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 Article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Vol. 47, No. 0, pp.39-83
ISSN: 1738-1509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Mar 2019
Received 09 Jan 2019 Revised 09 Feb 2019 Accepted 18 Feb 2019
DOI: https://doi.org/10.18804/jyt.2019.03.47.39

1970년대 한미 관계와 민족복음화 운동의 상관관계*

이은선
안양대학교, 교회사 eunlee@anyang.ac.kr
Correlation between US-ROK Relations and the National Evangelization Movement in the 1970s
Lee, Eun Seon

초록

1970년대 한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1971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였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과 데탕트를 추구하는 가운데 군비축소를 위해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면서 북한과 대화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6.23선언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불안과 경제의 효율성을 내세워 유신체제를 수립하였고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인권을 탄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의회에서 프레이저 의원을 중심으로 한국 인권청문회가 개최되었고, 한국에 대한 군사와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자 하였다.

한국 정부가 유신체제 수립으로 독재정치를 시행할 때,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여의도 광장을 사용하면서 정부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고, 한국의 보수 교회는 정부의 안보위기에 따른 반공의식 강화에 상호 협력하였다. 그와 함께 한국의 종교와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비판 여론이 고조될 때, 기독교인들은 여의도 대형집회를 통해 국제 사회에 한국 정부가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그와 함께 기독교실업인회의 김인득 장로와 김인준 장로와 김장환 목사는 1975년부터 76년 사이에 3차례의 방미 민간외교 활동을 통해 반한 감정을 완화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1976년에 프레이저 의원이 제안한 한국 군사원조를 삭감하는 413호가 통과되었다. 그러나 포드 대통령의 거부로 의회로 반송되었을 때, 한국원조를 지지하는 더윈스키 안이 통과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활동과 함께 김인득과 김장환 목사의 후원활동을 받은 미국의 극동방송 사장 보우만이 협력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보수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기독교인들과 실업인들의 인맥을 통해 한미 관계를 돈독히 하여 안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Abstract

The most important agenda in the 1970’s Korea-US relations was the withdrawal of US troops that began in 1971. The United States, while pursuing detente with China and the Soviet Union, withdrew its troops from Korea in order to reduce arms costs. The United States demanded that South Korea talk to North Korea. In this process, the 7.4 North-South joint statement was announced and the 6.23 declaration was made. However, Park Chung-hee set up a restraint system with the efficiency of the economy and security anxiety due to the withdrawal of US troops. He took urgent action and oppressed human rights. Then, the US Congress held a hearing on Korean Human Rights, and sought to reduce military and economic aid to South Korea.

When the Korean government implemented dictatorship by establishing a Yushin system, Korean churches promoted national evangelization. In the process, the Korean church received material support from the government while using Yeouido Square. Then, Korean conservative churches cooperated with government in strengthening anticommunism with it’s security crisis. At the same time, international criticism of Korean religion and human rights violence was heightened. Through the large-scale rally in Yeouido, Christians created the international opinion that supports the Korean government permitting freedom of faith and assembly.

In addition, Elder Kim In-deuk who was the president of Christian Businessmen’s Association, Elder Kim In-joon and Pastor Kim Jang Hwan acted to mitigate anti Korean feelings through three private diplomacy between 1975 and 1976. In 1976, 413 Bill which was proposed by Rep. Fraser to reduce Korean military aid, was passed. However, when it was rejected by Ford and returned to Parliament, the Derwinski’s Amendment Bill which supports Korean aid, was passed. In the process, together with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government, Bowman, president of the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 of the United States, cooperated with Kim In-deuk and Pastor Kim Jang-hwan. In this way, conservative Christians helped to strengthen Korea-US relations through the connections of American Christians.

Keywords:

1970s, Korea-US Relations, National Evangelization, Christian Businessmen’s Association, Private Diplomacy

키워드:

1970년대, 한미 관계, 민족복음화, 기독실업인회, 민간외교 활동

I. 들어가는 말

1970년대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를 목표로 여의도 광장에서 대형 전도 집회들을 연속적으로 열면서 양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대형집회의 시작은 1973년 5월에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였다. 이 전도대회는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 되어 계획된 것으로 당시 세계적인 복음주의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을 초청하여 열렸다. 1974년에는 한국 CCC의 김준곤 목사가 중심이 되어 ‘엑스플로 74’를 개최하였다. 엑스플로 74는 한국교회에 대중전도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77 민족복음화 성회’를 개최하였다.1)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이러한 대형집회들을 통해 한국교회는 놀라운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러한 대형집회들을 통해 성도들의 숫자는 1970년 319만 명에서 1980년에 718만 명으로 증가하였다.2) 이러한 한국교회의 유례없는 양적 성장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미 1965년부터 민족복음화를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위에서 언급된 여러 대형집회들을 통해 지속적인 민족복음화 운동을 진행하였다.3) 그와 함께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촌에서 진행되었던 새마을운동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로 대표되는 번영신학의 조화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4)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았다. NCCK 계통의 진보 노선의 교회들은 이러한 양적 성장의 집회를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였고,5) 노동현장에서는 산업선교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권익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양면적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한미 관계는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기존의 민족복음화 운동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은 반공주의 운동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데 반해,6) 박용규와 박명수는 대중전도 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족복음화 운동이 국내 교회의 성장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과 국내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진보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복음화를 지지하였던 원인을 천착하였다.7) 이러한 기존의 연구들은 국내의 정치사회 상황과 연관시켜 민족복음화 운동을 연구하여, 미국과의 관계에는 주목하지는 못했다. 1970년대 한국교회의 상황을 한미 관계와 연계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당시 활동이 인권, 반공, 그리고 안보 등에서 한미 관계와 일정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주목할 점은 여의도 광장에서의 대형집회는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정부 당국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대형집회들을 지원했는지에 대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의 외교관계는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한미 관계 속에서 한국교회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1970년대 한미 관계를 분석한 후에 그러한 한미 관계 속에서 여의도에서 진행된 민족복음화 운동의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국내 기독교인들이 당시 한미 관계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II. 197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 시기의 한미 관계: 닉슨 독트린과 카터 독트린

1970년대 미국 대통령은 닉슨(1969-74)과 포드(1974-77), 그리고 카터(1977-81) 대통령이다. 이 가운데 포드는 닉슨이 워터케이트 사건으로 중도하차 하자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하였다. 이 세 명의 대통령 가운데 한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은 닉슨과 카터이다. 닉슨 독트린과 카터 독트린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닉슨 독트린과 국내 정치 상황을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 카터 독트린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닉슨 독트린과 미군 철수

닉슨(Richard Nixon)은 미국의 월남전 참전의 장기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해결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이 공약 실천을 위해 닉슨 독트린을 마련하였다. 닉슨 독트린은 미소 냉전의 외교정책에서 탈피하여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축소하려는 정책이었다. 1969년 7월 닉슨은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자주국방능력 강화와 미국의 군비감축 방침을 천명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방위조약은 준수하고 핵공격에 대해서는 미국이 직접 대처하지만, 재래식 무기의 공격 시 아시아 국가들은 자주국방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8)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신의 외교정책의 천명이었다.9)

