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8, No. 0, pp.45-85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19
Received 29 Mar 2019 Revised 06 May 2019 Accepted 13 May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6.48.45

해방 후 북한의 3·1절과 기독교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mspark@stu.ac.kr
North Korea’s March First Movement Day and Christianity after Liberation
Park, Myung Soo

초록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은 처음 맞이하는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기 때문에 실패했으며, 해방을 맞아 이제 진정한 새로운 혁명이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공산당의 주장을 기독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독교는 3·1운동은 전 민족의 독립운동이며, 새로운 나라는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공산당 주최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1946년 3·1절 기념예배는 북한의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공산 정권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충돌은 평양만이 아니라 의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해방 후 3·1절은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날이었다.

같은 날 평양역전에서 북한 정권은 공식적으로 3·1절 행사를 했는데 여기에서 김일성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1946년 초부터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기독교인·학생들과 협력하여 북한의 김일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김일성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여 통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한 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 정권은 그 후 3·1절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Abstract

After liberation, the Communist Party of North Korea tried to strengthen their political position with the March First Movement Day ceremony. They asserted that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had failed because it was a bourgeois movement and that this ceremony following the liberation would be beginning of a truly new revolution. It was difficult for Christianity to accept this claim by the Communist Party. Christians viewed the March 1st Movement of 1919 as an independent movement of the whole nation and that the new nation should succeed its spirit.

Christians with this position did not attend the memorial ceremony hosted by the Communist Party, but on their own, they worshiped in memorial of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is way, the memorial worship service held in 1946 at Jang Dae-Hyun Church marked North Korean Christians’ opposition of the communist regime. These conflicts occurred not only in Pyongyang, but also in other regions including Uiju. The memorial of March First is a day when Christians fought against communism.

When the March First Movement memorial ceremony was officially held at Pyongyang station by the North Korean Regime, Kim Il Sung was tried to be assassinated. From early 1946, South Korean nationalists thought that they should work with North Korean Christians and students to remove Kim Il Sung from power. The nationalists believed Kim Il Sung supported the Trusteeship, would establish a communist regime, and ultimately hinder reunification. This incident shocked the North Korean regime, and from then on, the regime removed March First Movement from the official ceremonies of the state.

Keywords:

Christianity in North Korea, North Korea Communism, Political Operation Agency, March First Movement, Kim Il Sung, Shin Seok Ku

키워드:

북한 기독교, 북한 공산주의, 정치 공작대, 3·1절, 김일성, 신석구

I. 들어가는 말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세계만방에 독립의 의지를 밝힌 한국 근대사의 가장 빛나는 민족운동이다. 해마다 3월 1일은 이런 민족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날이다. 그중에서도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919년 온 민족의 소원이 일본의 패망으로 이제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의 3·1절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당면 과제를 놓고 남한 사회가 심각하게 갈등을 겪게 만들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46년 3·1절은 좌익과 우익이 3·1절의 성격을 놓고 역사 전쟁을 벌였으며, 1947년 3·1절은 임시정부와 인민위원회가 각각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싸웠고, 1948년 3·1절은 남한의 단독 선거를 놓고 이승만과 그 반대 세력이 논쟁을 벌였다. 따라서 3·1절 기념행사는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진행되었던 것이다.1)

그러면 한반도의 또 다른 반쪽인 북한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사실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던 천도교와 기독교는 당시 북한의 서북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교세를 갖고 있었으며, 기미독립 당시 전국에 서 평안도는 입감자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2) 그중에서 평양은 3·1운동 의 중심지였다. 해방 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3·1운동의 계승자라고 생각하 였다. 그러면 이들이 해방을 맞이하여 당시 새롭게 등장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 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특별히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해서 인민공화국 을 만들려는 공산주의 세력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대로 부르주아 세력인 33인 이 주도한 3·1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것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 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북한 기독교가 당시 등장하고 있던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 과 어떻게 만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평 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3·1절 기념예배를 둘러싼 갈등과 이어서 평양역전에서 벌어진 북한 정권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벌어진 김일성 저격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갈등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일성의 기념사와 신 석구의 방송 및 황은균의 글들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3)

현재까지 해방 후 북한의 3·1절 행사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세력과 갖는 관계에 대해서 몇몇 연구서들이 언급하고 있고,4) 특별히 1946년 3월 김일성 저격사건은 대중매체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5) 이것을 단독으로 연구한 논문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증언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북한연구소에서 1990년에 출판한『북한민주통일운동사』의 평안남도편과 평안북도편이며, 기독교와 관련된 것으로는 김흥수가 편집한『해방 후 북한교회사』가 있다.6) 여기에 대한 상당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1차 사료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자료는 날짜와 인원 등에 있어서 상당한 오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1946년 3·1절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자료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미군정의 북한정보 보고서라고 생각한다. 3·1운동 직후 월남한 기독교 성직자에 의해서 보고된 이 보고서는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종합적으로 알려주고 있다.7) 필자는 이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한상동 목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보고서에 유일하게 한상동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며, 김양선은 한상동이 3·1운동 전후하여 월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8) 미군정 보고서는 이 보고서가 3·1운동 직후에 월남한 기독교 성직자에 의해서 보고되었다고 밝힌다.

최근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이 공동으로 3·1운동을 기념 하는 행사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여기에 응하지 않아 백주 년 공동행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있 었던 3·1절 행사를 살펴봄으로써 3·1절을 둘러싼 남북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먼저 차이를 인식해야 그다음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도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II. 해방 후 소련군의 진주와 기독교 민족주의와의 갈등

