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Current Issue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8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No. 0, pp.85-123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Mar 2019
Received 12 Jan 2019 Revised 03 Feb 2019 Accepted 18 Feb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3.47.85

영산 설교의 형식에 관한 연구
조지훈
여의도순복음교회, 설교신학 (jihoonc@hotmail.com)

An Investigation of Sermon Forms in Youngsan’s Preaching
Cho, Ji Hoon

초록

현대 설교학에서 설교 형식은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이전에 설교 형식은 설교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 정도로 이해되었지만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 형식이 청중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심지어 설교의 결과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들은 설교 형식이 설교신학은 물론 설교의 목적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주장해왔다.

본 논문의 주된 목적은 설교 형식과 설교신학/설교 목적 간의 관계성에 대한 현대 설교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형식과 설교신학/설교 목적 간의 관계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동안 조용기 목사의 설교 연구는 내용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 형식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연구가 요구된다. 특별히 그의 설교 형식을 연구할 때 중요한 것은 그의 설교의 형식(3대지 형식)이 그의 설교신학은 물로 그가 설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설교 목적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설교신학은 오중복음·삼중축복이며, 이 설교신학은 기본적으로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산의 설교 형식은 이와 같은 그의 설교신학이 가지는 내적인 구조에 따라 3대지로 구성된다. 또한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성도들이 그의 설교의 여정에 동참하게 하고, 그의 설교 속에서 그들은 구원하시고 꿈과 희망을 주시고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설교 형식과 설교신학이 갖는 연관성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이론을 살펴보고, 이를 근거로 해서 영산 설교의 형식이 그의 설교신학 및 설교 목적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밝히도록 하겠다.

Abstract

The matter of sermon form has been one of frequently discussed issues in contemporary homiletics since 1960. While sermon form is understood as a basin in which a preacher contains sermon content before the New Homiletic Movement, contemporary homileticians argue that sermon form is important because it influences a way of how hearers understand sermons and result of preaching. Especially, they contend that sermon form has relationship with theology and goal of preaching.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eal with a relationship between sermon form and theology/goal of preaching in Youngsan’s preaching in terms of theories of contemporary homileticians concerning a relationship between sermon form and theology/goal of preaching.

Investigations of Youngsan’s preaching has been mostly focusing on its contents. It is, therefore, necessary to probe its forms. When dealing with forms of Youngsan’s preaching, one should not miss that his theology and aim of preaching are deeply related to forms of his preaching. The theology of preaching in Youngsan’s sermons is the Fivefold Gospels and Threefold Blessings that have their own structure, that is, ‘Fall-Salvation-Blessing’. Youngsan’s preaching takes a three-point sermon form that mostly fits to his theology of preaching. Moreover, the structure of ‘Fall-Salvation-Blessing’ in Youngsan’s homiletical theology enables his congregation to participate the movement of preaching and to experience God who saves them and gives them dream, hope and blessing.

In the course of the investigation, this article explores diverse opinions and theories of contemporary homileticians and prove how forms of Youngsan’s preaching has a relationship with its homiletical theology and aim.


Keywords: Youngsan’s Preaching, Sermon Form, Theology of Preaching, Fivefold Gospel, Threefold Blessing, Fall-Salvation-Blessing, the New Homiletic, Homiletic Plot
키워드: 영산 설교, 설교 형식, 설교신학, 설교 목적, 오중복음, 삼중축복, 타락-구원-축복, 새로운 설교학, 플롯

I.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의 목적은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형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 설교 형식은 한 설교자가 가지는 설교신학이나 설교를 통해 이루려는 설교 목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즉, 설교 형식은 설교를 위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신학에 근거해 설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동안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지만, 그의 설교가 가지는 형식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 설교 형식과 그의 설교신학, 그리고 그가 설교를 통해 성취하려는 설교의 목적과 어떤 상관성을 갖는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연구에 있어서 설교 형식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신학의 뿌리는 오중복음·삼중축복으로, 이 신학은 기본적으로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설교가 가지는 3대지 설교 형식은 그와 같은 설교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물론 그가 설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 즉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근거해 청중들에게 꿈과 희망과 축복을 선포하려는 설교 목적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먼저 영산 설교에 대한 이전 연구들을 살펴볼 것이다. 영산 설교에 대한 이전 연구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영산의 설교 연구가 주로 내용 연구에 치우쳐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설교 형식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는 것을 밝히겠다. 이어서 현대 설교학계의 설교 형식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현대 설교학에서 설교 형식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으며 설교 형식이 건강한 설교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알아보겠다. 또 설교신학과 설교 목적이 설교 형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살펴보겠다. 다음으로 영산의 설교신학을 알아보고, 이 설교신학과 영산의 설교 형식이 어떤 상관성을 갖는지를 살펴보겠다. 즉, 영산의 설교신학과 그가 설교를 통해 이루려는 설교 목적이 그의 설교 형식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반대로 그의 설교 형식이 그의 설교 목적을 이루는 데 얼마나 중요한 수단이 되는지를 살펴보겠다.


