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No. 0, pp.189-218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Mar 2019
Received 10 Jan 2019 Revised 10 Feb 2019 Accepted 18 Feb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3.47.189

오리게네스의『원리론』제4권에 나타난 성서해석학

이은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unjae64@hanmail.net
Origen’s Hermeneutics in Accordance with “De Principiis IV”
Lee, Eunjae

초록

이 논문은 오리게네스(Origenes)의『원리론』에 나타난 성서해석학을 조명한 것으로, 흔히 오리게네스는 삼중적 성서해석의 신학적 기반을 닦아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해석원리는『원리론』제4권에 기술되었다. 앙리 루박(Henri de Lubac)이 잘 지적하였듯이,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학은 교회의 중심 가르침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일차적으로 교회론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올바르고 총체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는 무진장의 보물을 감추고 있어서 누구든지 그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추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다. 현재 한국교회는 꽉 막힌 길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성서로 되돌아가는(ad fontes) 것이야말로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Abstract

It can be said that Origen is acknowledged as the first Christian theologian to work towards an educated world, inside the church. The writing, Peri Archon (De Principiis) is one of the early works of Origen. Origen’s hermeneutics inherits the Alexandrian tradition and he describes those principles in the section of De Principiis IV. In IV Book of De Principiis, Origen presents his understanding of the Scriptures. In this work, Origen not only gives the classification for interpretation, but also suggests the foundation for the three-fold structures of it. Just as man consists of body, soul and spirit, so does the Word of God consist of letter, morality and allegory. Origen seeks to show the divine side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through the lives of two persons, Moses and Jesus. For Origen, the Bible is indeed like a field, where God’s inexhaustible treasure is hidden. Thus, Origen argues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enables discovering the treasure, while it only occurs on the horizon of the faith of Christian Community.

Keywords:

Origen, De Principii, Allegory, Fourfold Bible Interpretation, Spiritual Sense

키워드:

오리게네스, 원리론, 알레고리, 사중적 의미, 영적인 의미

I. 들어가는 말

근대 이전 기독교의 성서 이해는 구속사라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졌고, 특별히 계시 개념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기독교적인 이해에 따르면,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자기 중개(仲介)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책(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성서는 그리스도 사건으로서 단순히 과거에 대한 보도를 넘어서서 성령에 의해 보증되는 현재의 일이다. 종교개혁 시기 이후로 개신교 정통 교의학은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을 비롯하여 “loci theologici”라는 가르침으로 완성되었는데, 이때 locus는 성서 본문의 원천/자리를 뜻하며, 이런 전통은 분명히 중세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locus theologicus(신학의 자리)가 중세의 ‘사중적 성서 의미(혹은 해석)’라고 불린 이론으로부터 발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로서는 런던의 감독이었던 길버트(Gilbertus Universalis)가 1110년경 창세기를 주해한 표준 주석(Glossa Ordinaria)에서 사중적 성서 의미를 상술해주었다.1) 어쨌든 우리가 행하는 신학 작업은 성서와 전통 그리고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식이라는 철학적인 사유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성서는 매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사중적 성서 의미란 역사적인 혹은 문자적인 의미를 기초로 하여, 여기에 일반적으로 알레고리(Allegory)라고 부르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를 합친 것을 말한다. 그 세 가지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즉, 풍유 혹은 상징적인 의미(Allegory, 이때 사용된 알레고리는 협의의 의미이다)와 도덕적(Tropology)인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가 종말론적/신비적(Anagogy)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성서의 사중적인 의미는 성령을 통해 내적인 논리를 구성한다. 계시에 관한 역사적인 증언(historia/littera)은 신앙(allegoria)을 위한 기초가 되며, 사랑(sensus moralis)을 불러일으키며, 희망(anagogia)을 강화한다.2) 부연(敷衍)하자면, 예루살렘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유대 땅의 도시이며, 우의적으로는 교회를, 도덕적으로는 개별 신자들의 영혼을, 종말론적으로는 마지막 때에 고대하게 되는 하늘 도시를 뜻한다. 물론 이런 사례는 아주 오래되었다. 사중적인 성서 의미를 공식화한 것은 6세기의 카시아누스(Cassianu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 더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동시대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문자적인 의미와 우의적인 의미를 말했으며, 사도 바울도 성서의 문자적인 이해와 영적인 이해를 잘 알고 있었다(고전 10:1-4; 고후 3:4-18).