1946년 3·1절은 북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소련이 수립한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한반도에 친소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9) 그 뒤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작전선으 로 38선을 만들기로 합의했을 때, 소련은 한반도 북부에 친소 정부를 세우려고 계획했다. 그리고 이어서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 M. Chistyakov)에게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라고 명령을 내렸 다.10) 이 명령을 받은 치스차코프는 10월에 북한5도인민위원회를 개최하고, 이것을 통해서 북한에 하나의 정부를 만들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북한 5도인민위원회의 수장격인 평남인민정치위원장 조만식이 위원장직을 거부함으로써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조만식 대신에 김일성을 내세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46년 봄은 본격적으로 인민위원회의 정치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면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민족주의자들은 어떤 행동을 했는가? 원래 해방 직후 북한에 만들어진 것은 건국준비위원회였고, 그 중심은 평양이었다. 당시 북한의 민족지도자는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였고, 그는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조만식과 함께하는 당시 북한의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중경의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고,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남북한이 하나의 중앙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조만식의 생각은 북한에 친소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소련군의 생각과 달랐다. 따라서 조만식은 소련군이 주도하는 북한5도인민위원회의 위원장직을 거절하였다.11) 조만식은 만일 북한에 독자적인 중앙 행정조직이 생기면 이것은 자연적으로 한반도를 분열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조만식은 당시 통일전선의 차원에서 기독교와 중산층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당을 만들자는 김일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주당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열렸고, 조만식은 여기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를 공표하지 않았다. 조만식은 소련과의 연대보다는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12) 소련은 이것을 빌미로 해서 조만식을 가택연금을 시켜버리고 말았다. 결국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은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이 전면에 나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해방 직후 북한 특히 서북 지역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아직 소련군이 등장하기 전에 형성된 해방 직후 서북 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혹은 자치위원회) 위원장은 다 기독교인이었다. 평북은 이유필 장로, 평남은 조만식 장로, 황해는 김응순 목사였다.13) 이들은 처음에는 소련과 타협해서 건국에 이바지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인민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공산주의자들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기독교인들과 함께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는 평북의 기독교인들은 사회민주당을 만들어서 힘을 모아보려고 했지만 신의주 학생의거를 계기로 이것이 무산되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4) 조선민주당은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민주당은 조만식의 찬탁거부로 인하여 당수가 가택연금된 후, 그 뒤 조만식의 추종자들이 대거 월남함에 따라 중심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민주당은 오히려 공산당원 최용건이 중심이 되고, 기독교인 홍기주와 강양욱이 여기에 협조하여 좌익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본이 패망을 하면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반도 주변에는 미군 비행기들이 다녔고, 이것을 보면서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진주하면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윤하영과 한경직은 1945년 9월 26일 연합군 사령부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미군이 곧 들어오리라고 생각했고, 열렬히 그들을 기다렸습니다.”고 말했다.15) 하지만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것은 소련군이었고, 이들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려고 하였다. 이미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기독교는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 연락하여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 같은 일을 위해서 우선 북한의 가장 큰 교파인 장로교회는 12월 초에 이북5도연합노회를 만들어서 북한 교회를 대표해서 남한의 연합군 사령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남한에 귀국한 이승만과 임정 지도자들을 만나려고 계획하였다.16) 북한과 남한의 우익 세력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북한의 기독교는 소련군과 직접적으로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소련군 당국과 기독교의 직접적인 마찰은 조만식의 가택연금 직후인 1946년 1월에 일어났다.17) 북한의 공산당은 조만식의 가택연금 직후 평양의 지도적인 성직자들을 불러 회의를 가졌다. 그 목적은 기독교를 찬탁의 대열에 가담시키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신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침묵하는가?”라고 물었다. 평양의 지도자들은 조만식과 같은 패턴으로 대답하였다. 즉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며, 더욱이 세계의 동향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정권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공산당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다 많은 협조를 구한다고 협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평양 성직자들의 대변인격인 한상동 목사가 “왜 공산당의 기독교회에 대한 규제가 일제 강점기보다 더 심하냐?”고 강력하게 질문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 감옥에 갇혔다가 해방 후 석방된 평양 기독교의 지도자였다. 당시 공산당은 “모든 교회의 출판물과 집회는 인민위원회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공산당은 현재 북한에는 반소 삐라가 살포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회가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규제가 필수적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따라서 교회도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한상동 목사는 현실적으로 현재 북한에서 사경회, 부흥회, 청년집회 등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 내부적인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상동 목사는 일제 시대에도 이런 교회 집회를 허가받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교회는 인민위원회에 허가를 신청하지 않고 계속 집회를 강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종종 과거 일제 강점기와 현재 소련의 점령 상태를 비교하였는데, 현재 소련의 지배하에서 더욱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18)

한상동 목사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공산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복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왔다. 소련 군정 책임자는 교직자 모임을 소집해서 다시 한 번 소련의 종교정책을 설명한 다음에 앞으로 소련 군정과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이것을 위해서 최근에 새로 임명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총서기인 강양욱이 모든 교회 문제를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19)

이것은 북한 기독교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다 강양욱을 공산주의에 자신을 팔아버린 배교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양욱은 장로교 목사이지만 김일성의 친척으로서 북한 기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젊은이며, 러시아에 의해서 기독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인물이기 때문에 북한 기독교계로서는 그를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것은 거부되었다.20)


III. 기독교의 1946년 3·1절 기념예배와 북한 공산 세력

북한 정권과 기독교의 갈등은 소련이 앞으로 열릴 3·1절 기념행사에 기독교계를 향하여 함께 참여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독교계가 거부함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김일성과 북한 공산당은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을 해방군 소련을 찬양하는 행사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조선공산당은 1919년 3·1운동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33인의 애국지사에게서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을 통해서 발휘되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같이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3·1운동의 진정한 협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은 이 같은 정신으로 모든 북한 사람들을 모아서 성대한 행사를 하려고 계획했다. 이것을 위해서는 “위대한 해방자” 소련군 사령부의 주관 아래 모든 민족이 모여서 함께 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46년 3·1절 행사는 1919년 3·1절을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21) 2월 18일 북한 교육 당국은 방송을 통하여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이 같은 선전을 하면서 정부의 명령에 불순종할 경우에 많은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22)

하지만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소련군의 의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리해서 2월 21일 평양 시내의 교역자들의 모임인 평양시교역자회는 서문밖교회에 모여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와 감리교의 남산현교회였다. 3·1운동 당시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는 길선주요, 남산현교회의 담임은 신흥식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33인 중 장로교와 감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23) 이런 상황에서 평양의 기독교는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기념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3·1절 기념식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설립(2월 8일)을 축하하고 단합을 과시하려는 공산당의 계획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보고받은 김일성은 강양욱에게 명령하여 2월 25일 평양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마포기념관에 모아 놓고 정부가 주도하는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라고 했다. 이 소식을 미리 들은 교역자들은 2월 24일 장대현교회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기에 주동적인 인물은 장대현교회의 김화식 목사였다. 김화식은 3·1운동 때 아버지와 함께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서대문에서 옥고를 치렀고, 해방 직후에는 북한의 장로교를 대표하는 이북5도연합회 부회장이었다.24)

화식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설명하였다. “여러분 모두 공문을 받아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공산당에서는 3·1절에 김일성 광장에서 군중집회를 하자고 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기미독립운동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으킨 애국운동이기 때문에 그날 독립만세를 부른 유서 깊은 장대현교회에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리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인 줄 아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그 결과는 독자적으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박대선은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목사들은 만장일치로 김 목사의 제안을 가결했다.”고 말한다.25)

그다음 날인 2월 25일, 전날 장대현교회의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26) 박대선은 변인서, 김인준 등 당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서평양보안서에 구금되었고, 강양욱이 달려와서 소련군과 인민위원회가 평양역전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기독교가 참여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군을 환영하고, 새로 인민위원장에 선출된 김일성을 축하하자고 했다. 박대선은 이날 체포된 40명 중 끝까지 저항하여 유치장에 간 사람은 11명이라고 증언한다.27)