II.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연구 동향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영산 설교를 연구해왔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연구들은 설교학적인 연구라기보다는 다른 연구 분야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설교 연구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예를 들어, 성서신학자나 조직신학자의 영산 설교 연구는 그의 설교 자체를 연구하려는 목적보다는 성서신학 또는 조직신학의 주제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의 설교를 분석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연구들 가운데 설교학적으로 전문적인 연구와 논의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설교학적인 측면에서 영산의 설교에 대한 매우 유의미한 연구 결과들도 존재한다. 이 단락에서는 그런 측면에서 영산의 설교를 연구한 몇몇 설교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도록 하겠다.1)

영산의 설교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 가장 먼저 장신대의 김운용 교수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북미 설교학 이론과 방법론을 꾸준히 소개해오고 있다.2) 자신의 논문 “‘이야기의 혁신성’의 관점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돌입’이라는 관점에서 본 영산 조용기 목사와 설교, 그리고 미래를 위한 함의(含意)”에서 김 교수는 영산의 설교 세계를 이해하는 특징적인 내러티브와 그 중심 주제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영산 설교의 내러티브는 그의 젊은 시절의 고난과 아픔과 치유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진단한다.3) 즉, 영산의 내러티브는 “질병으로 인한 위기 경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통한 치유 경험, 그로 인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 회심과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 회심 경험 등을 통해 형성”되었다.4) 그리고 이와 같은 영산의 개인적인 회심과 치유 경험은 이후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의 절망적인 삶과 만나면서 그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로 발전하게 되었다.5) 한마디로 영산의 설교는 그의 삶과 청중의 삶의 만남이요, 이를 통한 “회중의 발견이며, 그들의 삶의 발견이었고, 그의 내러티브의 재구성이었으며, 평생 전했던 메시지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6)

영산 설교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심두진 박사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영산설교: 부흥을 이끈 설교의 眞髓』에서 폭넓게 영산 설교를 분석해 놓았다.7) 그의 저서가 가치 있는 이유는 영산의 설교를 시대별로, 주제별로 심도 있게 분석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두진 박사에 따르면 영산의 설교는 시대마다 변화를 거듭해왔다. 개척 초기로부터 1970년까지 영산의 설교는 주로 치유의 역사를 선포하고 청중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8) 이 시기 영산의 설교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강조하였다.”9) 1980년대 들어서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영산 역시 위로와 희망을 주는 목회에서 창조적 목회로 목회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 역시 긍정의 메시지에서 창조적 메시지로 변화되었고, “긍정적 메시지를 기반으로 역동적인 창조적 역사를 이루어 나가자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10)

한편 심두진 박사는 영산의 설교를 ‘케리그마 중심의 설교’라고 정의한다.11) 사실, 영산의 설교를 케리그마적 설교라고 정의한 학자들은 심두진 박사 이전에도 있었다. 심두진 박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김홍근 교수는 물론 신문철 교수와 이미아 박사 역시 영산의 설교를 케리그마적인 설교라고 정의한다.12) C. H. Dodd의 케리그마 연구를 근거로13) 심두진 박사는 초대교회의 설교는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3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첫째, 구약성경의 예언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과 높임 받으심을 역사적 정황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다. 셋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14) 심 박사는 이 케리그마가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 메시지였으며, 영산의 설교가 철저히 이런 케리그마에 근거한 설교라고 주장한다.15)

허도화 교수 역시 영산 설교 연구에서 중요한 학자이다. 그는 “4차원 영성으로 본 조용기 목사의 설교신학”이라는 소논문에서 영산의 4차원 영성이 교회성장이론과 목회자 리더십 훈련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영적 설교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6) 허 교수는 영산의 설교가 오중복음, 삼중축복에 근거해 행해졌지만, 4차원의 영성이 개발된 이후에는 보다 심화되고 발전했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심두진 박사와 마찬가지로 허 교수 역시 영산의 설교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또한 허 교수는 영산 조용기 목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우 간결하고 쉽게 설명하고 안내하는 4차원 영성을 먼저 자신의 설교에 적용시켰다.”고 본다.17) 즉, “4차원 영성을 발견한 후, 영산은 먼저 성경을 새로 읽으면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귀신 들리고, 병들고, 배고프고, 외롭고, 죽음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설교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본 논문의 저자는 영산의 4차원 영성과 설교신학에 대한 허도화 교수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산의 오중복음, 삼중축복과 4차원의 영성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차원의 영성은 오중복음·삼중축복의 신학과 이 신학을 목회 현장에서 접목하면서 자연스럽게 잉태되고 탄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저자는 4차원의 영성은 영산의 새로운 설교신학의 기반이 아니라, 오중복음·삼중축복의 신학을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얻어진 실천적인 적용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4차원의 영성은 오중복음·삼중축복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열매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삶 속에서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산의 설교 연구에서 김덕현 교수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그가 언어행위 이론(Speech Act Theory)이라는 좀더 전문적인 분석틀을 통해 영산의 설교가 가지는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18) Austine과 그의 제자 Searle에 의해 대표되는 언어행위 이론은 “언어란 단순히 명제적 진술이 아닌 수행적 행동 그 자체”라고 전제하고 언어가 수행하는 3가지 행동 양식―단순발화 행위, 의미수반발화 행위, 효과수반발화 행위―의 의미를 탐구한다.19) 언어행위 이론을 근거로 김 교수는 영산의 성경 언어에 대한 언어철학이 성경해석학과 설교학의 이론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 있으며, 설교학적으로 3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로고스’와 ‘레마’는 기록된 본문과 설교된 본문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요로운 성령의 사역에 관한 언어학적 이해를 줄 수 있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선포로서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신교의 오래된 설교신학의 유산을 확증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언어행위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은 본문 주해에 있어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장치를 제공할 수 있다.20)

이상에서 영산의 설교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았다. 이들 학자의 연구 내용은 설교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서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이들 학자들은 주로 영산 설교의 내용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 말은 이들 학자들이 설교 형식에 관심이 없다거나 설교 형식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운용 교수 같은 경우 꾸준한 연구 활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설교 형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 논문은 그동안 영산의 설교 연구에서 설교 형식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III. 설교에 있어서 설교 형식의 중요성

설교 형식은 설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인가? 설교 형식이란 그저 설교 내용을 담는 그릇은 아닌가? 만약 설교 형식이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단락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현대 설교학에서 설교 형식은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특별히 1960년 말 태동한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 이후 설교학자들은 설교 형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 왔다. 현대 설교학에서 설교 형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루터교 설교학자였던 H. Grady Davis이다. 그는 그의 책 Design for Preaching에서 설교 형식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이해를 피력하고 있다.21) 그는 설교 형식은 너무도 근본적이어서(elemental) 쉽게 인식되지 않지만, 청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2) 또한 그는 생각은 형식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감소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면서 설교 형식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23) 즉, 사람의 생각은 형식과 내용을 통해 전달되며, 형식과 내용이 그 생각에 적절할 때,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적절한 내용은 물론 적절한 형식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형식과 설교의 내용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Davis의 생각이다.

