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8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No. 0, pp.125-158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Mar 2019
Received 11 Jan 2019 Revised 09 Feb 2019 Accepted 18 Feb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3.47.125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와 기독교 공동체 윤리
유경동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peaceground@hanmail.net)

“Your Kingdom Come” in the Lord’s Prayer and Christian Community Ethics
Yoo, Kyoung-dong

초록

한국 사회에 비쳐지는 ‘교회’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의 민족정신이나 6.25 남북 전쟁 이후 구국 운동을 선도하였던 구령 운동, 그리고 민주화 시대 정의와 자유를 외쳤던 교회 공동체 운동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역할의 중요한 요소는 ‘교회의 공교회성’이라고 판단하며 기독교윤리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올바른 신앙고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판단한다.

이 논문은 교회의 ‘공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주목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해석에 관심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이 가장 많이 기독교인들에게 암송되며, 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문임에도 불구하고, ‘개인기도’로 축소되고, 이 기도문 속에서 나타나는 공적 특성이 간과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따라서 이 논문은 크게 세 가지 점에 대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첫째는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공공성의 특징을 학자들을 통하여 개괄하고, 둘째, 오리겐(Origen) 이후 현대의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주기도문 해석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관점을 유형별로 분석하여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셋째,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주기도문을 통한 현대 교회의 공적 사명을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제안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이 논문은 일반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서비평이나 편집비평 또는 역사비평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주요 사상가들의 ‘주기도문 해석’ 가운데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집중하고, 그 개념을 유형화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음을 밝힌다.

Abstract

What is the image of the ‘church’ to the Korean society? How can we recover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under the Japanese colonialism, “the save-the-nation movement” that led Korean Christianity after the Korean War, and “the community movement spirit of the church” that cried out for righteousness and freedom in the democratization period? The writer has assessed that the public duty of the church is the central element of the Christianity’s role in the Korean society, and is the most important theme in the Christian ethics. To this end, the writer has assessed that the theological interpretation and correct confession of faith regarding the “Your Kingdom come” in the Lord’s prayer are urgently needed, more than ever.

The writer focused on the “Your Kingdom come(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in the Lord’s prayer and various interpretations of it by the noted thinkers in the Christian history, in order to manage the ‘public duty’ of the Church. Although, generally, the ‘Lord’s prayer’ is the most recited prayer by the Christians and commonly used in worship.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it gets reduced into ‘personal prayer’ or the public quality in the prayer overlooked. Therefore, this paper will be developed around three points. The first will recapitulate the public qualities that appear in the Lord’s prayer through scholars, second will explain the phrase “Your Kingdom come” in line with the interpretations of the thinkers from Origen to Stanley Hauerwas and analyze their views in categories. And thirdly, through the interpretations, the writer will propose the public duty of the modern church through the Lord’s Prayer from the Christian ethics’ perspective.

For reference, the writer would like to clarify that this paper did not take the approach of the general biblical theology perspectives such as literary criticism, redaction criticism or historical criticism, but focused on the ‘Your Kingdom come’ in the interpretations of Lord’s prayer of the important thinkers in the christian history and categorizing the concept of it.


Keywords: Lord’s Prayer, Your Kingdom Come, Christian Community Ethics, Kingdom of God, Reality of Prayer
키워드: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독교 공동체 윤리, 하나님의 나라, 기도의 실재

I. 들어가는 말

한국 사회에 비쳐지는 ‘교회’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의 민족정신이나 6.25 남북 전쟁 이후 구국 운동을 선도하였던 구령 운동, 그리고 민주화 시대 정의와 자유를 외쳤던 교회 공동체 운동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역할의 중요한 요소는 ‘교회의 공교회성’이라고 판단하며 기독교윤리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올바른 신앙고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판단한다.

이 논문은 교회의 ‘공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주목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해석에 관심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이 가장 많이 기독교인들에게 암송되며, 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문임에도 불구하고, ‘개인기도’로 축소되고, 이 기도문 속에서 나타나는 공적 특성이 간과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따라서 이 논문은 크게 세 가지 점에 대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첫째는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공공성의 특징을 학자들을 통하여 개괄하고, 둘째, 오리겐(Origen) 이후 현대의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주기도문 해석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1)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관점을 유형별로 분석하여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셋째,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주기도문을 통한 현대 교회의 공적 사명을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제안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이 논문은 일반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서비평이나 편집비평, 또는 역사비평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주요 사상가들의 ‘주기도문 해석’ 가운데,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집중하고, 그 개념을 유형화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음을 밝힌다.2) 그동안 주기도문에 대한 논문들이 주로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연구도 그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II. ‘주기도문’과 교회의 공공성

주기도문이 기독교 초기 제자들과 그 공동체의 공공성과 연관되었다고 보는 관점에서 중요한 점들은 주기도문의 종말론적 특성, 예전적 성격, 그리고 공동체 정신이라고 본다.