이런 상황 가운데 기독교는 공산 당국과 직접적으로 마찰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리해서 정부가 주관하는 3·1절 행사에 교역자들이 기독교의 공식적인 대표로가 아니라 개개인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교회는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 “교회 측의 종교적인 기념예배로 그날을 기념할 것”이라고 하였다.28) 하지만 이런 교회의 태도는 공산 당국에 의해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1절 행사를 앞두고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는 3·1절 행사에 참여할 수 없고,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단체는 민족반역자이다.”고 선언하였다.29) 이것으로써 이제 북한의 공산 당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장로교평양노회 산하 180개 교회가 모여서 면려청년회 대회를 열고 있었다. 면려청년회는 장로교의 청년연합회로서 일제 말에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12월 25일 성탄절을 기념하여 재건되었다. 이 면려회는 북한 지역 장로교 1,878개 교회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심은 바로 평양 청년면려회였다. 이 면려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조만식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산정현교회의 김현석 장로가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만식 장로의 가택연금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고 있었으며, 그의 석방을 위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고 했다.30)

당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청년면려회 강사는 당시 평양교계에서 촉망을 받던 젊은 목사 황은균(창동교회)이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3·1절을 기해서 대대적인 반탁독립운동을 벌일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미리 보안서에 알려져 일부 주요인물들이 체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은균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숭인상업학교 출신 고성훈과 거사를 다시금 모의하였고, 이들은 비밀리에 사람들을 각 교회에 파송하여 집회가 여전히 열린다는 사실을 알렸다.31) 오히려 교역자들의 체포 소식에 평양 기독교계는 더욱 하나가 되어서 이 행사를 진행시켰다. 이 행사를 막기 위해서 소련군은 헌병 수백 명을 동원해서 출입을 막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행사는 3월 1일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평양역에서 모인 정부 주도 행사의 예정 시간보다 1시간 빠른 것이었다. 모임은 순식간에 약 4,000명 정도가 되었다. 젊은 청년들이 찬송을 부르며 집회를 이끌었으며, 이북5도연합노회 서기인 김길수 목사가 예배의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를 했다. 황은균은 “이 식은 기념식이 아니라 30년 전에는 일제에게 독립을 요구했고, 오늘은 쏘련[sic]에게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탁통치 반대, 쏘련[sic]군은 나가라!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말했다.32) 설교 후에 여자 성도 한 사람은 강단에 올라와서 자신들의 교역자를 체포해서 구금하고 있는 소련 군정과 공산당을 규탄하였다. 그 뒤에 다시금 황은균의 설교는 지속되었다. 그 열기를 아무도 막기 어려웠다.33)

이런 현상을 보고 소련군은 상황이 위급하다고 생각해서 보안대 대원들을 불러 황은균을 체포하고, 모인 군중들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 청년들이 황은균을 호위하면서 태극기와 십자가를 들고 가두진출을 하였다. 여기에 고성훈과 계수영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숭인통 삼공양말공장 앞에 이르렀을 때, 소련군의 군용트럭이 이 시위대를 막았다. 그리고 곧 이어서 공산당의 중심인물인 김책이 나타났으나 뒤로 물러나고, 소련군 대좌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기독교계의 대표로는 고성훈이 나서게 되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황은균은 기독교인들은 절대 무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호소하면서 대신 찬송과 기도로 대항하였다. 소련군은 시민 대표와 시립도서관에서 협상하자고 회유했고, 기독교인들은 시립도서관에 집합하였다가 저녁 9시경에 해산하였다. 소련군은 만일 해산하지 않으면 특무사령부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신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대현교회에서 철야기도회를 진행하였다. 밤 11시경 다시금 보안대가 들어와서 황은균, 고성훈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남한 당국과 연락하는 단파 무선기를 발견했다며, 반동 음모를 꾸몄다고 혐의를 씌웠다. 하지만 이것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다시 석방되었고, 황은균은 그 후 월남하였다. 신자들은 계속 교회에 머물면서 집회를 계속하였고, 소련군은 교회를 지속적으로 감시하였다.34)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1946년 3·1절 기념예배는 공산 세력과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마찰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공산당과 기독교는 여러 가지 마찰을 경험하였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조만식이 가택연금된 상황에서 공산 세력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세력은 기독교였고, 기독교와 공산 당국은 3·1절 행사를 놓고 서로 격돌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공산 세력은 기독교와는 더 이상 협력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기독교도 공산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3·1절 기념행사는 평양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서북 지역에서 3·1운동에 기여한 기독교의 역할은 크다. 그중에서도 의주교회를 빼놓을 수 없다. 의주교회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세 사람의 기독교 대표를 배출한 역사적인 교회였다. 당시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은 2월에 만들어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인정받고, 친소 관계 형성 및 후속 개혁을 위한 예비 작업으로써 3·1절을 활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의주의 교회들은 여기에 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주동교회에서 이 지역의 신자 수천 명이 모여서 김석구 목사의 사회 아래 인민위원회 행사와는 별도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이 같은 행동은 인민위원회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이해했다.35)

공산당은 의주인민위원회 주최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수천의 군중들을 끌고 의주동교회에 들어와서 강단을 때려 부수며 교인들을 내어 쫓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김석구 목사를 끌어내다 달구지에 싣고, “민족의 반역자”, “미국의 주구” 등 모욕적인 문구를 목에 걸게 하여 시내를 일주하면서 갖은 야유를 했다. 의산노회장 김관주 목사는 소련의 이 같은 행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3월 17일 강력한 성토대회를 열었다.36)

이 같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의 마찰은 1946년 3·1절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1946년 3월 김일성 제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뒤에서 북한의 기독교인들과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반탁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연결고리가 된 사람이 바로 산정현교회의 김현석 장로였다. 이미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 활동(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임)을 도와온 김현석은 1947년 3·1절을 맞이하여 다시금 반소·반탁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47년 2월 월남한 김현석은 장대현 기념식의 주역이었던 황은균 목사를 만나 김구를 소개받고, 김구에게 1947년 3·1절을 기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받고, 독촉국민회의 의장이었던 조성환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월북하여 다시금 1947년 3·1절 행사를 하게 되었다.37)

김현석은 이미 가택연금되어 있던 조만식을 그의 아들인 조연창을 통하여 접촉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평양의 주요 성직자들인 장대현교회의 김화식, 남산현교회의 송정근과 같은 목사들을 만나 상의한 결과 1946년에 기념예배를 드렸던 장대현교회에서 다시금 기념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기념예배는 1947년 3월 1일 오후 7시에 모였는데, 예배 후에 송정근, 김현석 등이 반탁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설하였다. 이날 모임은 약 1,000명 가량이 참석하였는데, 집회 후에는 독립만세와 찬송가(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시위대원들이 화신백화점에 이르자 보안대원들이 발포하여 집회는 중단되었다.38)

1947년 3·1절 기념예배의 또 다른 의미는 당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기독교자유당의 창립을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기독교자유당은 1946년 11월 북한에서 주일에 선거를 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정치적인 단체를 결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1947년 봄 3·1절 기념예배를 전후한 시기였다. 여기에는 장로교를 대표하는 이북5도연합노회장 김진수와 부회장 김화식 목사, 그리고 감리교를 대표하는 서부연회장 송정근 목사가 참여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상 기독교의 공식적인 대표들이 당을 만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공산 정권 아래서 자신들의 존립을 얼마나 위태롭게 생각했는지를 반영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단체들은 나중에 소련군과 보안대에 의해서 해체되었지만 3·1절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라고 본다.39)