한편, Davis는 설교 형식을 기능적인 것(functional)과 유기체적인 것(organic)으로 분류한다.24) 기능적인 면에서 설교는 선포(proclamation), 가르침(teaching), 치유(theraphy) 등의 설교 형식을 취할 수 있고, 유기체적인 면에서 주제 형식(subject form), 명제 형식(propositional form), 질문 형식(question form), 이야기 형식(narrative form) 등을 취할 수 있다.

Davis 이후 북미 설교학계에서 설교 형식에 대한 논의는 한층 활발해졌고, 설교 형식에 대한 이론들뿐만 아니라 설교 형식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들도 제시되었다. 특별히 Fred Craddock, Eugene Lowry, David Buttrick, Paul Scott Wilson과 같은 학자들은 자신만의 설교 이론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론에 근거한 독특한 설교 형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설교 형식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5)

먼저 설교 형식에 관한 Fred Craddock의 생각을 살펴보자. 현대 설교학에서 Fred Craddock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앞서 언급한 Davis 이후 시작된 설교 형식에 대한 관심을 보다 광범위하게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Craddock은 변화된 세상 속에서 보다 효과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 형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귀납적 설교 형식”을 주창했다.26) 그는 모든 사람들은 연역적이 아닌 귀납적으로 살아간다고 전제한 뒤, 설교의 형식 역시 특별하고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보편적인 내용으로 움직여가는 귀납적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그에게 설교 형식이 중요했던 것은 Davis가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 형식이 청중들의 경험을 형성하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27) 그는 설교 형식의 중요성을 이렇게 피력한다.

형식은 듣는 사람들의 신앙을 형성해 준다. 아마도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설교 형식이 교인들의 신앙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매 주일, 자기의 설교를 논쟁 형태로, 즉 토론으로 무장된 삼단 논법 형태로 구성하는 목회자들은 장기적으로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신앙관에 그런 형태를 부여하기가 쉽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 형식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취급되는 주제와 관계없이 설교자는 형식을 통해서 엄격성과 개방성, 율법주의와 은혜 중심주의, 포괄성과 배타성, 논쟁적인 성격과 화해 정신, 토론해 보려는 마음과 즉각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마음 등을 기를 수가 있다.28)

그뿐만 아니라, 설교 형식은 청중들이 설교에 참여하는 정도를 결정한다. 설교자가 어떤 설교 형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청중들은―자신들의 의식 속에서―설교자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기도 하고, 설교자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한다. 즉, “똑같은 메시지를 여러 가지 다른 형식 속에 담아서, 청중들에게 어떤 형식에 있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하게 하고, 다른 형식에 있어서는 덜 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29)

한편, 설교 전체가 하나의 내러티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Eugene Lowry는 설교란 시간의 흐름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an event-in-time)이라고 정의하면서, 설교는 책보다는 연극이나 소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30) 따라서 설교자는 과학자가 되기보다는 이야기꾼(narrative artists)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이야기를 말해야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고, 이야기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에 근거한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설교의 플롯(plot)이라고 Lowry는 말한다. 플롯이란 설교를 만들기 위한 구성 또는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31)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의 플롯이 있다. 영화 “하이 눈”(High Noon)에서 사용된 것과 같이 불균형(discrepancy) 또는 긴장상태로 시작해서 알 수 없는 결말을 향해 가는 플롯이 있고, 매주 방영되는 TV 시리즈물과 같이 불균형으로 시작되지만,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플롯도 있다. Lowry는 설교의 플롯은 두 번째 종류의 플롯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매 주일 비슷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에 설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청중들은 이미 그 설교의 결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회중은 설교의 결말, 즉 문제의 해결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연관하여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32)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방영되는 TV 시리즈물을 보는 걸까?” 이것이 플롯과 관련해 Lowry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같은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 결말까지의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주 TV 앞으로 모여든다. 즉, 결말이 미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잘 전개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의 흥미를 얼마든지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Lowry는 설교 역시 이렇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 주일 같은 결말에 이를지라도,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 구성을 잘 만들어낸다면 청중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고 그들이 설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만들기 위해 그는 5단계로 구성된 설교 형식을 제안한다.

1. 평형을 흔들어놓기(upsetting the equilibrium)
2. 모순 분석하기(analyzing the discrepancy)
3. 해결의 단서 드러내기(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4. 복음 경험하기(experiencing the gospel)
5. 결과 기대하기(anticipating the consequences)33)

Lowry는 설교가 이와 같은 5단계를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34) 그리고 이와 같은 설교 형식은 “해결되지 않은 긴장 혹은 미결 상태로 최종적인 해결이 드러날 때까지 청중의 관심과 주목을 붙잡는 힘”을 가진다.35)