첫째, 주기도문의 당시 역사적 상황과 연관하여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입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프리 깁슨(Jeffrey Gibson)에 따르면, 주기도문은 예수가 실제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들을 대표하며, 주기도문이 단순히 복음서 저자들에 익숙한 지혜 전승을 답습한다거나 그들에 의한 창작물이라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정체성은 유대 전통의 예언자 전통에 있기 때문에 예수의 주기도문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

크레이그 힐(Craig Hill)에 따르면,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예수의 설교와 목회 자체의 핵심이면서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된다고 본다.4) 힐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모든 예수의 설교와 행동들을 종합해 볼 때 예수 자신이 종말론적 관심과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보는데, 그는 “미래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매우 전통적(conventional)인 방식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청은 ... 예수의 희망이 가지는 현세적 속성(earthliness)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들을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함으로써 강조된다. 이는 유대교 사고의 맥락에서는 완벽하게 이해되지만,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하늘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도전이 되는 생각이다.”라고 설명한다.5)

데이비드 플러서(David Flusser)는 주기도문이 유대교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특히 예수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자신의 특별한 아들 됨(sonship)을 함축하며, “주기도문은 예수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들에게 예수가 추천하는 기도”임을 강조한다.6) 플러서는 주기도문이 유대교 카디쉬(Kaddish)에 근거하여 정리된 것으로 보는데, 특히 주기도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제시하는 하나님 중심성, 즉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의 의지는 유대교 기도문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는 카디쉬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기도문은 신 중심성(theocentric), 인간 중심성(anthropocentric),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액막이적 기능(apotropaic)으로 정리하며, 각 부분은 모두 유대교의 기도문 또는 기도 전통에 그대로 나타나는 형식임을 지적한다.7)

아델라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는 주기도문의 간청을 일곱 개로 정리할 때, 성서적으로 일곱(7)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구조를 살펴보면 총 7개의 축복과 7개의 우화가 있는데, 유대-기독교 문화 또는 전승에서 숫자 7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종말론적 희망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8)

둘째, 주기도문의 예전적 특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학자들의 입장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워렌 카터(Warren Carter)는 주기도문이 마태 공동체의 경우, 예전이나 예배에 사용되는 공동기도문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데, 즉, 하나의 예전 단위로서 주기도문은 저자의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예배의 경험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이며, 주기도문을 읽는 최초의 마태 공동체는 주기도문을 통해 스스로 예수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함유한 예배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독자들은 이를 통해 마태복음의 원독자들의 신앙과 도덕 형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9)

제이미 클라크-소울스(Jaime Clark-Soles)는 주기도문이나 예수의 이야기들은 모두 복음서로 기록되기 이전에 기독교 예배에서 기억되고 사용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이야기나 주기도문은 각각 교회에서 다양하게 기능한 문서 단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기능적 특징으로 인해 예수 이야기의 구전성에도 불구하고, 문서화 단계에서 크게 왜곡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고 설명하며, 그녀는 복음서 기자들이 여러 전통들을 취합하여 구전되는 것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기록된 이야기로 정리했다고 보며, 주기도문도 그러한 차원에서 수집된 내용으로 이해한다.10)

찰스 코스그로브(Charles H. Cosgrove)는 신약성서의 주기도문이 가지는 장르적 특징은 일종의 송영(doxology)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사본 대부분이 주기도문의 마지막에 ‘아멘’을 두 번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1) 본래 신약성서에서 아멘은 송영을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아멘’의 삽입은 주로 교회 역사적으로 예전이 확립되는 시기인 2세기 기독교 문헌에 나타나며, 이러한 문헌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주기도문은 주로 예전 또는 예배용 자료이며, 송영의 장르라고 코스그로브는 설명한다.12)

셋째, 주기도문의 공동체성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서학자 룩 존슨(Luke Timothy Johnson)에 따르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마태 교회가 가지는 특정한 상황에 연관된다고 보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교리문답적(catechetical)으로, 이는 초대교회 선교와 연관되며, 마태 공동체 내적으로 주기도문은 하나의 예전적(liturgical) 기능을 담당하는데, 주기도문은 공동기도의 한 형태로서 설교의 확장인 동시에 미드라쉬 유대교 예배 전통을 따른다고 해석한다.13) 존슨은 누가복음 주석에서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디다케(Didache)와 같은 기능을 가지며, 누가복음 공동체보다 더 크고, 언어적으로도 정교하며, 그리고 공동체 내적 연대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하면서,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성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목표가 잘 제시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14) 룩 존슨은 계속하여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의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이는 예수가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에 있어서 행동했던 것들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의 가장 깊은 실존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5)