해방 후 3·1절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조만식이다. 조만식은 당시 우익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그는 1946년 초부터 연금되어 있었는데, 3·1절 기념예배를 마친 신자들은 조만식이 연금되어 있는 평양 고려호텔로 진출하여 그 건물 앞에서 찬송을 불렀다. 월남한 북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에서 불렀던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과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40) 이런 일들은 해방 후 한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동아일보는 1949년 3·1절 기념예배 후에도 여전히 조만식이 유폐되어 있는 고려호텔을 순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1)


IV.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3·1절 기념행사와 김일성 저격사건

1946년 3·1절 기념식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김일성 저격사건이다. 이 사건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북한의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연계하고, 여기에 기독교와 학생 세력이 가세해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1절을 기하여 북한 내의 반탁 세력을 찬탁으로 돌이키게 하며, 2월 8일 성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지지하게 하며, 3·1운동과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연결시킴으로써 친소 관계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활용하여 토지개혁 등 각종 개혁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남한의 우익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태롭게 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특별히 1945년 말 귀국한 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활동을 하는 핵심 세력인 김일성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남한의 우익 단체인 정치공작대는 1946년 3월 1일 3·1절을 기해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공산 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치공작대의 기원은 OSS(O൶ce of Strategic Services, 미국전략정보국)와 연결된다. 독일이 패망하자 광복군 출신인 백창섭은 미국 OSS의 윔스(Clarence Weems Jr.)와 협의하여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을 대비하여 1945년 4월 14일 국내에 잠입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자 백창섭은 1945년 10월 하순에 월남한 사람들을 포섭하여 특파사무국을 만들었다. 그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정 요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귀국한 김구는 이 임무를 광복군 국내지대(대장 오광선)에게 맡기고, 특파사무국의 해체를 지시했고, 11월 24일 해체되었다. 하지만 같은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이었던 신익희는 생각이 달랐다. 신익희는 이들을 끌어들여 12월 6일에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를 만들었다. 이들의 임무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공작을 담당하는 것이었다.42) 이 단체는 임정의 산하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익희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단체였다.

당시 임정의 일차적인 임무는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발표 직후 “각층, 각파 및 교회, 전 국민으로 하여금 신탁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하고 불합작운동을 단행할 것”이라고 결의했다.43) 이것은 반탁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교회를 중요한 파트너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북한에서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이 1월 5일부터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택연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임정 산하에 있는 정치공작대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치공작대원인 백시영과 강응룡은 1946년 1월 7일에 임시정부가 발행한 국자문 1, 2호를 가지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친필 위임장과 조직반장 조중서(장로교 평서노회장을 역임한 조승익 목사의 아들)의 소개장을 휴대하고 평양에 와서 북한의 기독교인들과 접촉을 했다.44) 조중서는 정치공작대의 평안남도 지방대원을 보면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그 명단은 김병연, 백남홍, 이윤영, 김화식, 이근춘, 전준삼, 조완(조산), 황은균 8명이다.45) 이 중 이윤영은 감리교 목사이자 조선민주당 부당수 출신이며, 김병연은 감리교인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재무위원이며, 백남홍은 조선민주당 사무차장이었고, 김화식은 장로교 이북5도연합회 부회장이자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였고, 황은균은 창동교회 목사였다. 그러므로 정치공작대가 북한의 평양에서 접촉한 인사들은 거의가 조선민주당과 기독교계 인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임무는 북한에서도 남한과 같은 반탁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반탁운동은 곧 바로 김일성의 제거 계획으로 발전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찬탁 입장을 앞장서서 지지했기 때문에 반탁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정치공작대가 김일성 제거 계획을 세우면서 백의사와 관련을 맺은 것 같다. 백의사란 중국 국민당의 남의사(藍衣社)를 본 딴 비밀 테러 단체로서 강력한 우익 성향과 반공정신을 갖고 있었다. 이 단체는 평남 중화 출신인 염동진(본명 염응택, 일명 염동찬)이 만들었는데,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입국하여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대동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우익의 입장에서 건국 준비를 하다가 해방 후 공산당과 투쟁하다가 월남하여 1945년 10월 대동단을 기초로 백의사라는 단체를 만들어 월남한 청년들과 함께 반공 활동을 하였다.46) 원래 특파사무국을 만들었던 백창섭은 평북 영변 출신으로 유진산과 함께 백의사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47) 정치공작대의 간부인 박문과 최기성도 백의사와 관계를 맺었다.

당시 남한에는 많은 북한의 젊은이들이 월남하여 있었다. 신의주 학생의거를 비롯하여 많은 반공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소련의 핍박을 피하여 월남하였다. 특별히 학생들이 많은 것은 당시 학생들은 부르주아의 자녀로 지목을 받아 공산당의 타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여기에 항거했으며, 그 결과 북한에서 살지 못하고 월남한 것이다. 이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정치공작대는 이들 가운데서 조중서와 연락이 되는 김정의(일명, 김제철), 김형집, 최기성, 이희두 등을 포섭하여 김일성 제거 작전을 추진하였다.48) 이 중 김정의는 당시 39세로 대표격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20대를 전후한 젊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1946년 2월 중순 월북하였고, 그 뒤 평양보안서 뒤편에 있던 장대현교회 홍민규 장로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활동하였다. 또한 산정현교회의 김현석 장로도 조중서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었다. 김현석은 월북한 정치공작대원들에게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9)

하지만 이들은 테러의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치공작대와 조중서는 백의사에 연락해서 이성열을 참여시켰다. 조중서는 백의사의 염동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동시에 후에 신익희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이성열의 아버지와 염동진은 동료로서 함께 김구를 위해서 일하기도 했고, 그래서 염동진은 이성열을 아들과 같이 대우했다. 이성열은 월북하여 이미 와 있던 김정의 일행과 접선하였다. 김정의는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이미 북한에서 활동하던 백시영 일행으로부터 김일성 제거를 위해서 접촉할 사람들의 명단을 넘겨받았다. 여기에는 이윤영, 조정환, 정인숙, 홍기환, 김이선, 이문현, 박석광, 이호빈, 우제순, 조명진, 김인준, 김철균, 백남홍, 임태정, 박현강, 최한성, 조산, 채상빈, 양예한, 오인준, 손태윤, 이영한 등이 있었다.50)

이런 거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김일성의 활동 범위를 알아야 제거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월남해서 정치공작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우영길은 당시 평양에 있던 그의 동생과 동생의 친구로서 평남임시인민위원회 총무부 정보과에서 일하는 조재국을 소개했다. 조재국을 통하여 정치공작대는 김일성의 활동 계획을 알 수 있었다.51)

이렇게 해서 2월 27일경에는 김일성 제거 계획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양욱을 제거한다. 둘째, 무기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재국으로 하여금 병기창에서 무기를 입수하기로 한다. 셋째, 오랜 후원자인 김정희 여사로부터 정치자금을 얻는다. 넷째, 김일성의 일정을 확보한다. 다섯째, 거사 후에 대대적인 반공, 반소운동을 전개한다. 여섯째, 요소요소에 학생들을 배치한다. 일곱째, 거사는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된 후 5분쯤에 실행한다. 여덟째, 실패를 가정한 사후처리 문제는 논의하지 않는다.52)