그런데 이런 범주들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즉 본문의 상징적, 은유적, 비유적인 의미로 바꾸어 쓰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상징적인 해석에 대해 말한다면, 구약성서의 만나를 자신의 백성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염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적인 해석을 말한다면, 이스라엘의 능력을 위해 이스라엘의 뿔이라는 표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비유적인 해석으로는 아가서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를 위한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저자가 의도했던 이해의 범주 안에서 혹은 그가 의도하길 원했던 틀 안에 머물러야 하므로 우리는 성서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영감을 받은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총체적인 의미의 관계를 설정해 놓은 최초의 신학자는 오리게네스(Origenes)일 것이다.4) 이 글의 목적은 그의 Peri Archon (De Principii) 제4권에 나타난 해석학을 정리하면서 성서를 대하는 그의 입장을 고찰하려는 것이다.5)


II.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학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편집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주해 작업을 통해서 기독교 성서 연구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매우 정당하다. 그의『육경』(Hexapla)은 여섯 면에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본문으로 인정한 그리스어 셉투아진타(Septuaginta)와 히브리어 구약성서 원문, 이에 대한 그리스어 음역, 그리고 아퀼라(Aquila)와 심마코스(Symmachos), 테오도티온(Theodotion)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묶어 놓았다. 이 작품에서 오리게네스는 거룩한 구약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검토를 반영했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의 편집 방법을 사용하였다. 흔히 이를 본문비평이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인으로 동방의 수도 생활을 서방에 소개하였고, 그리스어 70인역(Septuaginta)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성서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주석이 260권이나 되며, 설교는 450편을 뛰어넘는다고 추정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방대한 장서(藏書)들은 단지 단편적으로만 존재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루피누스(Rufinus)와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으로 혹은 카파도키아의 오리게네스 명작선집인『필로칼리아』(Philokalia)에 남아 있다.

물론 오리게네스의 저작이 갖는 중요성은 그 분량에만 달려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 학자인 오리게네스의 주석 작품이 라틴어를 사용했던 중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하여는 특히 수도원 도서관에서 허용되었던 필사본들이 이례적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논쟁적인 학자의 주석 방법론에 관해서 이미 초대교회부터 오리게네스 논쟁이 상당하였던 것도 사실이다.6) 오리게네스와 동시대인들 가운데는 그의 알레고리 해석이 성서의 역사적인 진리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친다면서 불신했던 이들도 있다. 따라서 오리게네스는 이런 비판에 대해 스스로 변증해야 했다.7) 더구나 우리는 이와 유사한 항변을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루터가 보기에 오리게네스의 방법론은 허용될 수 없었다.8)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오리게네스의 해석이 비평 작업에 대한 과도한 대체라고 보았으며9), 이 같은 견해는 향후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비로소 현대에 들어 몇몇 학자들은 오리게네스의 주석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10)

오리게네스가 저술한 De Principiis는 기독교 신학을 학문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서로 인정되는 저작이다. 아마도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데메트리오스(Demetrios)와 논쟁을 벌인 후 결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아로 이주하기 전인 229-23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작품을 작성했던 것 같다. 오리게네스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De Principiis 역시 알렉산드리아 학자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철학적인 물음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로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을 영지주의적인 위협으로부터 변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하르낙은 이 작품을 “하나님, 세계, 자유 그리고 계시를 다루는 총체적인 교리신학”11)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De Principiis의 첫 세 권은 “첫 번째 원리들”(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에 바쳐졌는데, 이는 신적인 삼위일체론과 이성적인 존재, 세계와 그 종국(I-II권) 그리고 이성적인 존재의 자유로운 결정(III권)을 다루고 있다. 제4권은 종합적인 결론(IV.4.1-10)에 앞서 저자는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성서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성서의 신적인 영감에 대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IV.1),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성서를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의 방식을 다루고(IV.2-3) 있다.12) 따라서 성서의 신적인 영감에 대한 신앙은 성서가 거룩한 책이라는 해석학을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된다.13)

1. 원리: 성서의 계시적인 성격

오리게네스는 신-구약성서가 지닌 신적인 성격에 대한 신앙을 첫째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그 증거로 삼았다.14) 물론 역사비평적인 방법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본문의 거룩성을 증거로 삼으려 했던 오리게네스의 방식이 의심스러울 수 있다. 현대인들은 거룩한 본문이 특정한 권력과 함께 주어졌으리라는 사실, 즉 교권이 성서의 거룩성을 보장한다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려면 우리는 성서가 이미 선포된 후에야 이러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15) “말씀”은 근원적으로 예수 자신의 입(viva vox)에 그 권세를 갖고 있었으며, 다음에 신앙고백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통해서 선포되는 가운데, 그리고 신자들의 삶을 사로잡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가운데 권한을 행사했다. 오리게네스는 그 사례로 순교에의 각오를 들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성서 본문의 거룩한 성격을 위한 두 번째 증거로 성서의 내적인 경륜을 소개한다. 즉, 구약성서는 기독교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에 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가르쳐준다. 구약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도래에서 성취되었고, 그 거룩한 성격을 통해 입증되었다. 이를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민족을 다스릴 유다의 후손에 관한 야곱의 예언(창 49:10)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주님이 진노하시는 신명기의 예언(신 32:21)과 “사람이 낳은 아들 가운데서 가장 멋지신 분”에 관한 시편의 말씀(시 45:20)과 동정녀에 의한 임마누엘의 탄생에 관한 이사야의 말씀(사 7:13 이하)과 메시아의 출생지로 예루살렘에 관한 선지자 미가의 지정(미 5:2)을 기억한다. 따라서 기독교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유대의 율법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모세의 율법에 포함된 빛이 베일에 가려 있었으나, 예수의 도래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베일에 덮였으나, 선(善)의 인식이 열리는 순간 문자는 그림자에 불과했다.16)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루는 표현을 통해서 오리게네스는 단번에 두 측면과 거리를 두었는데, 즉 그는 구약성서의 유대적 해석을 반대하고 동시에 마르키온(Marcion)의 구약 거부도 반대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예언에 나타난 신적인 성격을 계시하고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드러낸 그리스도의 역사는 구약의 본문을 강의할 때에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 사건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현실화된 것은 구약성서가 그림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때 그림자는 사실(史實) 자체에 앞서가면서 사실을 쓸모없게 만든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 혹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기록으로서 신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역사는 해석학적인 열쇠이다. 거룩한 본문은 거룩한 사건의 징조이거나 기록으로 파악된다. 기독교에서 거룩한 본문의 이중구조(신-구약)는 기독교적인 구속사의 근본 사건인 그리스도의 도래가 그 중심에 있으며, 이것이 곧 오리게네스의 전체 해석학을 규정한다.