샤론 린지(Sharon H. Ringe)는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의 특징으로서 은총에 의한 공동체의 ‘사회적 상호 가능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본질의 기능이지, 인간의 공덕이 아니다. 실존주의적으로 읽는다면, 하나님이 용서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은 곧 인간이 그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깊이 인식하는 때에라도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16) 즉 제자 공동체의 유지 가능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오닐(J. C. O’Neill)에 따르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은 예수의 여러 기도들을 결합하여 형성된 기도문으로서, 복음서 및 다른 문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대부분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면서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제자들에게 특별히 알려준 기도라고 본다.17) 오닐은 여러 문서들에 나타나는 예수의 기도들이 주기도문의 형태로 결합될 때, 아홉 가지의 기도로 정리되었다고 보는데,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일도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성령이 임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인데, 이 아홉 가지 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디다케 문서에서 실제로 수집된 기도문의 결합체로 보고 있다.18) 이와 같은 오닐의 해석은 주기도문 자체가 제자 공동체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동으로 작업한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더글라스 오크먼(Douglas E. Oakman)은 주기도문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 완성된 것으로 보는데, 먼저 예수 자신의 언어로 드려진 기도의 형식으로서 여기에는 기도에 대한 예수의 설명과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 간청이 해당된다.19) 두 번째 단계는 그 전환 과정에 대해서 특정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예수의 구전적 아람어 형식의 기도로부터 기록된 그리스어 형식의 기도로의 전환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는 현재 형태의 주기도문, 즉 기도에 대한 예수의 연설과 간청 1-2, 그리고 간청 4-6으로 구성된 형태로서, 오크먼을 포함한 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이것이 Q문서의 최종 형식으로 본다.20) 오크먼은 마태복음과 디다케의 주기도문은 이러한 세 번의 단계에 새롭게 덧붙여지고 편집된 형태로 보는데, 이 세 단계는 특히 주기도문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석한다.21)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공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기도문의 예전적 성격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특성,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에서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에 나타나는 기독교 공동체 윤리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자.


III.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와 기독교 공동체 윤리

이 논문을 통하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주요 사상가들은 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 어거스틴, 아퀴나스, 마틴 루터, 휴 라티머, 존 칼뱅, 존 라이트후트, 매튜 헨리, 웨슬리, 아키발드 로버트슨, 칼 바르트, 본회퍼, 하워드 요더, 판넨베르크, 레오나르드 보프,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리고 톰 라이트이다.22) 그리고 이들의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에 대한 분석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유형화였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통한 제자 공동체의 종말론적 관점, 둘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 그리고 셋째, 공동체성에 관한 것이다. 위 세 가지 유형이 사상가들에게 뚜렷한 경우도 있지만, 각 관점들이 골고루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종말론적 관점

터둘리안(Tertullian)은 『기도에 관하여』(On Prayer)에서 주기도문은 새로운 형태의 기도이기 때문에 마치 새 부대에 새 술과 같이 특별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23)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설명하기 이전에 주기도문이 권위가 있는 이유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인데, 그는 “성령(the Spirit of God)으로서, 말씀(the Word of God)으로서, 그리고 지혜(the Reason of God)”로서 인정받으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24)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확증되심은 그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이며, 말씀으로 확증되심이란 그는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것은 그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25)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크게 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심으로써 그 기도의 의미가 드러나고 분명하게 표현되었으며, 둘째, 주기도문은 영적인 것으로서 주님만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기도를 알려주셨으며, 그리고 셋째, 주기도문은 신적 지혜로서 오로지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인데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이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26)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요약하면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버지라는 이름’은 믿음을, ‘하나님의 뜻’은 순종을, ‘하나님의 나라’는 소망의 축제를, ‘양식’은 생명을 위한 간구를, ‘용서’는 죄를 용서받는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간절하고 두려운 마음임을 강조하고 있다.27)

특히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하여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체되지 아니하며,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 6:10)”의 말씀처럼,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속히 임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28)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미 영원한 나라를 가지고 계시지만, 그의 나라의 완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주기도문의 내용은 철저히 기도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하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29)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러한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로 구원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어날 때에 실현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다.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좌우편으로] 구분하실 것이다. 우편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오라, 나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 그 나라를 받을지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30)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신자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실현될 것으로 본다.

