 산에 올라가서 양손을 소나무에 묶고 기도하였다.83) 이때 그녀는 “방언으로 부르짖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머릿속에서 우리말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다. ... 통변 은사가 임한 것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폭포수와 같은 말씀을 주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84) 그리고 다음날 김손진이 찬양 인도를 30분 하자 이천석은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쟤가 그래도 배짱은 있어서. 어젯밤에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가더니 졸까봐 양손을 소나무에 묶고 기도했구먼? 하나님 앞에 땡깡을 부리더니, 말씀 은사도 받고, 통역 은사도 받았어. 어, 투시 은사도 받고 내려왔네?”85)

여러 가지 은사주의적인 체험도 나타났다. 오영석이 한얼산기도원에서 찬양 인도를 하였을 때였다. 이천석 목사가 주 강사, 이태희 목사는 오후 강사였는데, “한 번은 준비 찬양을 인도하고 나오는데 집사님 한 분이 ‘당신 손에서 불이 나온다.’고 하면서 보자는 것이었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하니 성령님이 함께하셨던 것이다.”86)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정근자는 한얼산기도원의 부흥회에서 찬양을 하자 진동을 경험했고, 팔이 저절로 움직여지는 체험을 하였다.87)


V. 나가는 말

본 연구는 이천석 목사의 성령운동을 성령 체험, 성령 이해, 성령 사역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먼저 그의 성령 체험을 살펴보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간 삼각산기도원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회개하며 방언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성결한 삶을 추구해 갔고, 여러 가지 능력도 나타났다. 특별히 1968년 광희동에 성복교회를 개척한 후 체험한 성령은 능력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본인이 체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을 이해하였다. 연구자는 그의 성령 이해를 포용적 성령 이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그의 이해 속에는 칼빈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오순절운동의 요소가 내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통한 삶의 변화를 중생이라고 하였으나,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말하는 죄성의 제거를 의미하는 언급도 하였다. 또한 그에게 오순절운동의 요소들도 나타나서 처음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는 “와장창” 때에 방언이 나온다고 하였으며 성령의 임재를 영력, 즉 능력으로 보았다. 입신, 환상, 몽상, 예언의 은사들은 이러한 능력의 예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성령 이해는 교파의 경계를 넘어선 포용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령 사역은 그의 체험과 이해의 부산물이었다. 그가 안수할 때나 그의 부흥회에서 방언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가 설립한 한얼산기도원에서도 방언기도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그의 부흥회나 한얼산기도원의 부흥회를 통해서 세상을 방황하던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바꾼 경우들도 많았다. 이승언의 한얼산기도원에서의 성령 체험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맥을 같이하며, 김손진의 사례는 이천석의 부흥회에서 능력으로서 성령을 받는 중요한 예가 되었다.

본 연구는 한 사람 안에 다양한 성령 이해가 내재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이천석은 본인이 경험한 체험을 중심으로 교파의 이해를 초월하여 성령을 이해하며 사역하였다. 체험과 이해와 사역이 거의 일치하는 이천석이란 인물의 연구는 성령운동을 연구하는 후속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예를 제시할 수 있다. 반면 연구자는 체험과 이해와 사역의 연관성 속에서는 고찰해보았으나, 그 외의 사회관계를 중심으로는 다루지 않았다. 그가 어떤 목회자들과 주로 어울렸으며, 어떤 단체에서 활동했는지는 그의 포용적 이해와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거기까지 다루지는 않았다. 이천석의 오순절운동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88)

연구자는 120명의 신도들이 체험한 오순절 성령의 체험은 오늘날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체험은 개인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복음 전도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고 믿는다. 이 연구가 성령운동의 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을 한국 교계에 알려서 성령 체험을 위해 기도하는 무리들을 일으키는 하나의 촉진제가 되기를 바란다.