이러한 닉슨 독트린은 미군 철수와 남북대화 권면이란 두 가지 정책에서 우리나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하여 미국은 이미 존슨 대통령 시절인 1968년부터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와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고 있었다.10) 미 정부는 1969년 12월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비공식적으로 우리 정부에 통보하였다. 한국 정부는 철수 불가의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1970년 2월에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대비책을 준비하였다. 미국은 그해 7월 5년간 10억 불의 추가 원조를 약속하며 한국 정부에 미군 철수 계획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11) 이러한 방식으로 구체화된 미군 철수 계획은 1971년 2월 미 7사단의 철수로 결정되었다. 박 대통령은 이에 따른 국방력 강화를 위해 미국에게 무기 현대화를 요구했고, 한미 관계를 동맹과 자주국방의 양면에서 대응하였다. 전자는 미국과의 새로운 군사협력의 모색이고, 후자는 내부적 자원 동원과 전략무기 개발을 통한 안보의 자율성 추구였다. 한국의 자주국방 모색은 독자적인 전략무기체계 개발에 따른 방위산업 육성, 둘째는 독자적인 한반도 작전계획 수립과12)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한미동맹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13) 미국의 한국방위 역할의 후퇴에 따른 박정희 정부의 대응 목표는 주한미군의 추가 철수를 저지하고 북한의 다양한 위협을 억제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내부와 외부 간의 균형을 모색하는 현상유지적인 성격에서 시작되었다.14)

2. 남북대화와 7.4공동성명

닉슨 독트린이 미친 두 번째 영항은 남북대화의 추진이었다. 닉슨은 1970년 2월 미 의회에 보낸 외교교서에서 공산국가와 대결보다는 협상을 통해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특히 대만과의 기존 조약을 준수하면서도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해 나갈 것임을 천명하였다.15) 미중 관계 개선은 1971년 4월 핑퐁외교로 시작되어, 7월에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닉슨의 중국 방문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은 미국이 중국과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다극화’되고 있던 세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이었다.16) 미중 화해정책에 따라 중국은 1971년 11월 대만을 대신하여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닉슨은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하여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1969년부터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유연한 대공산권 외교와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였다. 특히 중국과 화해를 추진하면서 한국 정부에 대북대화를 권고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북한도 남한과 같이 하나의 정부로 인정하는 두 개의 한국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분단 상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17) 한국 정부는 초기에 소극적으로 반응했으나, 1971년 대선과 총선을 치른 후에 북한과 대화에 나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추진했다. 이 남북접촉은 7월에 발표된 닉슨의 중국 방문 계획이 결정적이었다.18) 남북대화 과정에서 남한보다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임했다. 김일성은 1972년 1월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남북평화협정 체결, 남북불가침조약 체결, 주한미군 철수 후 남북한 군사력 감축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자고 제의했다.19)

남북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적십자 회담에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북한은 정치 군사적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적십자 회담을 했다. 그러나 남한은 인도적인 문제에서부터 대화와 교류를 하면서 점진적으로 정치와 경제적인 문제로 나아가고자 했다. 당시 남한 정부는 남북대화를 하면서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위기를 해결하고자 방위산업을 발전시켜 자주국방 태세를 갖추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하였고, 또한 미국에게는 남북대화를 하는 동안 강력한 국방력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미군 철수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남북대화 과정에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중심으로 한 7.4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북한은 7.4 공동성명에서 자주는 주한미군의 철수, 평화는 남조선 혁명, 민족대단결은 북한의 혁명에 찬동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남한 내의 공산당을 반대하는 각종 법률들과 장치들을 없애고 남북이 합작하여 통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20) 김일성이 남북대화를 통해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닉슨 독트린의 시행에 따른 한미동맹의 이완과 미군 철수를 달성하면서,21) 4대 군사노선의 천명 이후 악화된 경제문제의 해결이었다. 박 대통령도 남북대화에 나서면서 미군 철수가 자신의 남북대화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여 미군 철수를 지연시키고자 하였고,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 정책 기조가 1950년대의 냉전체제하의 하나의 한국정책에서 이제 두 개의 한국정책으로 변하면서,22) 북한이 평화 공세와 대서방 적극 외교로 나오자 박정희 정부는 실질적으로 두 개의 정부를 인정하는 6.23선언으로 맞서게 된다. 한국 정부는 1973년 미국 정부의 권고에 따라 한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개선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6.23선언’을 발표하고 ‘사실상 두 개의 한국정책’(de facto two Koreans)을 공식화했다.23) 그러나 북한은 6.23선언의 두 개 조선의 유엔가입 안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회피하려는 한국의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1973년 8월에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남북대화를 중단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24)

3. 유신체제 수립

박정희는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긴장이 완화되고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던 가운데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박정희는 1972년 8.15 경축사에서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한 대동단결을 표명하며 “대의제도의 비효율성,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점, 민주주의가 분열과 파쟁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비판하며 성실과 능률에 바탕한 대동단결을” 촉구했다.25) 그 후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는데 남북대화의 적극적 전개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중요한 명분으로 강조했다.26) 유신체제는 경제성장의 효율성과 안보체제의 확립을 2대 지표로 내세웠다.

유신체제 수립에 대해 외인론은 닉슨 독트린에 따른 국제정세의 급변속에 등장한 안보위기를 주장한다. 당시 외교정세는 닉슨의 2월의 중국 방문과 양국의 관계 정상화, 5월 닉슨과 브레즈네프 사이에 정상회담을 통한 전략핵무기 제한협정 체결, 7월 일본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에 따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급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동북아시아가 안정되었다고 보고 한국에서 미군 일부를 철수시켰는 데 반해,27) 박정희는 북한군사력이 강화되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의 가능성에 따른 안보위기가 발생하여 그 위기를 타개하고자 유신체제를 선포한다고 주장하였다. 닉슨 독트린으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개입 축소 정책을 취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군사력 공백에 따른 안보불안을 느껴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8) 반면에 미중의 화해와 남북대화는 안보위기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북관계의 개선의 시기였는데,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위기론을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29)

내인론은 박 대통령이 장기집권의 권력의지가 있어 국가안보와 남북대화를 이용하여 권위체제를 형성했다는 설명이다. 유신체제를 수립한 배경에는 국내 저항세력의 성장을 들 수 있다. 1969년의 삼선 개헌에서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이 강화되고, 1971년 총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차로 승리하면서 박정희는 선거를 통한 장기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 장기집권을 위해 10월 유신이란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하였다는 주장이다. 남북대화의 모색과 그를 통한 유신체제의 성립은 국내 정치 환경을 조성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명분으로 활용한 것이었다.30)