현상학적 설교학(Phenomenological homiletic)의 주창자인 David Buttrick도 설교 형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Buttrick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선포를 “인간의 언어가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에 영향을 준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 아래 설교가 인간의 의식에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36) 한마디로, 그의 관심은 “설교가 어떻게 청중의 의식 속에 믿음을 형성하는가”이다.37) Buttrick 역시 설교 플롯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Lowry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Buttrick은 Lowry가 제시한 5단계 설교 형식과는 다른 설교의 “움직임”(moves)을 강조한다. 설교의 움직임이란 설교는 하나의 개념에서 또 다른 개념으로의 움직임이라는 의미이다.38) 한편, Buttrick은 인간의 의식을 카메라의 렌즈와 같다고 생각한다.39) 그렇다면 Buttrick이 주장한 “설교는 개념을 통한 움직임”이라는 설교의 정의와 “인간의 의식은 카메라의 렌즈와 같다.”는 말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Thomas Long은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설교의 형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설교는 구체적인 개념의 흐름이다. 설교자는 한 가지 개념을 제시한 후 계속해서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설교자가 이와 같이 새로운 생각을 제시할 때마다 청중은 마음의 카메라에 그것을 담아내기에 바쁘다. “여기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난다. 설교가 끝난 후 청중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가 빈약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면 그들에게는 아무렇게나 찍은 스냅 사진들만 쓰레기 더미와 같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설교가 훌륭하게 구성되었다면 일련의 장면들이 생동감 있게 이어지는 영상 슬라이드와 같이 일관성 있는 이해의 틀이 형성될 것이다.40)

Paul Scott Wilson 역시 설교는 하나의 플롯에 따라 움직임을 갖는 영화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41) 이런 그의 생각은 앞서 언급한 Eugene Lowry나 David Buttrick의 생각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페이지’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설교가 영화를 만드는 작업보다는 에세이를 쓰는 작업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설교는 에세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Wilson은 에세이와 영화의 작업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페이지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글로 쓴다는 점에서 설교는 에세이와 닮아 있지만 시간에 따른 장면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설교는 영화와 닮아 있다. 따라서 Wilson이 말하는 페이지는 이미지와 글을 모두 담아내는 설교에 대한 하나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에 근거해 그는 설교의 형식을 네 페이지식으로 구성하라고 조언한다. Wilson의 네 페이지 설교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42)

페이지 1: 성경 본문 속의 문제(trouble in the biblical text)
페이지 2: 세상 속의 문제(trouble in the world)
페이지 3: 성경 본문 속의 은혜(grace in the biblical text)
페이지 4: 세상 속의 은혜(grace in the world)

Wilson이 이와 같은 설교 구조를 제시하는 이유는 설교가 기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다.43) 그는 많은 설교에서 하나님이 사라져버렸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이 실종된 설교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그런 설교는 결국 복음을 잃어버리게 된다.44) 따라서, 가장 먼저 성경 본문과 세상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드러내고(trouble in the biblical text and the world), 이어서 동일하게 성경 본문과 세상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품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뒤(grace in the biblical text and the world), 그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라고 Wilson 교수는 주장한다.

오늘날 북미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재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Witness of Preaching의 저자 Thomas Long 교수 역시 설교 형식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효과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45) 마치 “자동차의 기어가 소리 없이 자동 변속을 하듯 설교의 형식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설교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실제적인 동력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46) 그 또한 Davis와 마찬가지로 설교 형식과 설교 내용은 결코 별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즉, 예술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듯이 설교의 형식과 내용 역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형식과 내용을 별도의 실체로 생각하기보다는 내용의 형식(form of the content)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며” 그런 의미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지만 설교의 형식은 설교의 외양을 형성하고 설교에 힘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설교를 설교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47)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설교학자들이 설교 형식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교 형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첫째, 설교에 대한 그들의 정의(definition)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이 가진 설교의 정의는 이전 시대의 설교의 정의와 다르다. 그들은 설교자가 성경에서 복음에 대한 정보(information)를 발견해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것(transfer)이라고 생각했던 설교에 대한 이전 시대의 정의 대신 설교란 성경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주셨던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event)이라고 이해한다. 즉, 설교는 하나님 사건(God’s Event) 또는 언어 사건(Word Event)이라는 것이 설교에 대한 이들 학자들의 공통된 정의이다.48) 이들은 이런 설교의 정의에 입각해 하나님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설교 형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설교를 이해하는 신학, 즉 그들의 설교신학이 이전의 설교학자들이 가졌던 설교신학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며, 그들이 설교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설교의 목적―복음의 전달에서 복음의 경험으로―역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49)

둘째, 앞서 언급한 설교학자들이 가지는 설교 형식에 대한 관심은 변화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복음이 좀더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설교 형식에 앞서 복음이며, 그 복음을 어떤 그릇에 담아 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들이 설교 형식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다. 때문에 크레독은 설교 형식에 대한 연구는 설교를 복음에 적합하도록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조한다.50) Davis 역시 “사람들은 복음에 순순히 반응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설교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 형식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51) Long 교수 역시 설교 형식은 복음의 본질과 무관해서는 안 된다며, “설교의 외형적 틀(shape)을 통해서 복음이 표현되는데 한편으로는 복음을 조작하거나 기만함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손상시킬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자체의 예술성을 지지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52) 즉, “형식은 설교의 내용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복음 전달을 용이하게 하거나 훼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53)

복음이 충실히 선포되었을 때는 언제나 신앙적 요구와 청중의 구체적인 상황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적절한 형식이 요구되어 왔지만 이러한 형식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가변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설교 형식이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특정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로부터 나온다. ... 설교자는 특정 성경 본문으로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설교의 형식과 관련하여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성경의 주장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증거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당연히 자신이 전하는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회중이 그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회중이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언제나 그들이 듣고 있는 진리와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야기, 논리적 진술, 역사적 설명, 수사학적 질문, 시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기법이나 구두로 전달되는 문학적 장르가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정 상황에 처한 특정 회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완수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설교 형식은 설교를 둘러싼 특정 상황에 맞추어 재단한 맞춤복이 되어야 한다.54)