실제로 배우지 못한 독자들의 경우에는 성서의 모든 구절이 인간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가 없다. 즉, 구약성서의 본문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예언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17) 이 점에서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구약 해석학이 지닌 가장 위험하고 불편한 견해와 마주하게 된다. 구약성서 전체가 그리스도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확신은 개별적인(혹은 단편적인) 성경 구절에 대해서 자의적인 알레고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 본문의 총체적인 의미는 개별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단편적인 본문에서는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 자신도 성서해석에 관한 그 자신의 이론적인 논문에서는 오히려 소극적이었다. 전체 우주를 다루는 신적인 섭리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궤도와 동물 세계의 법칙성에서는 분명하지만, 인간 세계의 사건이나 현상에서는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18) 그래서 성서의 신적인 성격은 전체 본문에 임재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은 각 구절에서 가르침이 지닌 숨겨진 명확성을 추론해낼 수 없으며, 그것을 간단하고도 당당하게 표현해낼 수 없다.

오리게네스는 한편으로는 표현의 제약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의 숭고함 사이에서 발생한 오해를 종말적/신비적(anagogisch)인 의도를 위한 근거로 삼았다. 즉, 만일 성서의 설득력이 문체라는 수단을 통해 완전한 것으로 근거를 갖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혜에 기인할 것이다(고전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자체를 넘어서서 눈을 들어 신적인 활동을 바라보도록 강제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상의 혹은 더 나아가 그 이상의 권능에 도달한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기본적인 단어들로부터(히 6:1) 완전한 자들의 지혜에(고전 2:6) 해당하는 온전함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체 기간 동안 숨겨져 있었기에 흔히 비밀로 알려져 있는데, 이제 예언서들과 그리스도의 도래 가운데서 그 모습을 밝히 드러냈다(딤후 1:10). 성서 본문의 신적인 특징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최종적인 고찰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담고 있다. 즉, 거룩한 본문 읽기와 해석은 독자와 청자의 영적인 발전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본문에 담긴 깊은 의미는 단지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나 기독론적인 해석을 암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문을 독자와 청자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기독론적으로 열어 주는 의미를 뜻한다.19)

2. 성서 읽기와 해석 방법

성서해석의 방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먼저 성서 읽기에 나타나는 몇몇 오해들을 소개하고 있다.20) 첫째로 어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의 모든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완고함에 빠져 있다. 그래서 메시아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며,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들이 격렬히 움직이고, 양과 늑대가 한 목장에서 뛰놀며, 사자가 풀을 뜯게 될 것이다(사 61:1; 겔 48:15-16; 시 45:5; 슥 9:10; 사 7:15, 11:6-7).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서 이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없었기에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다. 둘째로 마르키온이나 영지주의자들 같은 이단들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진노와 질투와 피의 복수를 일삼기에 악을 불러일으키고, 악한 영들을 보냈다고 믿었다(렘 15:14; 출 20:5; 삼상 15:11; 사 45:7; 암 3:6; 미 1:12; 삼상 18:10). 따라서 그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은 불완전하며 결코 선한 창조자가 아니었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을 선포하신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셋째로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문자적인 읽기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에게서 그 특성과 행위를 파악하려고 했기에 가장 비참하고 불의한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는 일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런 오류들의 근거가 부당한 해석학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즉, 성서를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21) 실제로 성서가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아버지의 의지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록된 본문이라는 것을 담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면, 그들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사도들의 뒤따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교회 규칙”을 지향해야만 한다. 물론 이런 “규칙”의 배후에 숨겨진 것을 정확하게 알아챌 수는 없다. 아마도 오리게네스는 사도적 교회가 알고 있었던 신앙의 규범에 따라서 성서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도적 뒤따름은 교회가 영지주의 그룹과 구별되는 표지 가운데 하나였다. 신앙 규범은 성서 전체를 주해하는 데 해석학적인 근본 원칙이어야만 했다.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이 규칙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그는 첫째로 단지 “규칙” 대신에 “규칙과 행동방식”을 말하고, 둘째로 추가로 어떻게 이 규칙이 예수로부터 사도들에게로 그리고 사도들로부터 그 후계자들에게 전승되었는지를 기술하였다. 따라서 루피누스는 사도적 뒤따름에 관한 말씀을 교회와 결부시킨 것이 아니라, 해석 규칙 자체와 연결시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전달되고, 사도적 계승을 통해서 사도들의 후계자인 천상 교회의 교사들에게도 전해진 규칙과 규율을 지킵니다.”22)