또한 냉전체제 약화에 따라 형성된 권위주의 체제가 유신체제라는 설명도 있다. 미국은 1970년대 초에 냉전체제에서 화해정책으로 이동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북대화가 추진되었다. 부분적인 냉전해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이용한 냉전구도가 약화되고 남북대화가 진전될수록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미중의 화해에 따른 국제적 긴장완화와 남북대화 진전에 따른 통일 논의 과정에서 박정희는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이다.31) 이와 같이 최근에 이르러 유신체제는 개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체제 구축이란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북한의 군사적인 우위32)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국가안보위기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토대로 생겨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와 미중 접근에 따른 대외정세 변화를 안보위기의 상황으로 규정했고, 데탕트에 따른 강대국 간 긴장완화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므로 여기에 한국의 안보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인데” 마상윤은 이러한 박정희의 입장을 모겐소의 국익론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33)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미국은 10월 유신과 미국은 전혀 관련이 없이 무관하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34) 박정희는 특별선언문 초안에서 미중, 중일의 외교관계의 변화에 대한 국제관계의 냉엄함 때문에 국내의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한다고 주장했는데, 미국의 개입으로 이러한 내용은 거의 삭제되었다.35) 반면에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하려던 헌법개정과 국민의 권리에 대한 억압에 대해서는 묵인 정책의 입장을 채택하였다.36) 1974년 국무부의 동아시아국 관리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미국 정부는 타국가의 정부형태보다는 그 국가의 대외정책에 조응하여 외교정책을 결정한다.”는 명제를 적용하다 보니 미국 정부가 권위주의 통치 국가를 점차 더 용인해주는 방향으로 갔다고 서술한다.37)

4.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미국 정부가 묵인하는 가운데 유신체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제도와 대통령 간선제를 도입하여 대통령의 종신집권제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유신헌법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장기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조치권(53항)과 계엄선포권(54항)이 제정되어 있었다.38)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세력을 억압하고자 하였으나 저항세력은 지속적으로 등장하였다. 유신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1973년 10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었고 종교계의 저항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반독재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4년 12월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조직되었다. 1975년에는 땅굴사건과 인도차이나 공산화 사태로 민주화 운동이 주춤했으나, 1976년 3월 1일 김대중과 윤보선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민주화 구국선언으로 민주화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대를 조직하였다.

박정희는 저항세력들을 탄압하고자 긴급조치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8일에 주변정세의 변화나 북한의 도발을 거론하며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령하여 일체의 헌법개정 논의를 금지시켜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유신반대 운동은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규명과 더불어 민주헌정의 회복과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병행하면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긴급조치 1호는 이러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였고, 유신반대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와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에 의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39) 그리고 1974년에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된 사람은 48명이다.

1974년 4월 3일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 일부 대학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유신반대 시위에서 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유인물이 뿌려지자, 박 대통령은 그날 자정에 긴급조치 제4호를 발령했다. 이 조치는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 사건과 그 배후조직으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탄압하기 위해 취한 강력한 조치였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7월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이에 앞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7명에게 사형, 8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1974년 말 집계로 볼 때, 민청학련 및 인혁당 관련자 169명이 처벌되었다.40)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 12월에 산업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교의 오글 목사의 추방과 1975년 4월에 인권보호 활동을 하던 시노트 신부의 강제출국이 발생했고, 미국의 반한세력들은 지속적으로 한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레이저 의원을 중심으로 미국 하원에서 한국 인권청문회가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한국의 인권 상황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식량원조에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1975년 4월 고려대 학생 약 2,000명이 학내에서 반(反)유신 시위관련 구속자 석방과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개헌 데모가 있자, 박정희는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긴급조치 제7호는 군대를 동원하여 특정 대학교를 장악하는 최악의 사태를 합법화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41) 더 나아가 5월에 박정희는 베트남 공산화로 인한 국민의 고조된 안보위기 의식을 이용하여 체제유지를 위해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히고자 긴급조치 제7호를 해제하고, 대신에 영구집권을 위해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하였다.42) 이때는 국외적으로 4월 17일 크메르 정부가 공산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이 패배하여 베트남이 공산화하자 공산세력의 확산에 대한 우려와 함께 북한에 의한 남침과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 9호와 관련해 제정되거나 개정된 법률에 의해 전시 총동원 체제로 극단화되면서43)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려는 체제의 요새화였다. 긴급조치 9호 이후 1975년 7월 후속조치로 4대 전시 입법인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기본법 및 대학교 학도호국단 부활을 위한 교육관계법 개정법률 등을 포함한 21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러한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람은 1975-79년 사이 580명이나 되었다.

5. 미국 하원의 인권청문회: 프레이저 의원의 활동

박정희 정부는 닉슨 정부의 일방적 미군 철수로 발생한 안보불안에 직면하여 자주 국방력을 강화하고,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아 한미동맹을 굳건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런데 유신체제하에서의 인권 탄압에 대한 미 의회의 비판과 그에 따른 군사원조와 식량원조 자금의 삭감 문제에 봉착하였다. 프레이저 의원이 주도하는 한국 인권청문회가 개최되어 한미 관계는 깊은 갈등관계를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생겨난 대표적인 박정희 반대세력이 1973년 7월에 김대중이 조직한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였다. 이 조직은 1972년 유신헌법이 공표되자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이 본격적인 유신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그는 일본지부를 조직하러 일본에 건너갔다가 1973년 8월에 중정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가 납치된 후에 1974년 11월에 김재준 교수가 2대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로서 197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깊이 관여하다가 정부의 탄압이 심화되자, 1974년 초 캐나다의 토론토에 와 있었다. 그와 같이 활동한 ‘한민통’ 미주본부의 임원진에는 명예의장 김대중, 부의장 전 해군참모총장 이용운, 동원모 등이 추대되었다.44) 이렇게 1973년 후반기부터 한인 반한 인사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반한 활동을 하던 진보성향 미국인들도 1974년 전반기부터 한국의 인권 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Jerome A. Cohen) 교수와 터프트 대학의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는 1974년 5월 뉴욕타임스에 “한국: 이제 경고의 호각을 불 때”라는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였다. 전 주일대사였으며 하버드 대학 동양사 교수였던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도 7월에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한국 인권 상황을 비판하면서 한국에 대한 원조 삭감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다.45)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74년 12월에 오글 목사를 추방했고, 1975년 4월 시노트 신부를 강제 출국시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반한 여론 속에 미국 의회가 한국 인권 상황을 군사원조와 연계하기 시작했다. 1973년 4월 풀 브라이트는 대외군사원조법안을 심의하는 석상에서 “미국의 우방국가의 공산화 여부보다 군사통치화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언급하였다.46) 하원외교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는 1973년 8월부터 칠레, 브라질, 소련 등의 인권 상황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해 8월에 김대중이 동경에서 납치되었고, 1974년에 긴급조치 1호와 4호가 발표되어 인권 탄압이 심해지자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에 따라 미 하원외교위원회는 7월 30일 국제기구소위원회와 아태소위가 공동으로 ‘한국의 인권’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청문회에 출석한 하멜 미 국무성 차관보는 “한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인권의 제한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 노력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에 분명히 통고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47) 그 후 청문회는 8월과 12월에도 열렸다.48)

1974년 12월에 프레이저 의원은 한국의 인권을 문제삼아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액을 74회계연도의 1억 7500만 달러에서 1억 4500만 달러로 삭감하는 안을 제안했는데, 이 수정안이 64대 44로 통과되었다.49) 그 후 포드 대통령은 1975년 12월 7일 신독트린을 발표하여 주한미군 주둔을 현상 유지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50) 그러나 한미관계는 1976년 10월에 워싱턴포스트지가 코리안 게이트를 폭로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부가 닉슨 대통령 시절에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고자 진행했던 의회 로비활동이었다.