John Stott 목사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떤 기술에 정통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이루려는 신념이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55) 즉, 설교에 있어서 방법론에 앞서 설교신학이 먼저 필요하고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만약 우리의 신학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모든 기본적인 통찰력을 갖게 되며, 그 일을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자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56) 지금까지 살펴본 현대 설교학자들의 설교 형식에 대한 관심은 John Stott 목사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설교 형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새로운 설교의 정의와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설교 형식에 대한 현대 설교학자들의 관심은 설교에 대한 그들의 설교신학―복음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하는 사건―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복음 체험이라는 설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IV. 영산의 설교 형식과 설교신학과의 상관성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 형식에 대해 여러 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설교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같은 설교 형식을 요구하는 설교신학, 곧 설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통찰력이었고, 나아가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영산의 설교 형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 본 논문의 주된 주장이다. 즉, 영산 역시 자신의 설교신학을 근거로 설교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산의 설교 형식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학자들이 영산의 설교에 대해 다루었지만, 영산의 설교 형식에 대해 언급한 학자들은 전무하다. 그러나 전무하다는 것은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기에, 영산의 설교 형식을 다룬 두 편의 논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미아 박사의 글을 살펴보자. 이미아 박사는 영산 설교의 구조를 분석한다.57) 이 박사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을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선포로서의 케리그마요, 다른 하나는 케리그마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가르치는 디다케이다.58) 그리고 영산의 설교의 구조가 선포(케리그마)와 가르침(디다케)의 조화를 이루는 설교라고 평가한다.59)

이미아 박사의 논문에서 영산의 설교 형태를 케리그마와 디다케로 나누고 있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 박사의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형태에 따른 설교 분류라기보다는 설교 내용에 따른 분류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한편, 심두진 박사는 설교의 기본 형태를 주제 설교, 강해 설교, 본문 설교라고 구분한다.60) 설교 형식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 기준은 설교의 자료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다. 주제 설교는 말 그대로 주제를 중심으로 설교를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풍부한 체험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통찰력과 주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설교를 가름하는 기준”이다.61) 강해 설교는 “성경의 한 구절이나 몇 절에서 중요한 사상을 취하여 그것을 해석,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설교이다.”62) 본문 설교는 “한 절이나 두 절의 성경 구절에 기초한 설교로서 주제와 대지를 모두 본문에서 취하는 것”이다.63)

이런 전제를 중심으로 심두진 박사는 영산의 설교 형태를 분석하면서 영산의 설교는 주제 설교, 본문 설교, 강해 설교 등 다양한 설교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64) 그는 영산이 신학교 졸업식, 교역자 및 임직원 세미나 등 교회기관 특별예배와 국내와 해외의 대규모 복음화 성회 등에서는 본문 없이 자유롭게 주제 설교를 행했던 반면 수요예배나 금요예배 등 정기예배에서는 주로 강해 설교를 행했다고 분석한다.65) 한편, 영산이 주로 사용했던 설교 형태는 본문 설교였다는 것이 심두진 박사의 결론이다.66) 특히, 조용기 목사의 설교전집에 들어있는 설교 대부분은 본문 설교 형태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영산은 설교의 형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심두진 박사가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영산 조용기 목사 역시 설교와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설교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저서 Spiritual Leadership for the New Millennium에서 피력하고 있다.67) 그는 설교자가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좋은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좋은 요리사와 같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 늘 연구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68) 그리고 이런 강조와 더불어 세 가지 종류의 설교에 대해 언급한다. 가장 먼저 영산은 강해 설교에 대해 말하는데, “강해 설교는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성경의 사건이나 단락을 성도들에게 가르칠 목적으로 계획된 설교”라고 정의한다.69) 이런 설교자는 설교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영산은 본문 설교를 언급하는데, 설교의 아웃라인(outline)이 설교자가 택한 성경 본문으로부터 오는 설교를 의미한다. 이 설교를 설명하기 위해 영산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예로 들고 있다. 만약 한 설교자가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을 설교한다고 했을 때,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이어서, 설교자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설명한다. 이 세상은 타락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는 세상임을 말할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타락한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설교자는 이런 세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졌음을 설교해야 한다.70)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본문 설교는 설교의 흐름이 성경 구절의 흐름과 일치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산 조용기 목사는 주제 설교에 대해 말한다. 주제 설교는 설교자가 정한 주제를 설교를 통해 설명해 나가는 설교이다. 영산은 주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연역적인 방법(deductive method)과 귀납적인 방법(inductive method)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71) 이 주제는 다른 두 설교 형식―강해 설교와 본문 설교―보다 더 자유롭다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주제 설교를 하는 경우 설교자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나 성도들이 듣기 원하는 주제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다.72)

어떤 의미에서 영산의 설교 형식에 대한 심두진 박사의 분석은 설교에 대한 영산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제 설교, 강해 설교, 본문 설교로 설교를 나누는 것은 설교의 특징에 따른 분류법일 뿐 형식에 따른 분류법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달리 말하면, 심두진 박사와는 달리 조용기 목사는 이들 설교 방법들을 설교의 ‘종류’(sort)라고 이야기할 뿐, 설교의 ‘형식’(form)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영산은 자신의 설교론에서 삼대지 설교를 좀더 괜찮은 설교 형식으로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설교자가 설교의 본문을 어떻게 조직하는가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 본문을 세 개 또는 네 개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73) 그러나 본문이 네 개 이상으로 나뉠 경우, 설교가 너무 길어지거나 너무 복잡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74) 즉, 그는 주제 설교, 강해 설교, 본문 설교와 같은 설교의 종류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설교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설교 형식으로 3대지 설교 형식을 추천한다. 따라서 영산의 설교를 형식에 따라 주제 설교, 강해 설교, 본문 설교로 나누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산의 설교는 어떤 형식을 띄고 있는가? 설교 형식을 놓고 보면 영산의 설교는 대부분은 3대지 설교(three-point sermon)이다. 현대 설교학에서 3대지 설교는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3대지 설교가 가지는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째, 3대지 설교는 세 개의 주제가 서로 엉성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설교 전체의 통일성을 갖기 힘들다. 둘째, 3대지 설교의 경우 선포라기보다는 강의에 가깝고, 따라서 설교자는 고압적인 반면 청중들은 매우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3대지 설교는 성경 본문의 내용으로부터 세 개의 대지를 축출해서 설교함으로써 성경 본문이 갖는 보다 다양한 의미들 또는 이야기성을 잃어버리곤 한다. 넷째, 3대지 설교의 경우 복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서 경험되기보다는 하나의 정보로 주어질 위험성이 있다.75)