휴 라티머(Hugh Latimer)는 1552년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Sermons on the Lord’s Prayer)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주기도문에서 두 번째 간구라고 설명하고 있다.31) 라티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임을 강조하며, 여기서 ‘나라’(Kingdom)는 온전하지 못한 이 땅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신자들의 기도가 있어야 이 세상을 통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왕들보다 뛰어나시며 모든 신들보다도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32)

라티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33) 따라서 이 땅에서 왕이나 군주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에 이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34) 라티머는 이 세상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왕의 마음도 다스리심을 강조한다.35) 그러나 이 세상의 왕국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기 때문에 압제와 포악이 끊이지 않으며 백성들은 고통에 빠지게 되지만, 결국은 온전하신 영적인 나라로서 의와 정의로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야 하는 것임을 라티머는 확신한다.36)

라티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기도는 믿는 이들로 하여금 마귀의 자녀와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는 것이기에 이것을 깨닫기 위하여서는 특히 설교자의 사명이 중요하다고 보았다.3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는 것이기에 이 아버지의 나라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이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하는 직무를 가진 설교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38)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믿음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부족함이 없이 은혜로써 살아가게 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라티머는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은총의 나라, 영광의 나라, 존귀, 기쁨, 그리고 지복[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39)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간청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설교의 핵심적 교리이자 주제라고 강조하며, 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음을 선포했다고 강조한다.40) 매튜 헨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이 약속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기도의 내용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도록 촉구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 약속의 성취가 임박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할 때, 우리는 더 열심히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해야만 한다.”고 해석한다.41)

웨슬리(John Wesley)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해석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하는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통치자이자 왕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임하심을 위한 기도라고 주장하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곧 하늘에서의 영광의 나라이며, 이 나라가 지상에서도 은총의 나라로 완성되고 계속될 것임을 기대한다.42) 웨슬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모든 지적인 피조물, 즉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라는 거대한 사건에 관심이 있고,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회복(renovation)”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비참함과 죄를 끝내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취하셔서 모든 세대에 계속될 나라를 세우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43)

웨슬리는 부연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과 연관이 된다고 보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사람에게만 도래한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음을 알게 된다.”44)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통치하실 나라의 현실을 기대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45)

지금까지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해석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종말론의 관점을 살펴보았는데, 터툴리안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 라티머의 ‘임박한 지복의 나라’, 매튜 헨리의 ‘하나님 나라의 약속 성취’, 그리고 웨슬리의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났다고 본다. 이제 다음 장에서 살펴볼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기도의 실재’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기도를 통하여 실재임을 고백하고 확증되는 의미가 사상가들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

2.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기도의 실재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미래의 지평에서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관점을 넘어서 실제로 그 말씀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백임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46) 이제 살펴볼 사상가들을 통하여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어떻게 해석되는지 살펴보자.

오리겐(Origen)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간청이자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재로 보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며, [이 고백은]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있다.”라고 강조한다.47)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기도는 곧 자신 안의 하나님 나라를 완전하게 하며, 그 열매를 온전히 맺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성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고,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에 순종했으며, 스스로 잘 정리된 도성과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는 성부와 함께 완전한 성령으로서 함께 통치하신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본질은 선포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공의로 오리겐은 이해한다.48)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기도의 우선순위이자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이 기도의 목적이며 아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대하여 키프리안(Cyprian, Tr. vii. 4)을 인용하면서 강조하고 있다.49) 주기도문은 기도를 통해, 특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며,50)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아퀴나스는 설명한다.51)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간청과 서로 연결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52)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청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을 양자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가 무너지며,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한다.53)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에게 명백하게 보이고 실현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기도의 실재가 되는 것이다.54)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열망에 불을 붙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도래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통치할 수 있게 될 것이다.”55)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며, 또한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56)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를 드리지 않더라도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믿음과 연관이 된다고 강조한다.57)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단순히 종말론적인 기대와 소망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독교인의 삶에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거룩한 말씀을 믿고 이 세대에서는 여기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영원한 삶을 사는 내세에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때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58)

한편 종교개혁자 칼뱅(John Calvin)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그의 백성은 전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설명한다.59) 칼뱅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다 영적이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때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하여 강조한다.60)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온 세상이 전적인 변화에 이르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선한 질서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라고 칼뱅은 강조한다.61)

바르트(Karl Barth)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본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의 의도 안에서 삶과 세상의 목적이며, 이는 불가피한 죄의 결과와 죽음이라는 위험성, 즉 세상이 단지 피조물이기 때문에 세상에 도래하게 될 멸망에 대한 효과적이며 분명한 방어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이며,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이다.”(고후 5:19)라고 강조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와 화해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확신한다고 강조한다.62)