6. 카터 독트린과 미군 철수

카터 독트린은 1977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가리키는데, 한국과 관련해서는 미군 철수와 인권외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첫째는 카터가 후보시절부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주한미군을 5년 내에 철수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 한미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미군 철수와 그에 따른 한국의 안보불안이었다. 포드 대통령이 미군 현상유지 정책을 결정했던 상황에서 1977년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자 다시 5년 내에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카터의 미군 철수에 대해 주한미군 사령관과 지휘참모들, 미 국무부 내 몇몇 관리들, 의회의 반대파들, 국내의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과 일반 시민들이 안보위협을 이유로 미군 철수를 반대하였다.51) 이러한 여러 반대에 직면한 가운데 1978년에 북한군 병력에 대한 재검토 과정에서 북한군이 상당히 증강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결국 보수적인 상하원의원들의 반대 속에 카터 대통령은 1979년 2월에 미군 철수의 일시정지를 선언하였다. 북한군의 수준, 미중 정상화의 영향, 남북대화의 진전 등을 재평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52) 1979년 6월 카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이나 미군 철수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미국은 세계 냉전 상황이 완화되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박 대통령은 소련의 팽창정책과 북한의 무력증강과 호전성을 강조하며 미군 철수의 불가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한미 간의 의견 차이 속에서 카터는 결국 7월에 1981년까지 철수를 유보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미 군부가 월남전 패배 이후 다시 위치를 회복하고 있었고 키신저 밑에서 외교정책의 주도권을 잃었던 국무부가 목소리를 찾아가면서 이들과 함께 의회가 반대할 때, 카터는 미군 철수 공약을 실천할 수 없었다.53)

7. 카터 독트린과 인권외교의 등장

코리안 케이트가 터진 상황에서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정책을 내세워 당선된 후에 박정희 정부의 인권정책에 대해 압력을 가하면서 마찰이 발생하였다. 카터 인권외교의 등장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나는 냉전의 완강한 집행자였던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와 균형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키신저의 실리외교에서 도외시되던 인권을 의회가 주목하면서 정부도 이를 중시하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전환기 속에서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1974년 중간선거 이후 70년대 의원들의 반 이상이 교체되는데, 젊은 의원들은 반전운동에 호응하고 반공정책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인권과 이상을 주장하게 되었다. 냉전하의 미국 외교는 실리주의 혹은 현실주의로 기울었던 반면에 의회에서 프레이저 의원을 중심으로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자 국무부도 관심을 보이면서 원조 국가들인 한국과 칠레의 인권 상황에 대해 미 대사들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하였다.54)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의회는 1976년에 인권문제와 원조를 결부시키는 외국원조법을 제정하였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미국인들은 냉전의 실리외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결국 1976년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의 당선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실리외교에서 인권을 중시하는 도덕외교로 전환하게 되었다.55)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박정희 정부는 상당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77년 2월에 박 대통령에게 안보 관계와 같이 인권 분야에서도 한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요구하는 비밀서한을 보냈다.56) 미 정부는 1977년 3월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나 한국 인권문제를 공식 제기했다.57) 미 의회는 1977년 국제 안보원조와 무기 수출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킴으로써, 안보원조를 인권과 관련시켜 수정 혹은 중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부는 NCCK 계열의 목회자들을 계속해서 구속함으로써 인권 상황을 악화시켰다.58)

이런 가운데 카터의 한국의 인권문제 제기는 1979년 6월에 열린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카터는 미군 철수를 유보하는 가운데 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인권 상황을 개선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대해 박 대통령은 7월 미 대사를 통해 향후 6개월간 180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카터의 인권 개선 요구는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미국의 압력으로 박 대통령의 인권 탄압이 약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그에 따라 10월 중순부터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0월 26일 박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10월 26일 사건에는 카터의 인권정책이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59) 카터 대통령은 김영삼 제명파동이 일어나자 미국 대사를 소환하였고 원조 삭감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부마사태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 대한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 속에서 10.26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카터의 인권정책은 한국 유신체제를 붕괴시키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III. 민족복음화 운동과 박정희 정부와의 연결고리

1970년대 국내 교회들은 여의도에서의 대형집회를 개최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당시 여의도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하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러한 여의도의 대형집회는 국가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집회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형집회들은 교회의 대중전도를 통한 민족복음화의 내부적인 동력과 함께 국가의 외부적인 후원 속에서 진행되었다.

1. 박정희 정부와 민족복음화 운동의 연결고리

민족복음화 운동은 민족 전체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추진되었는데, 이 목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의도 광장의 사용에서 국가지원을 받았다. 한경직과 김활란 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1965년부터 민족복음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들과 함께 민족복음화를 위해 활동한 김준곤 목사는 미국의 국가조찬기도회를 모방하여 대통령조찬기도회를 만들었다. 이 기도회는 1968년부터 1979년까지 5월에 매년 열렸다.60) 이 기도회를 통해 기독교계는 정치권력과 유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호연관 속에 1970년 2월부터 모든 군인들에게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를 하나씩 갖게 하는 것이 “반공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며 제안”된 전군 신자화 운동이 시작됐다.61) 당시는 1968년 울진·삼척의 120명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1969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 1970년 7월에 통보된 미군감축 등으로 안보의식과 반공의식의 고취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기독교계와 안보의식의 강화가 필요하던 국가가 반공이란 공통 관심사를 매개로 상호연결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해방 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형성된 기독교의 철저한 반공사상62)은 정부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반공사상을 강화하고자 하였을 때 커다란 지원세력이 될 수 있었다.

전국 신자화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 민족복음화를 위해 열린 대형집회가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와 1974년의 ‘엑스플로 74’였다. 두 개의 집회를 통해 한국교회는 한 번 집회에 백만 명 이상이 모이고, 수만에서 십만에 이르는 회심자를 얻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 대형집회는 순수한 복음전파의 현장으로 한국복음주의가 시작되고 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63)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 대해 박 대통령도 상당한 지원을 하였다. 주강사로 초청받았던 빌리 그레이엄은 5월 25일 군악대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한국에 도착했고, 26일에는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여 50분간 환담을 하였다. 빌리 그레이엄이 전도집회에 정부가 지원해 준 것에 감사하고 닉슨 대통령의 안부를 전하였다. 당시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고자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과 절친한 빌리 그레이엄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으나 “우리나라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또한 종교의 역사적 공헌은 이미 빛나는 전통이 되어 있다.”라고 대답했다.64)

여의도에서 열린 대형집회 과정에서 “군공병대는 많은 장비와 병력을 투입하였고, 매일 수십만 명이 넘는 청중의 안전을 위해 1,800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 대회장엔 90평짜리 2층 구조의 높다란 강단, 6천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스탠스식 성가대석, 1천석의 귀빈석 등 모두 초대형이었다. ... 서울시가 대회기간 중 여의도 일대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시킨 것도 해방 뒤 처음의 특례였다.”65) 이러한 지원은 이후의 여의도 집회가 열릴 때마다 거의 비슷하게 제공되었다.