물론 영산 조용기 목사가 사용하는 3대지 설교 역시 위에서 언급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 3대지 설교라는 이유로 모든 설교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만약 3대지 설교라고 해도 그것이 설교자의 설교신학과 설교 목적을 잘 수행할 수만 있다면 3대지 설교 형식도 얼마든지 좋은 설교 형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학자들은 설교 형식의 선택은 철저히 설교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76) 그리고 그런 선택의 근거는 설교신학과 관계되며 나아가 설교 목적, 즉 청중들이 복음을 잘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되도록 설교를 구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 이런 의미에서 3대지 설교 형식은 영산의 설교신학에 근거하고 있고 설교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영산의 설교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영산에게 있어 설교의 토대가 되는 설교신학(또는 설교철학)은 매우 중요하며, 그는 늘 설교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77) 그는 설교의 토대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목회나 설교에 있어서 한 베이스, 즉 한 철학이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거기에 받아들여 가지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끌려 가면 안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강조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베이스로 삼아 강하게 설교할 수도 있고, 성결교 같은 데서 성결을 베이스로 삼아 강하게 주장할 수 있고,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와 은사를 베이스로 삼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각기 자기의 주장하는 베이스를 양보할 필요가 없습니다.78)

이어서 영산은 성경,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설교를 행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 세 가지 설교 중심점으로부터 ‘오중복음’을 도출해냈다고 말한다.79) 그리고 이 오중복음이야말로 자신의 설교의 토대, 즉 설교신학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 오중복음이 저에게는 설교의 철저한 베이스입니다. 오중복음이란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대속인 죄를 용서함 받는 것과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과 질병에서 치료받는 것과, 저주에서 해방을 얻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저는 제가 무슨 설교를 하든지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을 저의 설교의 가장 중심적인 베이스로 삼아 이 위에 모든 것을 형성해 나갑니다.80)

그렇다면 이런 설교신학을 중심으로 그가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교인들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성도가 되게 하고 국내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81) 교인들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케 되는 축복이란 그의 삼중축복의 신학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그의 설교신학을 이루는 또 다른 축이 된다. 즉,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그의 설교신학의 근간이 된다는 말이다. 설교신학에 대한 이와 같은 영산의 생각은 그의 복음 이해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영산에게는 분명한 설교신학 이해 이전에 분명한 복음 이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라고 이해한다.82)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이해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 죄로 말미암아 현세에서는 가난과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겪게 되고, 내세에서는 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되는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대신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인간은 누구든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사역 초기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에 임하였고, 오늘날 성령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구체적인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중심이요, 복음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천국을 체험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죄가 없는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장차 병이 없는 부활의 천국이 다가올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귀신의 압박이 없는 천국을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후에 우리 몸이 부활하여 영화롭고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나아가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심으로 다시는 눈물과 탄식과 애통이 없는 평화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은 죄사함의 은총과 종말론적 구원의 복과, 의와 희락과 평강이 가득한 천국 복음인 것입니다.83)

조금 길게 인용이 되긴 했지만, 조용기 목사가 이해한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리고 구원 이후의 축복(영, 혼, 육의 축복과 영생을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산 조용기 목사는 이와 같이 복음에 대한 자기 나름의 뚜렷한 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정의에 근거해 자신만의 설교신학―오중복음·삼중축복―을 세우고 있으며, 그 설교신학을 통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교를 행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오중복음·삼중축복이 그의 설교신학의 근간이 될 때,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타락-구원-축복’이라는 설교 형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84) 즉, 그의 설교가 3대지 형식을 취하는 것은 그의 복음 이해와 그 복음 이해에 근거한 오중복음·삼중축복이라는 설교신학이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를 취하기 때문이다. 영산에게 자신의 설교신학을 담아내기에 가장 최적의 설교 형식이 3대지라는 말이다.

한편, 영산의 설교신학이 갖는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는 David Buttrick의 현상학적 설교방법론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Buttrick은 설교란 하나의 개념에서 또 다른 개념으로의 움직임(movement)이라고 강조했다.85) 영산의 설교 역시 개념에서 개념으로 움직이는 설교 형식을 갖는다. 즉, 타락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옮겨가고, 마침내 축복이라는 개념으로 종결된다. 이 움직임이 청중들을 설교로 초대하고,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청중들은 먼저 죄로 인한 자신들의 삶의 비극―영, 혼, 육의 비극―을 보게 되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더 큰 비극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이 영산 설교가 제시하는 첫 번째 ‘타락’이라는 개념이다.86) 이어서 영산의 설교는 ‘구원’이라는 두 번째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이 전개되는 단락에서 청중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를 깨닫고,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죄 용서함의 치유를 경험한다.87) 그리고 ‘축복’이라는 개념이 펼쳐지는 마지막 단락에서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 지금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복을 누리기를 소원하게 된다.88)