이 같은 거사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정치공작대는 황해도 출신인 유익배를 특별히 선발하여 월북하게 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유익배는 1940년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서 항일무장 투쟁을 한 경력의 소지자로서 김일성 암살 계획에서 학생들의 포섭을 맡았다.53)

평양의 공산 정권은 평양역 앞 김일성 광장에서 열리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주최의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생들이었다. 북한에서 소련과 공산당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집단이 바로 학생이었다. 이들은 이미 1945년 11월 말 신의주 학생의거를 통하여 공산당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 뒤 이들 중 상당수는 월남하였지만 여전히 북한 내에서 학생들 사이의 반소, 반공운동은 매우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평양역전에서 열리는 3·1기념식에 참석하라는 명령에 조직적으로 반항하였다.

2월 28일 평양의 학생들은 모여서 정부의 강요된 행사 참석을 피하기 위해서 학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정보는 소련군에게 알려졌고, 소련군은 각 학교에서 주요인물 20 내지 30명의 학생들을 체포해서 그다음 날까지 구금하였다. 그다음 날 이들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행사가 열리는 평양역 앞 김일성 광장까지 무장된 경비대의 감시 아래 행진해야만 했다.54)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평양역 앞의 공식적인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북한 정부는 학생들에게 태극기와 함께 소련의 붉은 깃발을 지참할 것을 지시했는데, 학생들은 여기에 반발해서 순응하지 않았다.55) 평양의 3·1절 공식 행사의 핵심 사항은 3·1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소련의 지원에 대한 감사인데, 이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소련의 붉은 깃발을 흔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오직 태극기만 흔들었기 때문에 행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지연되었다.56) 미군정 당국은 3·1절 행사를 성공적으로 실시하려는 계획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원래 11시에 예정되었던 행사는 상당히 지연되었다. 김일성 제거를 위한 핵심인물인 이성열, 김정의, 김형집, 최기성, 이희두, 조재국 등 핵심 인물들은 일찌기 행사장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김일성의 연설이 진행되면 이성열의 지시로 김형집이 먼저 수류탄을 던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행사가 지연되면서 정치공작대원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2시에 행사가 시작되고, 이어서 소련군 사령관과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된 지 1분도 안되어 김형집이 수류탄을 던졌고, 한국보안대원 한 사람이 죽고 여러 사람이 다쳤으며, 이때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Y. T. Novichenko)는 이 수류탄을 집어서 던지려다 폭발하는 바람에 손을 잃고 말았다.57) 김일성의 목숨을 소련군 장교가 구해 준 것이다.58) 그렇게 김일성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형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피신할 수 있었다. 이들은 비록 김일성 저격에는 실패했지만 그다음 목표를 정했다. 먼저 3월 3일과 7일 양일에 걸쳐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다음 타겟은 김책이었다. 3월 9일 김책의 집을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이성열은 자신의 중학교 동창인 최의호를 만나 강양욱 제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최의호는 강양욱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아지트로 삼아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자정에 강양욱이 귀가하는 것을 보고 그날 새벽에 안방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하였다. 하지만 강양욱은 죽지 않았고, 대신 그 집에 방문했던 다른 사람이 사망했다.59) 이때 최기성은 소련군과 보안대에 의해서 사살당했고, 김정의는 체포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탈출하였다.60)

이들이 최용건과 김책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이들이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원래 조만식을 돕겠다고 약속을 하고 조선민주당의 요직에 올랐지만, 결국은 조만식을 배반하고 조선민주당을 공산당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강양욱을 대상으로 한 것은 원래 기독교 목사였던 그가 신앙을 배반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강양욱은 소련군에게 학생들을 강제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고, 기독교계의 3·1절 예배 주동자들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최용건과 김책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약화시키는 데 주동 역할을 했다.61)

김일성 저격사건의 결과로서 소련군 당국은 두 학교를 폐교시켰고, 나머지 학교의 학생들은 시위를 계속하였다. 당국은 각급 학교의 교장들을 불러 학생들에게 3월 5일까지 학교로 돌아오도록 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정부는 학교가 3월 4일까지는 다시 문을 열 것이라고 학부모들에게 알렸다. 여기에 대해서 학생들은 한국이 다시금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는 학교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삐라를 살포함으로써 대응했다.

이들의 삐라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표하고 있다.62)

인류의 역사 이래 찾아보기 어려운 압박 가운데 있는 우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평양의 모든 학생들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북한에 있는 모든 남녀 중학생들은 현재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2.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거리에서 우리의 조국이 독립될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3. 우리는 절대적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4. 우리는 절대적으로 대표민주의원을 지지한다.

이렇게 평양의 교회와 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을 놓고,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평양의 지도적인 기독교 성직자인 한상동이 서울에 도착하여 북한에 있는 기독교의 입장을 미군 당국에 보고하였다. 그는 평양의 기독교를 분명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단체로서 규정짓기를 원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평양에서 기독교 외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또 다른 그룹은 중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학생동맹뿐이라고 언급하였다. 기독교와 학생들은 둘 다 조만식과 북한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은 다 같이 세 가지 입장을 갖고 있는데, 첫째는 한반도의 통일이며, 둘째는 인민위원회에 대한 분명한 반대이며, 셋째는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이다.63)

이 사건에 대해서 북한 공산당의 기관지 <정로>는 정치공작대가 이승만과 김구의 위임 아래 임정 내무부장인 신익희의 위임장을 갖고 북한에 와서 행동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주요 교통시설인 철도를 파괴하고, 산업시설에 방화하며, 여성도 포함되었는데 현재 보안서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정로>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최기성에게 교부한 1946년 2월 15일자 위임장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공작대의 활동은 북한 전역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상당수는 체포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64) 또한 미군정 당국은 북한의 3·1절과 남한의 3·1절 행사를 비교하여 남한에서는 3·1절 행사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데 비하여 북한에서는 상당한 소요가 일어나서 남북한의 3·1절이 대비된다고 평가하고 있다.65)


V. 3·1절 기념행사를 둘러싼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인식

그러면 해방 직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3·1운동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자료를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66)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법령을 통하여 연초와 연말 외에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3월 1일을, 노동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5월 1일을,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8월 15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이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은 1946년뿐이었으며, 실질적으로 6·25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3·1절 기념행사를 갖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공휴일도 폐지하였다.67) 따라서 1946년 김일성의 기념사는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3·1절에 대해서 행한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김일성은 3·1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날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하여 고귀한 피를 흘린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을 영원히 기념하는 것이며, 이날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싸울 결의를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68)