이러한 행정 지원을 받은 보수주의 기독교계는 반공과 반한 여론의 무마라는 측면에서 정부와 협력하였다. 당시 박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추구하면서 안보위기 극복과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단합을 내세웠다. 기독교계는 반공을 매개로 국가의 안보위기에 대한 주장에 동조했다. 이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단합이란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며 산업전도 활동을 했던 진보적인 기독교계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경제발전 정책을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안보를 걱정했”기 때문이다.66)

당시 한국 정부가 독재정치를 하면서 종교와 인권을 탄압한다는 국제적인 비판이 대두되었다. 특히 WCC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고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한국 정부의 독재정치와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대규모의 기독교 집회를 허용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잠재우고자 했다. 정부는 기독교인들의 여의도 대형집회 개최를 후원하여 한국 기독교가 발전하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가 기독교인들의 종교집회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도는 빌리 그레이엄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정부와 협력하면서 국가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 빌리 그레이엄과 빌 브라이트의 복음주의

여의도에서 열린 1973-74년의 두 개의 집회에 참여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빌리 그레이엄과 빌 브라이트이다. 당시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에서 협력전도를 하는 가장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였다. 그의 대중전도 집회에서 여의도 전도집회는 백십만 명이 참여한 대형집회로도 유명하고67) 그의 설교하는 장면을 뒤에서 찍은 사진은 복음주의권에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68)

빌리 그레이엄은 1949년 로스앤젤레스의 초기 부흥집회를 시작할 때, 근본주의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57년 뉴욕 전도집회 때부터 이러한 성격의 부흥집회에서 탈피하여 협력전도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복음전파의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었으나,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복음주의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복음전파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협력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69) 그는 이때부터 협력전도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온건한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WCC를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취하였다. 1961년에 IMC가 WCC에 흡수되자, 그레이엄은 복음주의 진영의 전도와 선교의 입장을 밝히고자 1966년 베를린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1974년에는 존 스토트와 함께 힘을 합쳐 복음전파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로잔언약을 체결하는 로잔운동에 가담하였다.

반공에 대한 그레이엄의 입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였다.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상당한 정도로 초기 그레이엄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신학적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전사로 자신을 정의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복음 메시지 다음으로 그는 그 밖의 어떤 것보다 자주 이 위협을 설교하였다. 1953년에 시카고데일리뉴스(Chicago Daily News)는 그레이엄을 공산주의 공적 1번이라고 명명했는데, 소련 신문들도 공명한 견해였다.70)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빌리 그레이엄의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1970년대 초에 접어들어 닉슨의 중공과의 화해정책과 미국 문화의 변화와 함께 점차로 변하여 조금씩 약화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에 대한 빈도가 1970년대 초반에 줄어들기 시작해서 1970년대 후반에는 점점 줄어들어 1980년대 초반이 되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71) 1972년 전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공산주의가 무신론적인 입장이 아니라면,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화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4년에 그는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존하는 것을 배워야만 하고, 심지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72)

1973년 여의도에서 집회를 할 때, ICCC 계열의 목회자들은 빌리 그레이엄의 반공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지 못하다고 하여 참석을 거부했는데, 당시 그의 입장 변화를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레이엄은 보수쪽에서는 반공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고 진보는 사회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으면서도 정치체제보다는 복음전파를 더 중요시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 정부와 복음전파에서뿐만 아니라 반한 감정 무마에서도 협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은 1973년 7월 7일 유럽순방 중에 빌리 그레이엄에게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전도대회에 대하여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국 정부가 6.23선언을 한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해외 우리 동맹과 지지자들의 ... 모든 공감적 협력과 우호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유감스럽게 미국에 있는 일부 정치가들은 ...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의 공통의 피를 흘린 것과 공통적인 믿음의 연계를 잊고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미국과 한국 국민 사이의 진정한 이해를 강화시키는데서 당신의 적극적인 협력을 간청한다.”라고 언급한 후에 더 상세한 것은 7월 말이나 8월 초에 방문할 빌리 김(김장환 목사)으로부터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마치고 있다.73) 이 서신 내용으로 볼 때 김종필 국무총리로부터 김장환 목사를 통해 빌리 그레이엄에게 반한 여론 무마를 위한 어떤 구체적인 협력 요청 사항이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4년의 엑스플로 74의 주강사는 빌 브라이트 CCC 총재였다. 빌 브라이트는 4영리 전도 방법을 가지고 캠퍼스 전도 운동을 펼쳤다. 미국 풀러신학교에 유학하던 김준곤이 그를 만나 조직된 한국 CCC는 1960년대 초부터 학원사역을 확대하다가 1970년대 대상을 민족으로 확대하였다.74) 이를 위해 1970년 민족복음화 운동을 선언하였고, 1971년 1월에 김준곤 목사는 “200만 기독교도가 총동원되어 전도로 민족의 혁명을 이룩하는 일이 가장 빠르고 좋은 민족통일의 길이요 민족이 잘 사는 길이다.”라고 선언하고 대형집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했다.75) 1972년 빌 브라이트는 미국에서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CCC 활동의 획기적인 확장을 가져왔던 Explo 72를 개최하였다. 김준곤은 이 대회에 참석하여 Explo 74를 한국에서 개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김준곤 목사가 지도하는 CCC는 1974년 단일 선교단체로서는 최대 규모의 엑스플로 74를 개최하였고 빌 브라이트가 주강사로 참여하였다.76)

1970년대 이들은 미국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79년과 1980년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카터의 패배와 도널드 레이건의 승리를 위해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레이엄과 브라이트는 1979년 10월에 달라스에 함께 모여 기도한 후에 지지 후보를 결정하고자 저명한 여러 명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케네디와 닉슨이 대결하던 때 했던 전략, 공개적으로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사적으로는 닉슨을 지지하던 바와 같이, 이때에도 사적으로 레이건의 승리를 위해 활동하였다.77) 빌 브라이트와 빌리 그레이엄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 복음주의 확산을 위해 함께 활동하였다.