바르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는 단순히 종말론적인 희망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와 정의를 위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에 대한 소망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전제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는 인간 역사의 모든 비극과 부정의를 종식할 수 있는 근본적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선언하는 것임을 강조한다.63) 이러한 의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간청은 현재의 인간 주도의 모든 질서와 체계가 사라지고, 완전히 실존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질서란 곧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통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정의가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64)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하여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는 미래적인, 또는 종말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사탄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세상의 권세와 죄, 그리고 죽음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고통당하고 투쟁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65) 본회퍼는 예수의 처음 제자 공동체는 박해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공의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66)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그의 교회에서 성장하여 가기를 허락하셨으며, 이 세상 왕국의 종말을 촉진하시며, 권세와 영광 가운데 자기 자신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기도의 실재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67)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라는 맥락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한 해석을 종말론적이며 공동체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기도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결단이 요구되는 ‘실재’라고 강조한다.68) 하우어워스는 이 기도가 정치적인 것으로 혁명을 요구하되, “세상 나라를 지배하기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신 주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본다.69)

하우어워스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기도는 “이미 그러나 아직”(now and not yet)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종말론적인 고백이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여기 있지만 또 여기 없으며, 지금 현존하지만 아직 현존하지는 않는 그 나라는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 잔치는 타락했음에도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라고 강조한다.70)

지금까지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하여 기도의 실재론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오리겐의 ‘하나님 나라의 실재,’ 아퀴나스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 루터의 ‘실존하는 하나님 나라’, 칼뱅의 ‘세상 주권자이신 하나님,’ 바르트의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 본회퍼의 ‘하나님 통치의 실재’, 그리고 하우어워스의 ‘하나님 나라의 동참과 결단을 요구하는 제자도의 실재’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이제 다음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공동체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3.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공동체성

셋째로 “나라가 임하시오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성’에 관한 것이다. 앞의 ‘기도의 실재’와 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으나 공동체성은 기도를 통한 사회의 개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이 강조하는 주기도문의 특징은 우선 공동체성이다. 그는 주님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양식이나 죄의 용서,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보호에 대하여 기도드리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71) 기도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키프리안은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the whole people are one)”이기 때문이다.72) 키프리안은 “평화의 하나님, 일치의 교사(The God of peace and the Teacher of concord)”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 되어 함께 기도하도록 하신 전형적인 예를 성경을 통하여 인용하는데, 구약은 다니엘서 3장 8-30절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의 신들이나 금신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긴다는 이유로 풀무불에 던져졌어도 셋이 함께 기도하며 생명을 건지게 된 것과 사도행전 1장 14절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에 나타나는 말씀을 상기시킨다.73)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하여 키프리안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며 거룩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확증된 나라로서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임을 강조한다.7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의 인용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분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구하여야 한다고 키프리안은 주장하며, 이 땅의 나라에서 살지만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75)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의 인용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던 자들도 불신에 빠지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76) 이와 같은 키프리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한 해석은 유대 공동체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우주적 공동체성을 상기시켜준다고 본다.

존 라이트후트(John Lightfoot)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하나로 묶으며, 특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마태복음은 주기도문이 “아멘”(Amen)으로 끝나지만 누가복음은 그렇지 않다고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회중이 기도할 때 함께 “아멘”(Amen)으로 소리를 내는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며, 누가복음은 개인적인 기도의 관점에서 주기도문이 암송된 것이라고 설명한다.77)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영원하다는 것과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유대교 전승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라이트후트는 강조하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기도문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78)

아키발드 로버트슨(Archibald T. Robertson)은 주기도문이 ‘표본 기도’(the Model Prayer)라고 불려야 한다고 보면서, 먼저 마태복음 6장 9절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 ὑμεῖς)79)는 명령은 이방인이 아닌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설명하며, 따라서 주기도문은 예수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위한 표본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식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인 의무인 범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80)

로버트슨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선언이며, 이는 회심하지 못한 죄인이 회심할 때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면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며,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것은 곧 새로운 창조와 회심으로 돌아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을 강조한다.81) 따라서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하여 로버트슨은 기독교 공동체와 하나님의 세상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기도이자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초대받은 공동체성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그들의 행위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이를 수 있도록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이 땅에 그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공동체적 사명을 지적하며, 다만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는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를 하실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이 우리의 다양한 행위들이 얼마나 이러한 목적에 연관될 수 있고, 효과적일지를 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의 제한성을 인정하는 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데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형태이며, 기도는 또한 신자들의 행위를 촉진하고 지시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적 개념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재론적 개념을 강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82)