하지만 김일성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제 3·1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어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일성은 3·1운동을 일으키고 주도한 세력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인데, 이들은 근본적으로 일본과 싸울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계급이었으며, 또한 이들은 무저항주의를 내세웠는데, 이것은 일본과 투쟁하는 데 있어서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3·1운동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 운동을 영도할 만한 “혁명적 계급과 혁명적 당”이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계급이 주체가 되고, 이들을 이끌 공산당 지도자가 출현하여 무장 투쟁의 현명한 방법을 동원했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것이다.69)

또 다른 실패의 중요한 이유는 3·1운동이 적절한 국제적인 연대가 없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미국과 영국이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힘만 가지고는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다. 김일성은 “로씨야에서의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승리는 우리 민족의 해방 투쟁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고 말하여 3·1운동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 아래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김일성도 당시 러시아는 미, 영, 불 기타의 무력 간섭파들과 백파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투쟁을 직접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고 인정하고 있다.70)

이어서 김일성은 3·1운동 이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에 투항하여 민족을 팔아먹었지만, 그러나 노동자, 농민, 그리고 혁명적 인텔리들은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이제 그 마지막 승리를 위하여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 친일 반동분자들은 제거하여 민주주의적 민족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 둘째, 사회의 생산시설을 재가동하여 인민의 생활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것, 셋째, 토지문제를 해결하여 봉건적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것, 넷째, 교육제도를 강화하여 반동분자들의 준동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 다섯째,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절대 지지하며, 선전할 것, 여섯째, 소련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으므로 소련과의 친선 관계를 강화해야 할 것 등이다.71)

김일성이 1946년 3·1절 기념식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첫째로 2월 8일에 세워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일 세력을 숙청해야 하고, 생산증진, 토지개혁, 그리고 교육개혁을 통해서 부르주아 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3·1운동은 당시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해방은 “쏘련 군대의 영웅적인 투쟁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쏘련 군대는 우리 조선 민족을 해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으며, 또한 신탁통치를 지지해야 한다. 이 기념식의 마지막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만세! 우리 민족의 해방자인 쏘련 군대 만세!”로 마무리하고 있다.72)

김일성이 평양역전 김일성 광장에서 3·1절 기념사를 한 바로 그날, 평양의 공산 당국은 또 다른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평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기미독립선언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를 초청하여 방송연설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신석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려고 하였다. 신석구는 같은 감리교 목사 오하영으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간절한 기도 후에 서명에 참가한 다음 감옥에 갇혔다가 1921년 11월 출옥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했으며, 한국감리회를 일본감리회에 합동시키려는 혁신교단 운동에 반대하였다. 그는 끝까지 신앙과 조국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은 경건과 애국을 겸비한 존경받는 목사였다.73)

신석구는 해방 후에도 묵묵히 목회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미 독립운동의 중요인물임에도 자신이 원래 섬기던 평양 교외 유사리교회에 가서 양떼를 보살폈다. 이런 가운데 신석구는 공산당에 의해서 방송연설을 요청받은 것이었다. 그가 방송국에 가서 보니 이미 원고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3·1운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서 철저한 혁명정신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으며, 이제는 공산당이 나서서 실패한 운동을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실시하려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각종 개혁운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74)

하지만 신석구는 공산당이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방송을 진행했다. 당시 방송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 이때 방송을 들었던 신석구의 손자 신성균의 회고이다.75)

그때 우리는 방송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할아버님께서 방송에 나온다는 사실 하나에 흥분되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7시에 예정된 시간이 되자 라디오에서 할아버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할아버님 연설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3·1운동이 실패한 운동이라고 자꾸 그러는데 어찌 실패한 운동이냐? 그때 모든 민족이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키고 단결하여 거사를 했으니 이보다 더 성공한 운동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어요. 둘째, 공산당이 3·1운동을 주도했어야 했다고 하는데, 그때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나 했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2년도 안 되는 때에 어떻게 국내에 공산당이 조직되어 3·1운동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셋째로 도대체 토지개혁과 3·1운동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에서 3·1운동을 말하면서 자꾸 토지개혁을 내세우는데 할아버지 말씀이 여기까지 이르자 갑자기 웅성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방송이 중단되었어요. 그날 할아버님 방송은 20분 예정되었는데 10분 만에 중단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할아버님은 즉시 중앙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며칠 동안 조사를 받으시고 풀려나셨습니다.

신석구의 손자 신성균의 회고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석구는 3·1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3·1운동은 실패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운동이며, 3·1운동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며, 3·1운동의 본질은 토지개혁을 통한 봉건 세력과의 투쟁이 아니라 일본과의 싸움을 통한 민족해방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석구는 자신이 해방 후 기록한 자서전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76)

일(一)은 단결이다. 그때 세 종교단체 외에 경성 내 중등 이상 공사립학교 남녀 학생들이 다 연락하였으되 정각까지 비밀이 정로되지 아니한 것은 그 단합한 정신이 어떠하던 것을 측지할 수 있으며, 일(一)은 희생적 정신이다. 그 시에는 33인은 물론이어니와 삼척동자까지도 애국심이 충일하야 생명을 불고하고 돌진하였던 것이다.

신석구가 생각한 3·1운동은 모든 민족이 계급을 떠나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온 세상에 외친 사건이며, 지도자와 일반 대중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다 같이 희생한 운동이다. 이것은 3·1운동이 특정 계급이 주도해야 했으며, 또 어떤 계급은 친일하고, 어떤 계급은 희생했다는 민족분열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은 1946년 3·1절을 자신들의 체재를 옹호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것은 많은 저항을 가져왔다. 당시 황해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박명근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77)

1946년 3월 1일이었다. 3·1운동 후 이십칠 년 만에 맞이하는 삼일절 기념식 날이었다. 현장을 목격하고 직접 참여한 어른들이 많이 모인 삼일절 기념행사장에서 젊은 공산당 당수가 상부에서 시킨 대로, 3·1운동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3·1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그 지도자들이 종교인이었기 때문이라며 소련의 10월 혁명과 같이 노동자가 주축이 되었더라면 성공했으리라는 것이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서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많은 군중이 반대 의견을 표시했고, 아버님과 다른 한 분이 이를 대표해서 반대 연설을 하셨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두 분은 결국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혀 체포당한 후 각각 서흥형무소와 해주형무소에서 삼 년 형을 치르게 되었다.