또한 형식적으로 3대지인 그의 설교가 3대지 설교에 대한 현대 설교학자들의 비판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3대지 설교에서 각 대지는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 속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하나의 움직임(movement) 또는 플롯을 구성하기 때문이다.89) 영산의 설교가 갖는 이런 특징은 “경우에 따라 우리는 전통적인 삼대지 설교 형식을 통해서 플롯이 전개되어 가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는 유진 라우리의 주장과도 맥이 닿아 있다.90)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를 갖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설교에 동참해 복음을 듣고,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산의 설교는 3대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또한 3대지 설교 형식이 그가 가진 설교신학을 가장 잘 대변해주며, 그가 가진 설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최적화된 설교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실제 영산의 설교에서도 그의 설교신학과 설교 형식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이를 위해 영산의 설교 몇 편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는 설교는 요한복음 5장 1-9절을 설교 본문으로 행해진 설교이다.91) 영산은 이 설교의 서두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았던 병자를 소개한다. 그리고 서두의 끝부분에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현대판 베데스다의 연못인 우리의 심령을 끓어오르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생명을 얻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다음의 3개의 대지로 논지를 펼쳐간다.

1. 뜨거운 소원
2.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임
3. 양문으로 들어감

영산은 첫 번째 대지에서 베데스다 연못의 행각에 모인 사람들처럼 뜨거운 소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뒤에, 두 번째 대지에서 “베데스다의 연못”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죄를 고백하고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세 번째 대지 “양문으로 들어감”에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삶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은 쫓겨가며, 절망은 소망으로, 흑암은 광명으로, 죽음은 삶으로, 패배는 승리로 변화된다.”고 선포한다.92)

이 설교는 3대지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3개의 대지가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현대판 베데스다의 연못인 우리의 심령을 끓어오르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생명을 얻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공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희망의 메시지로 마감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신 생활이 힘들고, 소경 되고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되어 고통 중에 있을 때 여러분은 오늘날도 양문 곁 베데스다의 연못에 와서 물의 동함을 기다려야 합니다.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모든 죄를 다 십자가 밑에서 회개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정함을 받고, 그 다음 깨어짐으로 양문을 통과하고, 제물이 되기 위해 순종으로 제단에 올라가는 이 과정을 여러분은 지나가야 합니다. ... 이 과정을 통할 때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믿음이 주어지고 여러분의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생활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빛이 생기고, 궁창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해와 달과 별이 생기고, 물고기가 생기고, 새가 생기고, 짐승이 뛰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 여러분의 열매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93)

이 설교는 앞서 언급한 영산의 설교신학의 구조, 곧 오중복음·삼중축복에 근거한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에 정확히 일치한다. 즉, 이 설교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와 사망과 질병의 문제를 질문하면서(타락),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소원을 가져야 하는데, 그 소원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다고 결론을 내리고(구원), 이어서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에 주어지는 여러 가지 기적과 은혜를 선포한다(축복).

“해방과 자유와 기쁨의 부활”이라는 설교 역시 영산의 설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94) 바울서신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을 본문으로 선포된 이 설교는 앞서 살펴본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는 설교처럼 질문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어린 시절 누구나 들었을 법한 처녀를 잡아먹는 짐승 이야기로 시작해서, 본론에서 다음과 같은 3개의 대지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간다.

1. 아담 이후 죽음의 동굴로 인류를 끌어가고 있는 마귀
2.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복

이 설교 역시 아담 이후 죄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드러내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선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복에 대해 말한다. 이 설교는 앞서 언급한 영산의 설교신학의 구조, 즉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3대지 설교 형식을 통해 영산은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건드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성경말씀을 통해 해결해주며, 마지막에 희망을 선포하며 설교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런 설교 형식은 그의 설교 대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3대지 설교 형식을 사용하지 않는 설교일지라도, 이런 설교신학에 근거한 3대지의 요소들, 즉 ‘타락-구원-축복’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2008년 6월 8일 주일에 행한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질 때”라는 설교를 보자.95) 순복음가족신문에 실린 이 설교에는 다음과 같은 3개의 대지가 있다.

1. 염려 근심이 소용없는 것을 깨달으라
2. 마음에 배수진을 쳐라
3.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