판넨베르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포함한 주기도문의 간청 기도는 형식뿐만 아니라, 기도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연결해 주는 기능을 가진다고 보며, 개인적 기도와 교회 전체의 기도 모두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연결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행위를 기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교회의 성례전 안에서 예수가 성찬을 기념하라고 부탁하신 뜻에 따라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기념기도’(anamnesis)와 성령이 감림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령강림기도’(epiclesis) 사이의 내적 연결성에 상응하는 간구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한다.”83)고 강조함으로써 기도의 종말론적인 특성과 실재, 그리고 공동체적 특성을 함께 잘 드러낸다고 본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집중하는데, 예수의 산상수훈의 핵심 주제를 억압받는 자의 해방으로 이해하는 보프는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일종의 유토피아적 선언으로서, 모든 인류의 소망을 현실화하는 예수의 포괄적인 사회적 프로젝트라고 정의한다.84)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정치적 프로젝트 또는 종교적 프로젝트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며,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환원적인 유토피아를 거부하는데,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는 과정이 전적으로 역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지만, 보프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실존으로서, 역사는 하나님 안에서 그 궁극적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한다.85)

물론 인간이 처한 종말론적 실존에 대한 고백이 현실의 사회적 이념과 목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사회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보프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는 곧 “가난한 자와 재산을 빼앗긴 자, 억눌린 자들에게 정의가 미치기 시작한 때”라고 본다.86) 이러한 측면에서, 보프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비되는 죄의 개념을 사회적이며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돈을 우상시하는 체제는 ‘죄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공동체적 고백과 연관이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87)

톰 라이트(Tom Wright)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하는 기도로서 전체 복음서의 핵심 주제로 이해하고 있는데, “(1) 예수는 자신의 핵심적인 메시지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고, (2)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악의 패배 그리고 야훼 하나님 자신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막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88)

예수 당시 메시야 사관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가 존재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라이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도 이러한 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며, 하나님의 실존은 메시야를 통해 정의되고,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께 선택된 메시야의 행동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정의와 평화가 서로를, 또한 전 세계를 포용하는 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 의미로서,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의 실존과 사역을 통해 시작되는 때”를 의미한다고 라이트는 강조한다.89)

이러한 의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간청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의 운동이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예수 자신의 기도의 전체 주제이자 예수의 핵심적인 주장으로서, 시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고, 예수는 이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고 있으며, 그의 제자들이 이 움직임에 동참하기를 초대하는 것이라고 라이트는 강조한다.90)

지금까지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기도에 나타나는 ‘공동체’적 요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키프리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 라이트후트의 ‘아멘 공동체’, 로버트슨의 ‘모든 이들의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판넨베르크의 ‘하나님과 협력하는 공동체’, 보프의 ‘사회적 프로젝트’, 그리고 톰 라이트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에 결론으로 이 논문에서 서론 이하 지금까지 살펴본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한 해석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결론과 몇 가지 제언을 하도록 하겠다.


IV. 나가는 말

지금까지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 윤리의 요소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 기도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요소’와 ‘실재론적 요소’, 그리고 ‘공동체적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현대 넘쳐나는 설교와 기도문 속에서 기도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한 ‘주기도문’에 대한 연구는 나름 그 의미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터툴리안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초기 사상가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해석에는 자연스럽게 ‘종말론적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이 되었으며, 매튜 헨리나 웨슬리와 같은 복음주의적 영성가들에게서도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이 기도에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기도의 실재’라는 측면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이 고백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성취된 ‘실재’로 보는 관점인데, 앞에서 설명한 유형론에 따르면 자연법의 아퀴나스와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 등이 이 범주에 속하며, 아울러 신정통주의의 선도에 섰던 바르트와 본회퍼, 그리고 하우어워스도 같은 유형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한 유형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 강조되며 이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무가 강조되는데, 키프리안과 라이트후트, 현대의 판넨베르크와 보프, 그리고 톰 라이트 등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실존과 기도의 사회화와 같은 관점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룬 유형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독교윤리학의 사명에 대하여 제언하여 보도록 하겠다.

첫째, II장에서도 강조하였듯이, ‘기도의 공공성’에 관하여 기독교 신학은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주기도문은 지혜 전승의 차원이나 피안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을 넘어서, 공적 예배에서 예전적인 특성을 지니며, ‘예언자적 요소’와 ‘사회적 상호성’, 그리고 교회의 성원이 되기 위한 ‘디다케’적 요소들이 있다. 주기도문이 예배만을 위하거나 개인의 기도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며 복음의 사명과 연관이 된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이 연구를 통하여 다시 확인한 것은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라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입술의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성취된 증거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비록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세속적 정치의 힘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영적 나라를 이 땅에서 건설하겠다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리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통하여 진리의 성을 이 땅에서 구축하여 나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기도가 ‘실재’라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여서 내 뜻을 이루려는 ‘주문’이 아니며, 훈련을 통하여 기도의 조련사가 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고백은 하나님의 뜻이 나와 공동체,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 말씀이 이루어진 줄 믿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은총이며 선물이고, 그리고 자녀임을 확증하는 하나님 사랑의 표식이며, 창조주와 자녀의 인격적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진정한 기도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공공성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고 경험되는 공동체의 윤리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한다.