IV.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미국교회와 정계에 대한 반한 여론 무마 활동

1. 한국기독실업인회 조직과 활동

한국교회가 민족복음화 운동을 펼치고 있던 1970년대 접어들어 평신도 지도자들로 조직된 기독실업인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기독실업인 전국대회가 1973년 9월 26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보수적 신앙을 가진 장로와 집사들이 조직한 기독실업인회는 1967년 5월 황성수를 초대회장으로 전국 조직으로 탄생하였다. 이 조직은 1973년까지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973년에 1차 전국대회를 개최한 후에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78)

한국교회의 다양한 수준에서 진행되던 민족복음화가 1973년에 기독실업인회를 중심으로 산업현장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에 당시 민족복음화 운동을 주도하던 김준곤 목사와 한경직 목사들이 관여하였다. 이와 함께 김인득의 아들이 1972년에 박상희의 딸과 결혼하여 김종필과 동서지간이 되고, 박정희와 사돈 간이 되어 정재계를 잇는 혼맥도 형성되어 있었다.79)

기독실업인회는 김준곤 목사가 진행하던 대통령조찬기도회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3년의 제1회 대회에서 김준곤은 “경제발전에서 본 기독실업인의 역할과 예수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한경직 목사는 “대전환기의 민족과업의 달성을 위한 기독실업인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설교하면서 기독실업인들의 전도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기독실업인회는 직장선교를 시행하여 민족복음화를 달성하고자80) 산업인 복음화 운동과 만 교회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2. 기독실업인회 회장 김인득 장로와 김장환 목사의 대미 민간외교 활동

산업현장의 복음화를 추진하던 기독실업인회의 회장 김인득 장로는 여의도 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설교를 통역하여 유명해진 김장환 목사와 함께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유신체제의 인권 탄압 문제로 반한 여론이 높아지고 다시 미군 철수 주장이 대두되어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자 반한 여론을 무마하고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를 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하나는 자신들이 미국에 가서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남북분단과 남북 대치의 한국의 특수한 안보 상황을 설명하여 반한 감정을 순화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각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초청하여 한국의 특수한 안보 상황을 이해시킴으로써 미군 철수를 유보시키고 미국 내 친한 여론을 조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이런 활동을 위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8만 불의 비용을 들여 13만 통의 편지를 발송하였다.81)

김장환 목사와 김인득 장로, 김인준 장로 등은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1975년과 76년에 걸쳐 3회에 걸친 방미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극동방송 사장 보우만 등이 중심이 되어 지원 활동을 하고,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프레이저 의원의 한국군 지원을 40% 삭감하려는 법안이 더윈스키 수정안에 의해 폐기되었다.

1) 1차 방미 활동

미국종교방송인 32차 총회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1975년 1-2월 사이에 이루어진 1차 방미 활동은 반한 여론을 순화시키는 민간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82) 문공부와 총리실에서는 이들의 활동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김장환 목사와 김인득 장로는 1월 말에 진행된 종교방송인 32차 연차총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대회기간뿐만 아니라 각 지방 순방 때도 기자들과의 인터뷰와 방송출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연차대회에서 2차례의 조찬 모임을 주최했다. 1차 조찬 모임에는 대회장 버터맨 극동방송 본사 부사장과 총무 암스트롱 박사를 초청하여 대회에 참석한 모든 종교방송인들에게 한국의 종교 현황을 정확하게 전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25명을 특별 초청한 2차 조찬 모임에서는 함병춘 대사가 한국의 정치, 경제, 종교 현황을 설명했다. 이 기간 중에 이들은 김영환 공사의 안내로 극동방송 임원인 콘란(John Colan) 하원의원, 침례교도인 더몬드(Strom Thumond) 상원의원, 탤메이지(Hermane Talmadge) 상원의원 등을 만났다. 다분히 반한적이던 탤메이지는 같은 침례교도인 더몬드 의원과 김장환 목사의 설득으로 친한쪽으로 돌아섰다.83) 그래서 김장환은 탤메이지 의원이 20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여 반한 여론이 강하던 애틀랜타에서 성공적으로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다. 1월 29일 연차대회가 끝나고 열린 만찬회 석상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강연이 있었고, 그날 저녁 11시 30분부터는 1973년 여의도 전도대회 실황 녹화가 TV로 방영되어 많은 종교방송인들에게 한국의 기독교세가 얼마나 왕성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들 순방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박정희 정부가 추방했던 오글 목사와의 대담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종교 탄압과 인권 유린을 알리면서 반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1월 29일 김장환 목사와 김인득 장로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엘머 킬보른 성결교 선교사와 함께 뉴욕의 CBS TV의 윌트 크롱카이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오글 목사와 대담하였다. 이 방송에 전 유엔대사이자 당시 뉴욕 시립대학 교수인 임창영과 오글 목사가 반정부적인 질문을 할 때, 김장환 목사는 한국에서 종교 탄압이 이루어지 않는다는 자신의 입장을 명쾌하게 답변하였다.84) 그리고 기독신보는 이 대담 기사를 실으면서 “한국에는 종교 탄압 없다, 오글 목사 TV 토론에서 밝혀”라는 제목을 달았다.85)

그 후에 이들은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워싱턴, 빌리 그레이엄의 고향 살로트, 오하이오주의 톨레도, 아이오와주의 수시티,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 등지를 순방하여 교민들과 유지들에게 만찬회나 오찬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종교 실상과 올바른 현실을 알려 주었다. 이 순방 여행에서 주미대사 함병춘, 주미공사 김영환 등의 협조를 받았다.86) 32차 종교방송인 연차대회에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줄 한국 선전 책자 지급, 상하의원들과의 면담, 오글 목사와 CBS TV 대담, 지방에서 신문 방송 인터뷰 등까지 대사관에서 협조와 주선을 해 주었다.

2) 2차 방미 활동

이들의 2차 방문이 이루어지던 1975년 7월은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하나는 한국의 공산화에 대한 불안감을 줄여주고자 미군 현상유지라는 미국 정부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공산화의 불안감 속에서 진행된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 조치에 대한 비판 여론의 고조에 따른 의회의 인권청문회 개최였다.

미국 내의 상황이 이러한 때인 7월 하순에 이들의 2차 방미 활동이 이루어졌다. 김장환 목사는 7월 말에 열리는 극동방송 하기대회에 참석하고, 김인득 장로는 8월 말에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되는 세계기독실업인회 제38차 연차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87) 정부 측에서 1차 때와 동일하게 한국 소개책자라든지 반공 영화와 필름, 그 밖에 선물을 제공했다.

김장환 목사와 김익준 장로는 김 목사의 양아버지인 칼 파워즈의 고향인 버지니아주의 딕슨 카운티에 도착해서 7월 24-26일까지 전도대회를 열어 5천 명이 넘는 청중에게 한국 종교의 자유와 현실을 알렸고, 26일에는 2천여 명의 청중에게 반공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방송국에 출연하여 한국 실정에 관한 좌담회를 개최하였고, 지역 사업가들 초청 조찬회를 열고 한국 경제발전을 소개하였다. 이들은 7월 26-31일 사이에 극동방송 하기대회에 참석하였다. 김장환 목사는 개회식에서 콘란 의원과 함께 강연하였으며 대회 참가자 1만 명 이상에게 강연과 반공 영화 상영 등으로 친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8월 1-3일에는 시카고를 방문하여 시카고 제1, 2교회인 롤링 메도우 교회와 무디 메모리알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한국의 왕성한 기독교 교세와 종교 자유를 설명하였다. 8월 4-14일에는 김 목사의 양아버지인 예거 장로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머물면서 이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조찬 설교와 강연을 하였고, 지방 사업가들과 오하이오주 유지들에게 한국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미시간 주립대학에는 반한적이고 반정부적 한국 교포와 유학생들을 상대로 김익준 장로가 강연을 하였다.88)