이제 해석자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규칙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즉각적으로 해명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것 없이 성서가 “비밀로 가득한 구원의 질서”를 제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구원의 질서인지에 대해 간단하게 답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적인 취향이나 기독교적인 도덕과 거슬리는 구약성서의 몇몇 사건들을 나열한다. 가령 롯이 자신의 딸들을 취하거나 아브라함의 중혼(重婚), 야곱의 자녀들을 임신했던 하녀들(창 19:30-31; 16장; 29:21-22; 30장) 등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런 이야기들 배후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음을 예감했다. 마찬가지로 장막 건축에 대한 구약의 제시도 의심할 바 없이 상징인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간단하지 않으며, 어떤 해석자들은 상세한 조회(照會)를 추구하는 가운데 심지어 길을 잃기도 한다. 오리게네스는 장막의 해석을 위해 필로의 알레고리를 암시한다.23) 해석자들이 결혼, 자녀출생, 전쟁과 같은 역사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상징으로서 정확하게 이해하지만, 그들의 실재를 파악하는 일에는 실패하곤 한다.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해석자는 지식의 열쇠(눅 11:52)를 필요로 한다. 오리게네스는 그것이 예수 자신의 말씀에 따른 것이며, 성서 기자들의 손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4)

3. 알레고리: 삼중적 성서 이해

어떻게 성서를 다루고, 어떻게 그 의미를 해석해야만 하는지의 방법을 오리게네스는 성서 자체로부터 이해하였는데, 그것은 잠언의 말씀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훈계와 지식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교훈을 써 주지 않았느냐? 이는 네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서, 너에게 묻는 사람에게 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게 하려 함이다”(잠 22:20-21). 칠십인 역본에는 “조언과 인식 가운데 삼중으로 기술하라.”고 되어 있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러한 “삼중적 기입”을 성서의 육체와 혼과 영의 은유(Metapher)로 완성하였다.25) 가장 단순한 사람은 성서말씀의 직접적인 수용, 즉 우리가 성서의 육체라고 부를 수 있는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이미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사람은 성서의 혼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2:6-7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람은 장래의 선(善)의 그림자를 걷어낸 영적인 율법에 의해 인도된다. 성서의 은유는 육체와 혼과 영을 통합한 인간 본질의 은유이며, 여기에서는 가장 단순한, 진보를 이룬, 완전한 독자 혹은 청자의 단계와 결합되었다.

성서의 전체 본문은 혼과 영을 가지지만, 모든 본문이 육체를 갖는 것은 아니다.26) 즉, 몇몇 구절들에는 육체적인 의미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다음의 사례로써 설명하고 있다. 먼저 오리게네스는 본문에서 육체와 혼의 차이를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 밝히고 있다.27) “너는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기를, 곡식을 타작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나님께서 소들을 관련시키신 것이겠는가? 확실히 우리들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우리를 위해서 정말 기록한 것인데, 밭을 가는 자가 소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자가 소망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전 9:9-10) 본문에서 육체를 뜻하는 문자적인 의미는 분명히 소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토라의 계명을 영성화시켰는데, 즉 그는 이 본문을 혼과 관련지었다. 이것은 오리게네스에게 혼에 해당하는 주석의 전형적인 사례인데, 육체적인 의미를 혼의 지평으로 확실하게 위임한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학적인 은유의 참된 의미를 보게 된다. 즉, 오리게네스는 성서의 혼을 인간의 혼이라는 지평에서 육체적인 의미의 위임이라고 불렀다.

끝으로 영적인 해석은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에서 잘 드러난다. 오리게네스는 영적인 해석의 사례를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인용한 사도 바울에게서 찾았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갈라디아서에서 유사한 방식을 발견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 4:21-24).

구약 이야기의 사건, 즉 육체적인 의미는 위에 인용된 사례에서 보듯이 혼의 지평이 아니라, 천상의 일 혹은 장래의 선한 일인 영적이고 성령론적인 지평으로 위임된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학적인 은유는 인간에 대한 성서의 표상을 나타내는 데 어려움에 직면한다. 즉, 진술되고 있는 영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영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내주하는 신적인 영을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영은 영적인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해석의 지평을 갖는다. 즉, 하나님이 구속사에서 인간과 함께 행동하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영적인 의미가 계시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영적인 의미는 구약의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기독론적인 의미이다.28) 사도 바울과 유사하게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를 알레고리 방식을 통해서 추구하려고 시도했었다.