Notes
1) 오성욱, “만국성결교회(International Holiness Union, 1897) 전통의 성령세례 이해: 마틴 냅(Martin Wells Knapp)과 윌리엄 갓비(William B. Godbey)를 중심으로,”『영산신학저널』Vol. 35 (2015): 49; 도널드 W. 데이턴,『오순절운동의 신학적 뿌리』조종남 역 (서울: 대학기독교서회, 1993), 91-118. 오성욱은 이 책을 참고하였다. 배정도, “성령세례와 성령은사 논쟁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숭실대학교, 2012). 이 논문에서 오순절운동과 개혁주의의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4) 김세창,『빛을 향하여』(서울: 春秋閣, 1989), 182-83. 김세창은 이천석의 한얼산기도원에서 부흥회를 하기도 했고, 이천석을 자신의 교회에 청해서 부흥회를 하기도 하였다.
5) 이태희,『기적의 순간들』(서울: 책나무출판사, 2016), 35. 당시 한얼산기도원에서 사역을 하던 이태희에 의하면, 당시 기도원은 한두 곳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수천 명, 수만 명이 회집하였다.
6) 全在東,『聖靈論』(서울: 聖書文學史, 1982), 107-108. http://한국시집박물관.org/?page_id=30&uid=911&mod=document (2019년 3월 21일 검색). 전재동은 1934년생으로 1962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트버지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양대학교 문리대 교수와 동은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 전은혜,『하나님이 택한 여인』(충남: 세종출판사, 2011), 110. 전은혜도 “70, 80년대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성복교회 목사님이며 한얼산기도원을 설립하신 고 이천석 목사님이시다.”라고 하며 당시 이천석의 성령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희호,『이희호 자서전 동행』(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135.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동경에서 납치되었을 때, 이천석 목사가 김대중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에게 자신이 본 환상을 말하며 위로하였다. 이때 이희호는 이천석을 “그즈음 부흥강사로 유명한 이천석 목사”라고 표현하였다.
9) Ibid., 208-11.
10) Ibid., 212-15.
12) 강정훈, 김상철,『천한 자와 귀한 자』, 102-108. 이천석에 의하면, 당시 한강에서 열리는 부흥회는 회중의 대소변으로 인해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로 인해 경찰이 직접 해산시키기 어려워서 본인에게 요청했다고 이천석은 기억하고 있다.
15) 강정훈, 김상철,『천한 자와 귀한 자』, 125-28. 신문 및 1차 자료의 기록들은 현대어에 맞게 수정하여 인용하였다.
19) Ibid., 170-72.
22) Ibid., 200.
23) Ibid., 200-201.
25) 박명수,『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부천: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361-69; idem,『근대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20-21, 77-80.
27) 이천석, “나를 찾는 자의 칠대 은총”(로마서 7장 19-24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48-49.
28) 이천석, “흠 없는 몸”(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8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99-100.
29) Ibid., 101.
30) 이천석, “나를 찾는 자의 칠대 은총”(로마서 7장 19-24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46-47.
31) 이천석, “나를 찾으라”(아모스 5장 4절), 『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28.
32) 이천석, “양과 염소”(로마서 8장 1-9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사명따라 일하자』(서울: 元一出版社, 1981), 299-30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육신을 입은 우리가 악한 세대에서 육을 떠나 영으로 생각하다가 영으로 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 영으로 살지 못하면 그 예수님의 뜻대로 우리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idem, “ 빛 된 자녀의 열매”(에베소서 5장 8-14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241: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 빛을 발할 수 있사오니어서 그 성령님을 모셔 드리기 바랍니다.”
33) 이천석, “나를 찾으라”(아모스 5장 4절), 32.
34) 이천석, “나를 찾는 자의 칠대 은총”(로마서 7장 19-24절), 43-44.
36) 이천석, “나를 찾는 자의 칠대 은총”(로마서 7장 19-24절), 44-46.