8월 15일에는 캔자스시티에서 김인득 장로와 합류하여 시장을 방문하고 6백여 명 참여한 오찬회와 1천여 명이 참여한 만찬회를 하면서 한국의 바른 현실과 수난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16일 토요일 집회에는 2천 명이 참여했는데, 김인득 장로가 한국 실상을 설명하고 한국 홍보 책자를 기증하였다. 지역 TV와 방송에서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과 한국의 안보, 한국의 종교 현황으로 인터뷰와 좌담을 하였다.89) 18-20일에는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를 방문했는데, 이곳에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본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한파인 도널드 프레이저 하원의원의 출신지였다. 이곳 십대선교회 책임자 위플의 주선으로 두 차례 이 고장 유지들과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고, 목사들만 60여 명 모아 조찬회를 개최하였다.90)

8월 21-24일에는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덴버 38차 세계기독실업인 연차대회에 11명의 한국인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첫날 열린 한국인의 밤에서 김인득 회장이 강연하였다. 대회장을 비롯한 50여 명의 주요 인사들에게 오찬을, 저녁에 초청 주강사 12명에게 만찬을 베풀면서 한국 홍보 책자와 선물을 증정하였다. 덴버시 유지와 종교계 대표들과 2차 만찬회를 하면서 세계 평화와 한국 안보를 위한 기도와 반공 영화를 상영하였다.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반한적이고 반정부적인 교포들이 많아 여론의 환기가 필요했다. 김인득 장로는 한국인 교회에서, 김익준 장로는 미국교회에 가서 한국 안보와 종교 상황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 80여 명을 초청하여 김인득 기독실업인회 회장, 황성수 국제관계 담당 부회장이 한국의 종교 자유, 안보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91)

3) 해외 인사들의 초청

이들은 미국 순방외교를 하면서 반한적인 미국인들과 교포들의 초청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김인득 장로는 한국기독실업인회 이름으로 1975년 10월 13-20일 사이에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재미교포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각 공업단지를 비롯한 조국의 발전상을 두루 시찰하고 모국 교회와의 유대를 협의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12월 15일에 재미교포 실업기독인회를 발족하여 한국 정부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같은 해 10월 20-23일에 “그리스도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 이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아시아 기독실업인회 창립총회를 주최하였고,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온 37명 대표와 국내 회원 294명이 참석하였다.92)

그리고 김장환 목사는 9월 중순 열리는 의정부, 천안 등지의 전도대회 강사로 미국의 저명한 J. E. 다니엘 박사를 초청하였다. 그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신문, 잡지 등 40여 종의 간행물을 발간하는 출판인이자 언론인이고 목사였다. 그는 한국의 왕성한 기독교 현황과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직접 목격하였다.93) 그는 10일 남짓한 방한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후 200여 명의 상원의원들 앞으로 자신의 방한 소감과 한국 지지 당부의 서한을 발송하였고, 그가 발행하는 여러 간행물에 자신의 방한 소감을 게재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한국 정부의 “하나의 목표는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정부 타도를 위한 불법적인 선동만 하지 않으면 한국 내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출국령을 받은 성직자들은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본인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대한민국 국민만큼 미국의 원조를 고맙게 여기고 요긴하게 쓰는 국민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예배드리며 국민 각자가 원하는 대로 생활하는 국민을 본 일이 없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은 누구에게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라고 하였다.94)

이들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1975년 10월 23일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김종필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기독실업인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믿음의 사도”라는 요지의 치하를 하고, 김익준, 김인득, 김장환의 2차 미국 순방을 치하하였다.95) 이러한 모임을 통해 이들의 활동이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4) 3차 방미 활동

이들의 제3차 방미 활동은 1976년 2월과 3월에 걸쳐 미국 종교방송협회 33차 연차대회와 미국 기독교 청년지도자 32차 대회에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그레이엄 영화사에 초청되어 TV로 방영할 2시간짜리 전도 영화에 출연하였다.96) 3차 순방에는 김인준, 김장환, 김익준과 함께 전 통일원장관 신도성이 동행하였다. 이들은 2월 21-25일 동안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제33차 종교방송인 및 기독교지도자 대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함병춘 대사와 상의하여 미 대사관에 대회장과 총무를 비롯한 각 단체 책임자 30여 명을 오찬에 초대하여 친한 활동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왈도 예거 장로가 기독봉사회 회장 명의로 회원 3,000명 앞으로 “한국은 미국의 혈맹 우방이다. 그 실정을 바로 알고 계속 도와주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하였다.97) 이들은 또한 미 재무장관, 대통령보좌관, 정부관료 30여 명이 모인 백악관 조찬회에 참석하였고, 콘란 의원 외 10여 명의 의원 전문위원들과 오찬을 하며 한국의 종교와 인권을 주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익준 장로는 유정회 의원이었으므로 미 의회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상원의원들과 교제하였다.

2월 26-29일에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교포와 각계각층 미국인 7천 명을 대상으로 좌담, 연설, 설교 등을 하여 한국의 바른 현실을 알리고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여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지역은 오글 목사 거주 지역이어서 한국의 종교 상황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3월 1-4일을 보내며, 국제기독교 청년지도자 대회에 참석했는데, 김장환이 주강사로 1천 명에게 바른 한국관을 심어주고, 제일 큰 침례교회에서 신도성 박사와 함께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한국을 방문했던 목사 30여 명과 실업인들에게 환영조찬회를 베풀었다.98) 이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을 때, 1976년 3.1절에 일어난 명동사건을 질문했으며, 이 사건이 반한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1976년 3월 17일에는 카터 민주당 후보가 5년 내에 미 지상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민주당 진보파 의원들의 의견과 일치하였다. 이 무렵 워커힐에서 극동방송 국장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종전에는 아세아 센터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는데, 아세아 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와 김익준 의원의 노력으로 1976년 회의를 한국으로 유치하였다. 이 회의는 한국의 대공 방송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공산권에 대한 복음전파를 위한 한미 유대 강화를 위한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인득 장로가 대회장, 김장환 목사가 집행위원장이 되어 4월 말에 진행된 회의에서는 극동방송 본사 사장인 보우만 박사와 부사장이고 미국종교방송인 대회 대회장인 버터맨 박사, 그리고 극동방송 본사 이사이며 채널 22의 캘리포니아의 KWHY TV 윌리 번 사장 외 37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반공국가로서의 한국을 미국과 세계에 새삼 강조한 종교외교와 민간외교의 장이었다.99) 그래서 극동방송 본사 사장인 보우만 박사는 이 대회에서 한국의 주최측과 정부측이 베풀어준 환대에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프레이저 안 413절을 부결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5) 프레이저 안 413절 부결