Notes
1) 이 논문에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서 6장 10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한글 개역개정판의 번역을 따랐음을 밝힌다. 대한성서공회,『성경전서』(개역개정판, 2005).
2) 참고로 ‘DBpia’(정보 콘텐츠 서비스, 누리미디어)를 통하여 ‘주기도문’을 검색하여 보니 주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적 관점, 그리고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쓴 논문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윤리의 관점에서 이 논문은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DBpia. http://www.dbpia.co.kr (2018년 12월 8일 검색).
5) Ibid., 147.
7) Ibid., 85-86.
12) Ibid.
15) Ibid.
18) Ibid., 20-21.
20) Ibid.
21) Ibid.
22) 이 논문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들을 생애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터툴리안(Tertullian, 150-220), 오리겐(Origen, 184/5-253/254),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 200-258),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5),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 존 라이트후트(John Lightfoot, 1602-1675),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존 길(John Gill, 1690-1771),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아키발드 로버트슨(Archibald T. Robertson, 1863-1934),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1938~),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1948~).
23) Tertullian, On Prayer, Ante-Nicene Fathers, Volume 3, Philip Schaff, ed. (Grand Rapid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schaff/anf03.pdf (2018년 12월 8일 검색), Chapter I: General Introduction, 1502(681). 인용 페이지를 표시할 때, 앞의 숫자는 pdf 파일에 있는 페이지 표기이며, 괄호 안의 숫자는 pdf 파일에 표시되어 있는 별도의 원본 페이지 표기임을 밝힌다.
24) Ibid.
25) Ibid.
26) Ibid., 1502-1503(681).
27) Ibid., Chapter IX: Recapitulation, 1511(684). 터툴리안이 설명한 내용을 의역하여 간략하였다.
28) Ibid., Chapter V: The Fourth Clause, 1507(683).
29) Augustine of Hippo, “On the Lord’s Prayer,” William Jennings Bryan and Francis W. Halsey, eds., The World’s Famous Orations (New York: Funk and Wagnalls Company, 1906. https://www.bartleby.com/268/7/2.htm (2018년 12월 8일 검색). 참고로 이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주기도문’ 해석에 대한 영어 원문은 아래에 실려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Translated for the Oxford “Library of the Fathers.” Abridged. The best edition of St. Augustine’s complete works in the original is that published by the Benedictines in eleven volumes (folio, Paris, 679 1800); reissued in 1836 38 as twenty-two volumes. 참고로 pdf 파일이 1면으로 된 문서이기 때문에 페이지 표기는 생략한다.
30) Ibid.
31) Hugh Latimer, Sermons by Hugh Latimer (Grand Rapid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233. https://www.ccel.org/ccel/latimer/sermons.pdf (2018년 12월 8일 검색). ‘주기도문’에 대한 라티머의 세 번째 설교의 영어 원문 제목은 “The Third Sermon upon the Lord’s Prayer”이다. 이하 “Hugh Latimer, The Third Sermon upon the Lord’s prayer”로 통일한다. 라티머는 세 번째 설교 서문에서 첫 번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두 번째 설교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라티머의 이 설교는 위의 인터넷 사이트 서적에 있는 여러 주제 설교문 가운데 마지막 순서에 있으며,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는 총 7편이다. 참고로 페이지 표기는 원본 pdf 파일의 페이지 번호를 따랐음을 밝힌다.
32) Hugh Latimer, “The Third Sermon upon the Lord’s Prayer,” 233. 참고로 ‘신들 중의 가장 위대하신 신’과 연관된 구약의 성구는 시편 86:8; 89:6; 136:2에 나타나는데 이를 필자가 보충한다. 이하 라티머의 성경 본문 인용에 대한 것은 필자가 보충하였음을 밝힌다.
33) Ibid.
34) Ibid., 234.
35) Ibid. 성구 인용 출처는 필자가 보충한다. 라티머는 자신이 살던 시기까지 총 4대 제국이 존재하였다고 설명하는데, 그것은 각각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로 이어진다고 보았고, 라티머는 로마가 마지막 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았다고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36) Ibid., 234-35.
37) Ibid., 235-36.
38) Ibid., 236-37.
39) Ibid., 238.
41) Ibid., 140.
43) Ibid.
44) Ibid.
45) Ibid.