그러나 설교 내용을 녹화한 동영상을 보면 이 설교에는 따로 대지가 없다. 순복음가족신문에 대지가 나눠져 있는 것은 이전부터 3대지 형식으로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신문에 실어 왔던 편집상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순복음가족신문에 나오는 대지는 영산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신문 편집자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마가복음 9장 17-24절을 근거로 행해진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믿음에 대한 내용이다. 영산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문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 안 믿어질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어서 영산은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를 설명한 후에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질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갖자.”고 성도들을 격려한다. 이어서 영산은 그렇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제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의 강을 건너왔다면 다리를 불태워버려서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마음의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염려, 근심, 불안, 공포가 태풍처럼 불어 닥칠 때 우리의 마음은 바다 물결처럼 흉흉하고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찾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파멸에서 건져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이면 뽕나무도 뽑혀서 바다로 가고 태산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키가 장대하여 철갑옷을 입고 창이 아무리 커도 다윗의 물맷돌 하나에 거꾸러진 것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암울하고 무서워도 겨자씨만한 믿음 앞에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영산의 설교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질 때”는 3대지 설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설교 역시 타락-구원-축복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그의 설교 목적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산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 암울한 현실 속에 있는 성도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복된 소식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희망과 소망을 품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길 소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에서 현대 설교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설교신학과 설교 형식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를 근거로 영산 설교가 갖는 설교신학과 설교 목적이 그의 3대지 설교 형식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의 형식이 설교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며, 청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설교 형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형식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 곧 설교신학과 관련이 있으며, 설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설교의 목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영산이 택하고 있는 3대지 설교 형식 역시 그와 같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즉, 영산의 설교 형식이 3대지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그의 설교신학이 그의 복음 이해에 근거한 오중복음·삼중축복이며, ‘타락-구원-축복’이라는 구조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의 설교신학이 가지는 ‘타락-구원-축복’의 구조는 3대지 설교 형식을 요구하고 있으며, 3대지 설교 형식이야말로 그의 설교신학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설교 형식을 통해 청중들은 타락-구원-축복으로 움직여가는 설교의 여정에 동참할 수 있고, 그 여정 속에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비참한 현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나아가 구원 이후에 그들 삶에 허락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영산의 설교에서 설교신학과 설교 형식이 갖는 관계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설교 형식이 설교를 위한 단순한 장식이 아니며, 오히려 설교신학을 담아내는 도구이며, 설교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임을 보았다. 그렇기에 설교자들은 복음에 근거한 건강한 설교신학을 가져야 하며, 그 설교신학을 가장 잘 표출해낼 수 있는 설교 형식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즉, 설교자들은 설교 형식이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성도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잘못된 설교 형식을 사용할 경우 성도들이 복음을 듣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Notes
1) 본 논문에서 영산의 설교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영산신학저널에 기고된 논문들 중에서 보다 설교학적인 연구에 충실한 논문들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설교학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본 소논문의 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거나 영산신학저널에 게재되지 않은 논문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문들도 영산 설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생각한다. 홍영기, “4차원의 영성과 조용기 목사의 설교,” 교회성장연구소 편,『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동력』(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8), 73-95; 서정민,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설교사 이해: 모성적, 민중적 성령 운동가 조용기의 설교를 중심으로,” 박명수 외,『한국교회 설교가 연구 1』(서울: 한국 교회사학 연구원, 2000), 57-88; 임종달, “조용기 목사의 창조적인 설교 구상,” 영산 조용기 목사 성역 40주년 기념논총집 간행위원회,『영산 조용기 목사 성역 40주년 기념논총』(서울: 서울말씀사, 1996), 305-43.
4) Ibid., 20.
5) Ibid., 20-21.
6) Ibid., 21-22.
8) Ibid., 69-83.
9) Ibid., 79.
10) Ibid., 87.
11) Ibid., 124.
13) C. H. Dodd는 그의 저서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에서 케리그마의 내용에 대해 7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①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시대(the new age)가 도래하였다; ②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 ③ 예수님은 현재의 악한 세대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약의) 말씀을 따라 죽으셨다; ④ 예수님은 장사되셨다; ⑤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 ⑥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으로 높임을 받으셨다; ⑦ 예수님은 인간들의 심판자이며 구원자로 다시 오실 것이다.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 (London: Hodder & Stoughton, 1936), 28. 때때로 Dodd는 케리그마(kerygma, 초대교회의 선포)와 디다케(didache, 초대교회의 가르침)를 너무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J. B. Polhill은 “초대교회에서 선포와 가르침이 완전히 구분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J. B. Polhill, “Kery-gma and Didache,” in Dictionary of the Later New Testament and Its Development, Ralph P. Martin and Peter H. Davids, eds. (Downers Grove: IVP, 1997), 628. 심두진 박사는 C. H. Dodd의 책을 직접 인용하는 대신 정용섭,『교회갱신의 신학』(서울: 대한 기독교출판사, 1980)을 통해 간접 인용하고 있다.
15) Ibid., 126.
17) Ibid., 48.
19) Ibid., 150-51. 단순발화 행위는 “음성이나 문자로 표시된 언어 행동”을 의미하고, 의미수반발화 행위는 “단순발화 행위를 하면서 행하는 행동”이며, 효과수반발화 행위는 “의미수반발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행동”이다.
20) Ibid., 147.
22) Ibid., 3.
23) Ibid., 4-5.
24) Ibid., 98-162.
26)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54-57.
28) Ibid., 205-206.
29) Ibid., 206.
31) Ibid., 22-26.
33) Ibid., 26.
34) Lowry는 이후에 출판한 그의 책『신비의 가장자리에서 춤추는 설교』(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에서 5단계 설교 형식을 4단계로 줄여 제시했다: 갈등(Conflict), 심화(Complication), 급반전(Sudden Shift), 해소(Unfolding). 유진 라우리,『신비의 가장자리에서 춤추는 설교』주승중 역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08), 81-130.
39) Ibid., 39.
42) Ibid., 16-18.
43) Ibid., 18.
44) Ibid., 20.
46) Ibid.
47) Ibid., 170.
54) Ibid., 193-95.
56) Ibid.
57) 이미아,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의 구조와 내용적 특성,” 270-75. 이미아 박사의 논문은 설교학이 아니라 교육학 논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의 논문을 언급하는 것은 이 논문에서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갖는 형식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논문은 조용기 목사의 설교 형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학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58) Ibid.
59) Ibid.
61) Ibid., 148.
62) Ibid.
63) Ibid., 149.
64) Ibid.
65) Ibid., 149-50.
66) Ibid., 150-51.
69) Ibid.
70) Ibid., 73-74.
71) Ibid., 74.
72) Ibid.
73) Ibid.
74) Ibid.
78) Ibid.
80) Ibid.
81) Ibid.
87) Ibid., 404-405.
88) Ibid., 406-409.
89) 영산의 설교가 갖는 플롯과 내러티브성에 대한 내용은 조지훈, “영산 설교의 내러티브성 연구,” 64-79을 참조하라. 영산 자신도 설교가 갖는 진행성에 언급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훌륭한 설교를 구성하려면 그 구성에는 진행성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는 처음부터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며 점차적으로 그 흥미는 절정을 향해 발전되어야 합니다. 한 대지(大旨)에서 다른 대지로 넘어갈 때는 그 관심을 점차 확대시키거나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래서 청중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설교자의 전제에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조용기,『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268.
92) Ibid., 144-45.
93) Ibid.,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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