4. 성서해석의 과정과 의도

지금까지 밝힌 근거를 토대로 오리게네스는 이제 성서의 해석과 이해를 위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무엇보다 해석자는 거룩하고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본문의 의도를 현재화해야 한다. “우선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면 성령은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로고스’(요 1:2)를 통해서 진리의 종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비추어주셨고, 사람들의 역사와 관련해서 숨겨진 비밀들에 관한 가르침을 첫 번째 위치에 놓으시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을 한 몸을 시중드는 영혼이라 부르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는데,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되, 단어들의 의미가 하나님의 깊이까지(고전 2:10) 몰두하도록 하려는 것이다.”29)

저자(하나님)가 영감을 준 거룩한 본문은 주의 깊은 독자들이 확실한 가르침에 참여할 것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현 상황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오리게네스는 인용된 표현에서 성서의 의미가 완전히 명백한 것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암시했다. 본문 안에 포함된 비밀과 가르침을 포괄하는 의미의 깊이는 숨겨져 있다. 오리게네스는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풍성하고 현명한 진리”가 없이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30) 그러므로 거룩한 본문의 최종적인 의도는 영혼이 의미의 깊이를 통해서 완전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본문에서 의미의 깊이에 숨겨진 가르침과 비밀은 무엇인가?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를 자신의 저서 De principiis의 첫 세 권에서 다루었던 것과 유사하게 다루고 있다. 즉,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아들―아들 되심의 방법과 육체를 입으심과 완전한 인간이 되심; 이성적인 존재―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모습; 마지막으로 세계와 그 기원과 악의 원인에 대하여.31)

물론 성서 본문이 지닌 본래적인 취지 외에 영감을 주는 성령은 성서에 또 다른 의도를 부여한다. 성서 본문이 지닌 의미의 깊이를 통해 언급된 비밀과 가르침을 찾기 위해서 마땅히 필요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독자들을 고려해서 그(영감을 주는 영)는 영적인 의미를 성서의 육체적인 의미로 끌어들였다.32) 이런 외양(外樣)은 창조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문자라는 겉옷 혹은 성서가 보여주는 육체적인 외관은 유익한데, 많은 독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승리와 패배 속에 담긴 비밀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성서의 이야기와 율법의 수여 속에서 신적인 지혜를 발견하고, 예언 가운데 진리의 비밀과 율법이 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는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다.

육체적인 의미의 외관을 통해서 우리를 잠들지 않게 하고, 본래적인 의미의 깊이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고 성서에는 몇몇 구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33) 이 구절들은 낯설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일을 포함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 구절들은 신적인 말씀 자체에 의해 규정되는 성서의 경륜에 해당한다.34) 만일 이러한 터무니없는 구절들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무엇인가 신적인 비밀을 경험하고자 본문의 문자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깊은 의미는 단지 역사적인 사건의 설명뿐만 아니라, 결코 발생하지 않을 혹은 아예 불가능한 사물의 설명 가운데서도 존재한다. 율법의 수여라는 본문의 경우에 이 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계명이 중요하지만, 대개는 불가능한 것이 명령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의 경우 부지런한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추구하라고 지시한다. 이처럼 영적인(anagogie) 구절들은 신-구약성서에서 발견된다.

오리게네스는 터무니없어서 생각할 수 없는, 즉 영적인 구절들의 사례로 세상을 일주일 만에 창조한 창세기의 이야기나 신인동형론적인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한다(창 1-3장).35) 이처럼 오리게네스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발생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서 비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 사탄이 예수를 높은 산으로 끌고 가서 지상 왕국의 영광을 가리킨 사건(마 4:8)은 역사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또한 오리게네스는 토라의 말씀 가운데 불합리한 율법의 수여로 매와 매의 종류를 말한 레위기 11:14과 신명기 14:13을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14:5, 레위기 11:13, 그리고 신명기 14:12을 들어 존재하지도 않는 동물들을 어떻게 먹을 수 있으며, 포획이 불가능한 짐승을 먹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출애굽기 16:29의 말씀에 따르면 움직일 수 없는 장소에 제한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머물 수 있는 피조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계명 가운데 있을 수 없을 가르침으로 마태복음 5:29과 5:39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만일 누군가 이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36)

5. 영적인 진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신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의미로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성서의 율법들에는 문자적인 의미로는 가당치 않다거나 심지어는 불가능한 계명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 구절들은 독자들이 본문의 겉모습 아래에 숨겨진 비밀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를 더이상 속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드러나야 했던 것은 성서가 설명하려는 그 어떤 것도 역사적인 의미에서 발생할 수 있지 않으며,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쩌면 몇몇 성경의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아내들이 헤브론의 골짜기에 매장되었다든지(창 23:2, 9, 19; 25:9-10; 49:29-30; 50:13), 요셉의 아들들에게 세겜이 분배되었다든지(창 48:22), 예루살렘이 유다의 수도이며, 그곳에서 솔로몬이 자신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진정성이 있는 이야기들도 그 의미는 순전히 영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명령과 금지(출 20장; 신 5장)가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의 말씀으로(마 5-8장) 그리고 사도의 서신에서(살전 5:14) 문자적으로 이해된 것은 분명히 옳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각 계명들은 신적인 지혜의 깊이, 즉 문자적인 의미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37)

우리는 성서의 어떤 본문들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놓고 당혹해야 할 때가 있다. 실제로 몇몇 경우들에는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렵고, 철저한 연구가 없다면 불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요 5:39, 새번역)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누군가 성서를 신중하게 읽는 자라면, 그는 원문이 참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조심스럽게 검증해야 하며, 온 힘을 기울여 유사한 단어들이 성서 전체에서 드문드문 있는 불가능한 의미가 아닌지 찾아내야 한다.”38)고 강조했다.