46) 필자는 ‘실재’에 대한 해석을 기독교윤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워드 요더(Howard Yoder)는 누가복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재(reality)’라고 해석하며,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윤리는 도덕이 아니라 ‘계시된 실재’라고 강조한다. 참고로 다음의 책에 그 관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Howard Yoder,『예수의 정치학』신원하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 Stanley Hauerwas, Excerpts from From Christ To The World, Wayne B. Boulton et al., eds. (Grand Rapids: Eerdmans, 1994).
48) Ibid.
49) Thomas Aquinas, Catena Aurea: Gospel of Matthew, William Whiston, trans (Grand Rapid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aquinas/catena1.pdf (2018년 12월 8일 검색), 167(222). 참고로 페이지 표기 앞의 숫자는 pdf 파일에 있는 페이지이며, 괄호안의 숫자는 pdf 파일에 기입되어 있는 별도의 원본 페이지 표기임을 밝힌다. 아퀴나스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대한 주석에서 키프리안(Cyprian),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제롬(Jerome), 존 크리소스톰(Pseudo-Chrysostom) 등의 해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50) Ibid., 167(223).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재인용) Aug., Serm. in Mont., ii, 4.
51) Ibid., 169(225).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재인용) Aug., Serm. in Mont., ii, 6.
52) Ibid., 169-70(226).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재인용) Aug., Serm. in Mont., ii, 6.
53) Ibid., 169(225). 아퀴나스는 제롬의 해석을 언급한다. 원본에 별도의 페이지 표기는 없다. (재인용) Jerome.
54) Ibid.,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재인용) Aug., Serm. in Mont., ii, 6.
55) Ibid., 169(226).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재인용) Aug., Epist., 130, 11.
56) Ibid., 170(226). 아퀴나스는 키프리안을 인용한다. 원본에 별도의 페이지 표기는 없다. (재인용) Cyprian.
58) Ibid.
59) John Calvin, Commentary of Matthew, Mark, Luke, Volume 1 (Grand Rapid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www.ccel.org/ccel/calvin/calcom31.pdf (2018년 12월 8일 검색), 278. 참고로 페이지 표기는 pdf 파일에 있는 페이지를 기입하였음을 밝힌다. 칼뱅은 본문에 대한 문서비평 없이 마태복음 6장 9-13절, 누가복음 11장 1-4절 말씀을 통합하여 주석하고 있다.
60) Ibid.
61) Ibid., 279.
63) Ibid.
64) Ibid.
66) Ibid.
67) Ibid.
69) Ibid., 84.
70) Ibid., 93, 96-97.
71) 키프리안의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의 직접 인용 출처는 다음과 같다. Cyprian of Carthage, “Treatise on Lord’s Prayer,”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eds., Ante-Nicene Fathers, Vol. 5, Robert Ernest Wallis, trans.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6); Revised and edited for New Advent by Kevin Knight, http://www.newadvent.org/fathers/050704.htm (2018년 12월 8일 검색). 다음과 같이 약한다. Cyprian, “Treatise 4,” On the Lord’s Prayer, N (number). 8. 참고로 전체가 1면으로 되어 있는 pdf 파일이기 때문에 별도의 페이지 표기는 생략하며, ‘N’ 표기는 파일에 있는 아라비아 숫자 표기임을 밝힌다.
72) Cyprian, “Treatise 4,” On the Lord’s Prayer, N. 8.
73) Ibid. 키프리안은 구약성경의 예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영어 원문에서 “세 아이들이 극렬한 불가마에 갇혔다(they[three children] were shut up in the fiery furnace).”라고 설명하는데, 필자의 생각에 이는 다니엘의 세 친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여 소개함을 밝힌다.
74) Cyprian, “Treatise 4,” On the Lord’s Prayer, N. 13.
75) Ibid.
76) Ibid.
78) Ibid., 110.
79) 헬라어 본문은 Nestle 1904판에서 인용함. https://sites.google.com/site/nestle1904 (2018년 12월 8일 검색).
81) Ibid.
83) Ibid., 210.
85) Ibid., 46.
86) Ibid., 61.
87) Ibid., 88.
89) Ibid.
90)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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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ugustine of Hippo, “On the Lord’s Prayer”, William Jennings Bryan, and Francis W. Halsey, eds., The World’s Famous Orations, New York, Funk and Wagnalls Company, https://www.bartleby.com/268/7/2.htm, 2018년 12월 8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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