우리가 박명근의 증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당이 말하는 부르주아는 상당수 종교인을 말하는 것이며, 공산당은 바로 이들의 지도력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지도력으로 지배 세력을 전환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공산당들이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종교인들은 그들이 제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1946년 3·1절 행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황은균 목사이다. 황은균의 증언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과 김일성 저격사건이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황은균은 1948년 “38선과 기독청년”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황은균은 “오늘의 조선기독교의 강단에서는 신자는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무저항주의를 기독교적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1900년 역사 가운데서 싸우지 않은 역사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크롬웰도, 미국의 링컨도 다 같이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위해서 싸웠다. “오늘날 누구가 크롬웰이나 링컨을 불신자라고 합니까? 성경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지만 동시에 ‘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검을 함부로 쓰는 것은 잘못이지만 침략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검을 사는 것은 인정하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78) 원래 장대현교회의 행사에서 절대로 비폭력으로 대할 것을 지시했던 황은균이 이제 정당방위를 위해서는 검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은균은 여기에서 기독교인은 단지 무장으로만이 아니라 복음으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즉 10리마다 교회 하나를 세우면 그 교회를 통해서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이 월남하기 전에 미군정과 연락해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보통선거 때를 대비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북에 있을 때에 비밀히 미군정과 연결하여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시대에 보통선거 준비를 교회를 중심으로 할 때에 평안남북과 황해도를 1주간이면 연락망을 펴고, 2주간이면 천지를 전복할 자신을 찾았던 것인데 이것은 곧 매 10리마다 교회 하나씩 세운 까닭이었습니다.”79)


VI. 나가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해방 직후 북한에서 1946년 3·1절 기념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공산당은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김일성의 기념사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3·1운동과 볼셰비키 혁명을 연관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점령군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해서 국제적인 연대를 강화하고, 찬탁운동을 통해서 남북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2월 8일 만들어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지지하며, 3월부터 시작될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개혁을 적극 추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산당의 계획은 기독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3·1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해석을 수용할 수 없었으며,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지화이므로 찬성할 수 없고, 조만식을 감금해 놓고 만들어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수용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토지개혁을 비롯한 많은 개혁들은 공산당 지배를 굳히기 위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공산당 주최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기독교는 3·1운동을 부정하는 공산당들이 주도하는 3·1절 기념식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해서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1946년 3·1절 기념예배는 북한의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공산 정권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의 기독교는 처음에는 가급적이면 정부와 맞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해소하기 어려워 유혈충돌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충돌은 평양만이 아니라 의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기독교의 독자적인 행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행사 다음에 조만식이 감금되어 있는 고려호텔을 둘러싸고 찬송과 기도를 하였다.

장대현교회의 행사와는 별도로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같은 날 평양역전에서 공식적으로 열린 기념행사에서 일어났던 김일성 저격사건이었다. 1946년 초부터 김구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고, 그 범위를 북한으로 확대하여 북한의 민족주의자·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신익희가 주도하는 정치공작대였다. 이들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김일성과 그의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백의사와 연결하여 일종의 테러를 계획하였다. 비록 정치공작대가 기독교의 공식적인 기관과 연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 활동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가담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이 정치공작대에서 활동한 중요 인물들은 이미 북한에서 반공 활동을 하다가 소련의 압박을 피해서 월남한 청년들과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남한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인적,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가지고 다시 월북하여 기독교계와 학생들에게 침투하여 김일성과 그 일파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하였다. 비록 이 계획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북한 정권의 출발 초기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북한에서의 3·1절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또 다른 압제자 소련에 대한 항거의 날이다. 이들은 일제의 억압보다 더 심한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압제이며, 3·1절은 단지 과거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억압하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날이었다. 여기에 비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과거 1919년 3·1절은 실패의 날이며, 1946년은 오히려 이런 실패를 극복하고, 진정한 혁명을 시작하는 날이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결국 1919년 3·1절과 자신들의 혁명을 연결시키는 일에 실패했다. 결국 북한에서 3·1절은 기념일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조선인민공화국은 그 뒤에 일어난 김일성의 빨치산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이렇게 뿌리 깊은 남북한 사이의 역사 해석의 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NRF-2016S1A 5B8913950).