문자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 그 의미를 추구하는 기본 규칙은 본문들이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종합하는 것이다. 은유는 이런 방향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은유는 확고한 기반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다. “연속하는 대목 전체가 문자 의미로는 이해될 수 없는 반면에 그 대목의 중요한 부분이 이해될 수 있고 또한 사실이라면, 전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해야만 한다. 원문에서 불가능한 진술은 그 영적인 의미에 따라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실인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말 그대로는 비역사적인 것과의 결합으로써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39)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주해는 성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체 의미란 상징적인 본문의 의미와 역사적이고 은유적인 가치를 지닌 본문의 의미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의 종합을 통해 비로소 성서는 정당성을 갖는다. 이때 근원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닌 상징적인 의미는 그 깊이에서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지만, 육체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종합으로써 성서가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그 사례로 언급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크기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모범으로써 제시했다.40)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고전 10:18), “이스라엘을 육체를 따라, 성령에 따라” 제시해야 한다. 육체적인 이스라엘에 주어진 그리고 그 문자적인 의미를 저급한 것으로 파악한 위대한 약속들은 무엇인가 고상한 것에 대한 비밀스러운 언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매개로 선포되는 약속들은 성령과 맞닥뜨리기 때문에 육체적인 방식으로는 전혀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육체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유일한 조상이 아담이며, “영적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한다.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아담이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 방식에서 동일하다. 모든 인간 종족이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에게로 소급되듯이, 영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모든 영혼의 어머니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과 그 중심지가 예루살렘이었듯이, 이 신비적인 병렬에서 그 영적인 의미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갈 4:26, 새번역)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모으기 위함’(마 15:24)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에비온주의자들이 이해했던 것처럼 그분은 오로지 육체적인 이스라엘을 위해 오셨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의 매우 주목할 만한 교회론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교회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41) 교회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이며, 그리스도는 이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문제는 오리게네스에게 영적인 지리학인 셈이다. 따라서 겸손 가운데 도래하신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도래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율법의 수여는 두 번째 율법인 신명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설명되었듯이, 그리스도의 도래는 분명하다.42) 이제 모든 거룩한 자들이 영원한 복음에 따라 모여들게 되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성서는 역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숨겨진 계획을 갖는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리게네스는 역사를 영적으로 파악하였다. 그에게 역사는 파괴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역사의 실재를 부정한다면 해석은 불가능의 것이 된다.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두고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마 13:44)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흙 자체와 표면, 즉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온갖 종류의 식물로 무성하게 덮인 밭이며, 더 높고 깊은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골 2:3) 있으며, 성령은 이사야를 통해서 ‘안 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사 45:3)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발견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 그분만이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시기’(사 45:2) 때문이다.”43)

두 가지 은유의 연결은 무엇보다 밭에 감추어졌던 그러나 닫힌 문 뒤에 숨겨진 보물처럼 우리에게 설명되어야만 한다. 성서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미는 그 단어들이나 혹은 이야기들 배후에서 밝혀지지도, 드러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 자신이 단단한 문을 깨부수고 나타나시듯이 우리에게 열려야만 한다. 오리게네스가 앞서 말했듯이 언제나 조심스럽게 성서 연구를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숨겨진 본문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선물처럼 기대하지 못했던 그러나 확실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밭에 감추어진 혹은 문 뒤에 봉해진 보물이라는 은유는 보물 자체와 그것을 숨긴 것 사이에 그 어떤 특정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세 번째 은유인 “질그릇 속에 숨겨진 보물”(고후 4:7)을 첨가한다.44) 신적인 의미의 보물은 별 가치가 없는 문자라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안에 에워싸여 있다.

이 마지막 도식은 이미 언급되었던 모순으로 소급된다. 즉, 한편으로는 성서의 문체적인 단순성, 혹은 인간적인 언어가 지닌 제약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의 신적인 내용 사이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더구나 이 은유는 보물에 숨겨진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기능을 갖는다. 보물은 값어치 없는 그릇 안에 고유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숨겨진 채로 있다. 마찬가지로 문자와 그 안에 숨겨진 중요한 의미의 관계도 이와 같다. 비록 성서의 신적인 의미가 인간적인 표현 방식이라는 제한된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이 표현을 중재로 전달되고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성서의 비밀스러운 의미 자체는 형언할 수 없으며 무한하기에 모든 해석자는 자신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해석의 길을 열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 자신의 모범이자 위대한 해석자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경험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통찰하신다.”(고전 2:10)고 말한 것처럼, 신적인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목표, 즉 가장 내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절망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을 두고 얼마나 절망하였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롬 11:33) 그는 하나님의 판단이 그냥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지 않고 전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분의 길도 그냥 찾기가 어렵다고 말하지 않고 전혀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 어떤 사람이 탐구하면서 향상되고, 열정적인 연구를 통해 진보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이성에 조명을 받는다고 할지라도(엡 1:18) 연구의 최종 목표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창조된 영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파악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찾은 것의 일부를 발견하자마자 다시금 찾아야 할 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다른 것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그것에서 찾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현명한 솔로몬은 세계의 본질을 지혜로써 고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해 보았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멀고 깊으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전 7:23-24).45)