37) 이천석, “천한 자가 귀한 자로”(마태복음 18장 1-6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62-63; idem, “생각을 바꾸라”(누가복음 19장 1-20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사명따라 일하자』, 106: “악한 인간의 본성은 말씀으로 새롭게 은혜 받으면 심령의 변화가 오고, 성령으로 뜨겁게 받으면 생활의 변화가 오고 은사로 강하게 받으면 인격이 새로워집니다.”; idem, “빛 된 자녀의 열매”(에베소서 5장 8-14절), 248: “그래서 생활 중생이 되려면 성령을 체험하시고 심령이 새로워지려면 말씀에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38) 이천석, “삼단계 중생의 은총”(요한복음 3장 1-8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93-94.
39) Ibid., 90.
42) 이천석, “환란날에 부르짖으라”(시편 27편 7-14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179.
43) 이천석, “빛 된 자녀의 열매”(에베소서 5장 8-14절), 244.
44) 이천석, “천국 영토 개간자가 되자”(출애굽기 3장 1-5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289-90.
45) 이천석, “양과 염소”(로마서 8장 1-9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사명따라 일하자』, 311.
46) 이천석, “일반적 3대 계시”(요엘 2장 28-32절),『이천석 목사 부흥설교집 환란날에 부르짖으라』, 111.
47) Ibid., 116-20.
58) Ibid., 205-206.
59) Ibid., 206.
61) 김복철,『하나님의 뒤를 따르라』(서울: 쿰란출판사, 2005), 176-78. 책머리에 보면 그는 1988년 12월 5일에 음주운전 사고로 뇌를 다쳤다고 나온다. 이후에 한얼산기도원에 갔으니 이천석 사후가 분명하다.
70) “李鍾聲씨 국제神學세미나서 주장 일부敎會 미신적聖靈행위,”〈동아일보〉(1980년 3월 11일), 5.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인 이종성은 1980년 3월 11일에 순복음교육연구소 주최의 국제신학세미나에서 신유나 방언, 투시, 입신 등의 현상을 성경에서 성령에 의한 일들임을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임재를 능력 행함으로만 연결시키는 것에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성령의 힘을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 억지로 전개하는 사람들”은 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聖靈運動이 절실하다,”〈동아일보〉(1982년 1월 14일), 6. 또한 크리스챤아카데미 주관 하에 한국 개신교의 성령운동을 연구한 서광선 전 이화여대 교수는 서울의 10만 명 이상의 성도를 가지고 있는 두 교회의 예배를 참석하여 관찰한 것을 보고하였다. 그는 “성령운동을 병 고치는 일과 방언하는 일로 국한시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江南 새 風俗圖 (18) 교회 [4] 新交 활동으로 敎勢 팽창,”〈경향신문〉(1982년 12월 28일), 6. 강남 지역의 교회들은 신유나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恩賜) 등을 강조하는 재래적인 스타일의 설교 방식으론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배본철, “방언: 한국기독교속의 역사적 개관,”『성경과 신학』Vol. 39 (2006): 96-97. 배본철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내 오순절 교단 외에서도 방언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73) Ibid., 235-36.
74) Ibid., 237-38.
76) Ibid., 186-89.
77) Ibid., 201-203.
78) Ibid., 203-204.
79) Ibid., 200-201.
82) Ibid., 116.
84) Ibid., 131.
85) Ibid.
88) 이천석, “일반적 3대 계시”(요엘 2장 28-32절), 109.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이야기하며 지금은 늦은 비의 시대이니 열매를 맺자고 한다. “늦은 비를 통하여 열매 맺을 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은혜 받은 증거로 가서 형편대로, 생활대로, 믿음대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니 지금은 열매 맺어 영광 돌리는 늦은 비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Joseph W, Williams, Spirit C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25-26, 43-44. 이러한 늦은 비는 오순절에서 익숙한 용어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년도 성복중앙장로교회 창립 52주년 이천석 목사 기념 세미나(5월 26일) 발표 논문임. 박명수 교수의 아낌없는 조언과 지도가 본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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