Notes

2) 당시 각도별 입감자를 통해서 본 종교별, 지역별 참여도는 다음과 같다.
3) 천도교 역시 북한 정권과 커다란 마찰을 빚었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북한 정권과 타협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들은 서로 타협하기 어려운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1948년 3·1절을 기하여 대대적인 공산당 반대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근철, “3·1운동 재현에 대하여,”『논문집』15 (인천: 인천교육대학교, 1980): 165-88 참조.
7) 이 문서는 북한의 기독교를 대표해서 1946년 3월 1일 월남하여 미군 당국에 당시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기독교와 소련 당국의 갈등에 대해서 설명한 평양의 한 성직자의 증언에 기초해서 미군 정보 당국이 작성한 것이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2. 이 자료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4, HQ, USA-FIK,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1945.12.1-1947.3.31) 주한미군 북한정보 요약 1(1988)에 수록되어 있다.
12) Ibid., 168-71.
15) Ha Young Youn and Kyungchik Han to the HQ of Allied Forces (Sept. 26, 1945), 미국무부 문서번호 740.00119 Control (Korea)/10-145.
17)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2.
19) 김기혁의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은 1946년 초 자신의 친척이며, 북한 산정현교회의 장로인 김현석을 두 번이나 찾아와서 서기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김현석은 오랫동안 장로교의 평신도지도자로서 교계 활동을 해왔으며, 그를 비롯한 김일성의 기독교 친척들은 김일성의 귀국을 축하하는 축하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김일성은 조만식의 연금 이후 조만식을 대체할 인물이 필요했고, 자신의 친척인 김현석과 접촉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김현석은 자신은 정치적인 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김기혁,『김현석 장로 전기』(서울: 맥밀란, 1982), 279-80.
2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22)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25) 박대선,『하늘에서 정의가 땅에서 진실이: 회고록』. (서울: 展望社, 1996), 83; 사단법인 북한연구소,『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388. 이날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서 박대선은 회고록에는 40명이라고 말하였는데,『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에서는 50여 명이라고 주장한다.『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은 1990년에,『회고록』은 1996년에 출판되었는데, 후자가 전자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윤춘병,『8·15 이후 감리교 서부연회 수난사』, 63.
26) 체포된 사람 숫자도 자료에 따라 다르다. 박대선은『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388쪽에서는 55명이 구속되었다고 말하는데, 자신의『회고록』83쪽에서는 40명이라고 증언하며, 미군정 보고서는 20명이 체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29)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33)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사단법인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389.
34) 사단법인 북한연구소,『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390-91. 많은 기록들은 황은균이 곧바로 월남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황은균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이후에도 한동안 북한에 남아서 남한측과 연계하여 모종의 공작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황은균, “38선과 기독청년,”『부흥』8 (1948); 김흥수 편,『해방 후 북한교회사』, 335.
41)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43) “임정, 긴급국무회의 열고 반탁결의문 채택,”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45) Ibid., 236; 박진희, “해방 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183-87의 표3)정치공작대 지방요원 명단 및 주요 경력 참조.
46) 배진영, “남의사(藍衣社)와 백의사(白衣社),”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61021591&nidx=21592 (2018년 8월 5일 검색).
48) Ibid.
50) 이성열, “통분! 찰나에 고래를 놓치다. 김일성, 강양욱 저격사건,”『북한반공투쟁사』, 한국통일촉진회 편 (서울: 반공계몽사, 1970), 167-73; 조재국, “김일성 저격사건과 나,”『대동강』(1980) 창간호 참조. 하지만 위의 내용과는 매우 다른 증언도 있다. 그것은 정치공작대의 대표격인 김정의가 체포된 다음 소련군의 보고에 나오는 진술조서이다. 이 문서는 1946년 8월 22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무력 정치사령부 제7부국장 사포쥐니코프(B. Sapozhnikov)가 김일성 저격사건의 책임자였던 김정의를 심문한 내용을 전 소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M. A. Suslov) 동지 앞으로 보낸 것으로, 김명호(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연구위원)가 번역해서 “1946년 김일성암살기도사건 진상, 대한의열단 김정의 신문조서”라는 제목으로『세계와 나』제58호 (1994년 8월): 178-91에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정의는 정치공작대에서 정보반장 박문과 함께 부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박문의 지시로 김일성 제거 사건의 책임을 맡고 월북하였다. 하지만 김정의는 정치공작대원 이전에 대한의열단원이었다. 대한의열단은 중국에 있던 김두봉과 김원봉이 조직한 좌익 성향의 단체로서 1945년 9월 초에 문현승이 이들과 연계해서 국내 조직을 만들었고, 9월 12일 김정의는 여기에 가담하였다. 대한의열단은 각 단체에 들어가서 그 조직을 장악하여 결국에 조선에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문현승이 김정의에게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이들은 북한에는 김두봉, 남한의 인민당에는 김원봉, 남한의 한민당에는 김두원 등을 파견하여 이들 조직을 장악할 것이며, 박헌영과 여운형은 직접적으로 이들과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김원봉과 문현승을 통하여 서로 연계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여운형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김정의는 문현승의 지도를 따라 김구의 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그 동향을 보고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 1946년 1월 대한의열단의 지도위원회가 서울 황금정로 2가 일본 국가보험청사 건물에서 열렸는데, 문현승, 강대진, 관현수, 그리고 김정의가 대한의열단의 활동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문현승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은 일제 말 지하 활동을 한 사람들로서 김원봉 계열이었다. 이 모임은 현 상황에서 자주적 조선 정부를 구성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김일성과 그 인민위원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남한에는 여러 정파들이 있으나 이미 이들 속에 대한의열단이 침투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지만, 북한의 김일성 세력은 소련을 배경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김일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주적 조선 정부를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을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주적 조선 정부에 큰 장애가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 단계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김일성을 제거하고, 자주적 조선을 지지하는 세력을 북조선의 지도자로 만들고, 이것을 근거로 남한의 자신들과 연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김정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문현승은 김원봉과 여운형, 김두봉, 김두원과의 연계를 지지한다고 우리에게 통보했으며, 이들은 조선에 유일한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협조하고, 남조선에서가 아니라 북조선에서 먼저 정권을 쟁취한 다음 전체 조선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을 수반으로 임시인민위원회가 정권을 잡고 있고, 공산당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므로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을 우리 세력으로 교체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자주적 조선의 유일한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의열단의 지도위원회에서는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을 살해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정의는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김일성 제거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하나는 김구의 반탁운동의 차원에서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한의열단의 자주적 유일 정부를 세우려는 차원에서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특별히 1946년 2월 8일 출범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하나의 통일된 한국 정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서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먼저 김원봉은 1945년 12월 18일 자신이 의열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최근 조선의열단이니 의열청년회니 의열동지회니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옛 조선의열단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0일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에 의하면 대한의열단의 활동은 김원봉의 중도좌파 내지 좌파적인 성격은 전연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한의열단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으며(1945년 11월 19일, 25일), 인민공화국을 반대하고 있으며(1945년 11월 23일), 신탁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와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에 가입하고 있고(1946년 1월 30일), 1948년에는 납북 협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북했다가 북한에 의해서 저지되었다(1948년 4월 24일). 대한의열단은 문현승을 대표로 재조직하였고(1947년 10월 19일), 문현승은 대한의열단의 대표로서 충북 제천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http://www.pokr.kr/party/157 (2018년 8월 17일 검색). 이것은 김정의의 진술과는 달리 대한의열단이 우익단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연구할 주제라고 본다.
52) Ibid., 291.
53) Ibid., 288; <동아일보> (2007년 5월 17일자).
54)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55) G-2 Weekly Summary # 26 (March 12, 1946), 6. 이 자료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5, HQ, USAFIK, G-2 Weekly Summary (1945.9.9-1946.6.9) 1 (1990)에 수록되어 있음.
56)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3.
57) 란코프,『북한 현대정치사』, 81. 미군정 보고서 자체가 이 부분에 관해서 혼선을 빚고 있다. 미군정 일일보고서 3월 7일은 수류탄을 던진 시점이 김일성 연설 때라고 기록하고 있지만(G-2 Periodic Report #169 [March 7, 1946], 2. 이 자료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6.2.13-1946.9.16) 2 (1990)에 수록되어 있음), 같은 정보 당국의 북한 정보 요약에는 북조선여맹위원장인 박정애가 나와 연설할 때라고 말한다.『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의 증언은 수류탄을 던진 것은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되었을 때라고 주장한다.
58) 이것은 오랫동안 소련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북한 중앙통신은 2018년 7월에도 “국제주의 전사” 야코프 노비첸코의 가족이 정전협정체결 65주년을 앞두고 26일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찾아 헌화했다고 밝혔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26/0200000000AKR20180726190200014.HTML?input=1195m (2018년 8월 3일 검색).
60) Ibid., 298.
61) Ibid., 296.
62)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 8 (March 20, 1945), 4.
63) Ibid., 2.
64) <정로> (1946년 3월 22일); 박진희, “해방 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196에서 재인용.
65) G-2 Weekly Summary # 26 (March 12, 1946), 6. 남한의 3·1절 기념행사에 대해서는 박명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참조.
66) 이 기념사가 실제로 행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당시 바로 김일성 저격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념사는 1963년판『김일성 선집 1』에 수록되었고, 이 자료는 3·1운동 기념사업회 편,『해외에서의 3·1 운동 1』(서울: 삼일운동기념사업회, 1999)에 수록되었다. 본 논문에서 인용되고 있는 김일성의 기념사는『해외에서의 3·1운동 1』의 내용에 의존한다.
68) 김일성, “3·1운동 27주년 기념사,”『해외에서 본 3·1 운동 1』, 317.
69) Ibid., 317-18.
70) Ibid., 318.
71) Ibid., 318-19.
72) 위의 인용 가운데 볼드체는 원래의 것임. 그러나 1992년 출판된 김일성선집에는 볼드체의 글자는 나오고 있지 않고 있다.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고, 주체사상이 강화되면서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다. 3·1운동 기념사업회,『해외에서의 3·1운동 1』, 320쪽의 주 261을 참조.
73) 이덕주,『신석구 연구』(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0), 부록 신석구 연보 참조.
74) Ibid., 244.
75) Ibid., 245에서 재인용.
76) 신석구,『자서전』(친필), 92; 이덕주,『신석구 연구』, 244에서 재인용.
79) 황은균, “38선과 기독청년”; 사단법인 북한연구소,『해방 후 북한교회사』, 335. 황은균은 여기에서 정치공작대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의사나 정치공작대는 다 같이 미군정 CIC와 협력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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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기독교 전체입감자 기독교비율(%) 천도교숫자 및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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