성서 본문의 형언할 수 없음, 즉 신비적인 의미는 신적인 실재 자체의 깊이를 통해서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인간적인 통찰력으로는 온전하게 간파할 수 없고 오히려 새로운 시도와 함께 본문에 다가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방식을 계속해서 전진하고 나아갈수록 보다 많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근본 경험은 오리게네스의 완전한 성서해석학을 위한 열쇠를 제공해줄 것이다. 즉, 본문의 제한된 가능성 가운데 우리에게는 숨겨진 채 파악할 수 없는 실재가 본문에 대한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코 고갈되거나 소진될 수 없다. 따라서 이해의 사건에 이르는 해석의 과정은 하나님 자신이 단단한 문을 깨부수시고 철로 된 빗장을 박살내실 때에야 가능하다. 오리게네스는 성서 주해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성서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시도하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실재를 지시하였다. “이는 사물들의 경우, 그 의미가 인간의 언어로는 적절하게 설명될 수가 없으며, 오히려 말로 된 직접적인 표현들보다는 단순한 생각으로써 더 분명해지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신적인 성서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 규칙을 취해야만 한다.”46)


III. 나가는 말

성서해석학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수행을 종합해보자면, 해석이라는 경험은 본문이라는 무진장의 실재에 언제나 새롭게 다가가려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성서가 전적으로 영감을 받은 본문이라는 바탕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그의 해석이 지닌 특징은 성서가 진리이기에 독자들이 언제나 합리적인 설명을 인식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비록 본문 자체가 “제한된 문자”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야기이든 혹은 율법이든 일차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그 의미가 형성된다. 따라서 총체적인 혹은 완전한 의미는 그것이 단어의 의미와 관계가 있는지 아닌지를 통해 결정될 수 있다. 가령 신비-문학적인(창 1-3장) 혹은 이해 불가능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들은 단어 의미의 중대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단어가 지닌 의미가 중대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각 본문은 성서의 총체적인 의미를 계산에 넣은 다른 의미에 대해 열려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총체적인 의미는 본문에 기술된 단어 의미를 통해서 그리고 동시에 모든 본문이 지닌 의미들에 대한 총체적인 다양성 혹은 풍성함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때 전자의 경우에는 단어 의미가 중요한지를 물어야 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단어 의미가 지닌 중대성이 제외된다. 오리게네스에게 이 같은 총체적인 의미가 이해를 위한 기본적인 지평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새롭게 시도되고 창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에서 특정한 의미의 연속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오리게네스가 영적 해석에 치우쳤다는 그릇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의 해석학에서 특별한 역할은 본문에 담긴 문자적인 혹은 역사적인 의미이다. 단어 의미가 중요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단어 의미들이 새롭게 알레고리 의미들을 첨가하도록 그 필연성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항상 계속되는 해석이 총체적인 의미를 진척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에게 각 본문은 무한의 실재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전체 의미를 위해서 무제한의 해석을 열어 놓았다. 흔히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오리게네스가 알레고리의 방식을 통해서 플라톤 철학과 헬레니즘 전통을 기독교 성서와 기독교 공동체에 적합하도록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오리게네스는 단지 부록으로서 알레고리 해석의 두 지평을 구별하였다. 즉, 오리게네스는 알레고리를 통해서 성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서 성서가 말하려는 바를 읽어내려 했다. 그래서 성서의 단어적인/육체적인 의미를 혼적인 그리고 영적인 지평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혼적인 지평을 위해서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계명들을 인간적인 심리와 태도에 대한 비밀스러운 기상도(氣象圖)로 읽어야 한다. 이런 해석을 대개는 도덕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지평을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들과 계명들을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관점 혹은 시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관여가 역사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앙리 루박(Henri de Lubac)이 언급했듯이, 영적인 해석은 대개 교리적인 해석으로 분류될 수 있다.47) 한편으로는 본문에 대한 기본 해석이,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의 소식을 개별 영혼과 그 영적인 길에 관여하도록 하는 아나고기적인 해석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리게네스에게 성서해석은 기독론과 교회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해석이라는 두 가지 근본 지평은 단어의 의미를 풍성하게 전달해준다. 실제로 오리게네스에게 성서는 많은 식물을 품고 있는 밭과 같은데, 그 가운데 무한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오리게네스에게 성서 본문은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을 담고 있는 질그릇과 같다.48) 따라서 해석의 과정은 이 그릇을 항상 새롭게 손에 쥐는 데에서 시작한다. 해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나님 자신이 이해라고 부르는 견고한 문과 단단한 철을 깨부수고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다. 오리게네스에게 이러한 “개방”은 전체적인 의미라는 토대 위에서 발생하는 동시에 총체적인 의미로 구성된다. 비록 본문이라는 그릇은 유동적이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지평이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이 이 일을 수행하면서 이미 “사도들의 뒤따름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교회의 규칙”이라고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성서의 해석은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지평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공동체는 언제나 지속적이며 개방된 해석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Notes
1) 이를 니콜라스가 잘 설명해 놓았다. Nicolas von Lyra, Nicolas von Lyra, Postilla super totam Bibliam, Teil 1 (Basel: Johannes Petri & Johannes Froben, 1506), S. 21. “Quattuor sunt regulae sacrae scripturae: id est historia quae res gestas loquitur. Allegoria: in qua aliud ex alio intelligitur. Tropologia: id est moralis locutio: in qua de moribus ordinandis tractatur. Anagogia: id est spiritualis intellectus per quem de summis et caelestibus tractaturi ad superiora ducimur.”(성서를 해석하는 네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는 행위/발생한 일에 관한 보도인 역사적 의미, 둘째는 기록된 것과는 무엇인가 달리 이해하는 알레고리적 의미, 셋째는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질서를 다루는 트로폴로기적 의미, 끝으로 최상의 혹은 천상의 일을 말하고 위를 지향하도록 하는 영적인 이해를 뜻하는 아니고기적 의미).
4) 앤서니 C. 티슬턴,『해석의 새로운 지평』(서울: SFC, 2016), 249. “오리게네스가 ‘문자’를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말들의 거친 도구’ 그 자체에 의해 감동되거나 설득되거나 변화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말들이 생명으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Henri de Lubac, Exegese medievale, Bd. 1 (Paris: Aubier, 1959), S. 198-219.
5) 앞으로 Peri Archon은 라틴어로 번역된 De Principiis로 표기할 것이다. 지난 2014년 오리게네스의 저작은 우리말로 공들여 번역되었다. 오리게네스,『원리론』이성효, 이형우, 최원호, 하성수 역 (서울: 아카넷 2014).
6) 비록 오리게네스가 독창적인 신학자의 위치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기독교 교리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간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참고. 앤서니 C. 티슬턴,『기독교 교리와 해석학』김귀탁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478.
7)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를 창세기 설교와 레위기 설교에서 다루었다.
10) 여기에는 Jean Danielou, Henri de Lubac, Richard P. C. Hanson, Rolf Gögler, Winfried Gruber, Karen Jo Torjesen, Manlio Simonetti, Bernhard Neuschäfer 등을 들 수 있다.
13) De Principiis IV.1.1.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나 이미 말한 것에 관해서 이 증언들이 확실하고 의심할 바 없이 신뢰를 지니려면 우선 성서 자체가 거룩하다는 것, 즉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14) De Principiis IV.1.2.
15) Ibid. “그리스도의 말씀이 권위와 설득력을 갖고 모든 사람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 때문이 아님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16) De Principiis IV.1.6.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 모세의 법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내고, 문자를 가리고 있던 너울이 벗겨지고, 그 안에 숨겨진 모든 좋은 것들이 드러났다.”
17) De Principiis IV.1.7.
18) Ibid. “이 세상에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섭리의 힘으로 질서정연하게 되어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되기에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 완전히 숨겨진 경우도 있다.”
19) 이처럼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길을 위해서 기독론적인 해석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취지가 성서의 신비적인(anagogia) 의미에서 자명하게 드러났다.
20) De Principiis IV.2.1.
21) De Principiis IV.2.2.
22) Ibid.
23) 장막에 관한 해석은 다음을 보라. Philo of Alexandria, De Vita Mosis (『모세의 생애』), II.18.89;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양탄자』), V.6.32-36; 오리게네스,『원리론』, 758 참고.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를 출애굽기 설교 11편(Homiliae in Exodum XI)에서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영적인 알레고리로 해석하였다.
24) De Principiis IV.2.4.
25) 성서의 은유를 생생한 본질로 파악했던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였다. 그는 문자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성서의 육체와 내포된 채로 보이지 않는 의미인 성서의 영혼을 이야기했다. H. de Lubac, Histoire et Esprit (Paris: Aubier, 1950), S. 162 이하. 독일어 번역은 H. Urs von Balthasar, Geist aus der Geschichte (Einsiedeln: Johannes, 1968).
26) De Principiis IV.2.5. 여기에서 오리게네스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언급하면서, 여섯 개의 물동이마다 둘 혹은 셋의 용량이 차 있었다는 말씀(요 2:6)을 바탕으로 각 본문은 이중적 혹은 삼중적 의미를 내포하는 암시로 보았다.
27) De Principiis IV.2.6.
28) De Principiis IV.2.
29) Ibid.
30) Ibid.
32) De Principiis IV.2.8.
33) De Principiis IV.2.9. “하나님의 지혜는 성서의 본문에 어떤 불가능한 일과 적절하지 않은 것들을 끼워 놓으셔서 역사적 의미의 걸림돌이나 단절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를 통해 우리를 우뚝 솟은 길로 이끄시려는 것이다.”
34) Ibid.
35) De Principiis IV.3.1.
36) De Principiis IV.3.3.
37) De Principiis IV.3.4. “우리는 문자가 이해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그 자체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략) 그러나 성령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이야기에 어떤 것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38) De Principiis IV.3.5.
39) Ibid.
40) De Principiis IV.3.6-10.
41) De Principiis IV.3.10.
42) De Principiis IV.3.13.
43) De Principiis IV.3.11.
44) De Principiis IV.3.14.
45) Ibid.
46) De Principiis IV.3.15.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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