프레이저 안 413절100)은 1976년 외국 안보지원과 무기수출 통제법안의 수정안 속에 413절 한국에 대한 원조제한법이다. 하원이 이 통제법안을 의결하였으나 포드 대통령이 비토권을 행사하여 다시 하원으로 반려되었다. 413절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총액을 행정부가 1976-77년 기간에 요청한 4억 8천 6백 8십만 달러 가운데 40%에 해당하는 2억 달러를 삭감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행정부는 “413절은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가 가까운 장래에 군사적 자력화를 이룩하는 것을 지원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불안정을 가져올 것입니다.”라는 이유를 붙여 의회에 반려하였다.101)

행정부가 반려한 안을 수정한 안이 1976년 6월 2일 하원 전체 회의에 상정되었다. 프레이저는 수정한 413절(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총액은 1975년 1월 1일부터 1977년 10월 30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2억 9천만 달러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102) 프레이저 의원은 수정안을 제안하면서 한국에서는 10월 유신 이후 계속적으로 인권이 침해당했고, 더구나 3.1절 명동사건 같은 종교탄압과 인권침해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일리노이주 더윈스키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한할 경우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프레이저 의원이 제안한 수정안을 폐기하자는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이 두 안건을 놓고 6월 2일에 4시간 동안 토론한 후에 표결에 붙여져 찬성 241, 반대 159, 기권 32표로 더윈스키 안이 통과되었다.103)

극동방송 미국 사장인 보우만은 이 표결 직전에 더윈스키 의원과 몇몇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하였고, 그 뒤에 다른 의원들에게 “친애하는 동료 의원들”에게 라는 편지를 썼다. 그가 더윈스키 의원을 만나러 갔을 때 한국 국회의 국방위원장 정래혁도 있었다. 보우만이 더윈스키를 비롯한 의원들에게 제시한 자료들은 김장환 목사와 김인득 장로가 2-3년간 보우만에게 우송했던 자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민간외교도 더윈스키 안이 통과되는 과정에 일조를 하였다.

1977년 1월 인권문제를 주장하는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후 프레이저는 1977년 2월 3일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30만 불의 예산을 확보하여 18개월간 한미 관계의 전반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김장환 목사는 1979년 1월과 4월에 도미하여 카터 대통령을 만났다. 1979년 6월 카터 대통령 방한 시 김장환 목사가 통역을 담당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1차 회담 후에 카터 대통령이 한국 인권문제를 들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나서면서 두 정상의 1차 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다. 2차 회담을 앞두고 예배드리러 여의도침례교회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김 목사는 “박 대통령은 애국자다. 깨끗하고 가난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이 박 대통령을 전도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카터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하며 2차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104) 이러한 일화를 보면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대통령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V. 나가는 말

1970년대는 중소와 데탕트를 추구하는 닉슨 독트린으로 미군 철수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권유로 남북대화가 시작되어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6.23선언 등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가운데 박 대통령은 1972년에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유신체제하에서 1974년과 75년에는 긴급조치 1, 4, 7, 9호 등이 발표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생겨나 수감되었다. 이러한 인권 탄압 조치에 대하여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의원이 중심이 되어 청문회를 실시하면서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그 후에 포드는 1975년 12월에 신태평양 독트린을 발표하여 월남이 패망한 후에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 남을 것이며 주한미군의 현상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된 카터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5년 내에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가 당선된 후에 미군 철수는 여러 가지 반대에 부딪쳐 결국 유보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인권외교는 박정희 대통령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고, 그러한 간접적인 영향하에서 10.26사태가 일어나 박정희는 서거하였다. 1970년대 한미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미군 철수와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에 따른 안보불안과 그에 따라 성립된 유신체제하에서의 인권 탄압이었다.105)

이러한 기간 동안에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 운동을 추구하였다. 민족복음화를 위해 1973년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1974년에 엑스플로 74, 77년에 민족복음화 성회 등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대형 전도집회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하에 있던 여의도 광장에서 열리면서 국가의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민족복음화 운동은 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 사명과 함께 국가의 지원이 만나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국가와 협력할 수 있었다. 첫째, 한국교회는 박정희 정부가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강조했던 국가안보위기 속에서 반공정신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국가와 협력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과 기독교인들은 월남의 공산화, 남침용 땅굴의 발견, 그리고 북한의 군사력 증강 속에서 북한의 남침위협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었다.106) 따라서 이때 반공을 지지하는 데서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없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진보진영의 교회들도 그러한 발표를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모든 교회들은 반공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107) 둘째, 민주화와 관련하여 진보 교회들이 한국 정부가 인권을 탄압하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하여 형성된 국제적 비판 여론을 무마하는 활동이었다. 당시 보수 교회들은 진보 교회 지도자들의 민주화 주장과 인권의 강조,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강조하는 것은 목회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며 정교분리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교회들은 정부의 편의 제공 속에서 대형집회를 열면서 한국교회 성장을 도모하였고 동시에 한국에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지지하고 선전하는 입장에 섰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상호 간의 협력 속에서 여의도의 대형 전도집회가 진행되었다.

당시의 한미 간에 미군 철수를 둘러싼 갈등 가운데 유신체제의 긴급조치하에서 인권 탄압이 문제가 되어 미국 내에서 반한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삭감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였다. 이 때 가장 적극적으로 반한 감정을 잠재우며 미군 철수를 유보시켜 한국의 안보를 굳건하게 하고자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지원이 지속되도록 노력했던 인물들이 3차에 걸친 방미 활동을 했던 김장환 목사와 기독실업인회 회장인 김인득 장로, 유정회 의원인 김인준 장로 등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976년의 한국 지원 예산을 감축하려던 프레이저 의원의 계획을 무산시키며 더윈스키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복음주의 교회들의 민족복음화 활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미 관계가 갈등관계 속에 들어갈 때는 미국교회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반한 여론을 순화시키고 미군 철수를 막아 안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진보적인 역사가들은 교회와 정치의 유착 관계라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19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 교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미흡했던 점은 오늘날 우리가 극복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끝내 민주화로 이행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이 그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거의 감당하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2018년 11월 22일에 개최한 “한미 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한 논문임

Notes
4) 박정희 대통령은 조용기 목사를 만나 “새로운 마음의 운동”이란 긍정신학의 말을 듣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목회사상에 대한 신학적 조명” [박사학위논문, 한세대학교, 2009], 178). 새마을 운동에는 조용기 목사 외에도 김용기 장로, 유태영 박사 등이 주요한 역할을 한 기독교적인 정신적 계몽 운동이라는 평가도 있다(임병진, “새마을 운동의 태동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연구,”『로고스경영연구』제13권 제1호 [2015], 59).
13) 조철호, “1970년대 초반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과 한미관계,”『평화연구』Vol. 9 (2000): 206-207. 조철호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대미외교에서의 민족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26) 첫째, 긴장완화라는 이름 밑에 열강들이 약소국을 희생의 제물로 삼을 수 있고, 둘째, 비상조치가 평화통일과 번영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할 것이며, 셋째, 남북대화의 적극적 전개와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박대통령 특별선언 전문,”〈경향신문〉, 1972년 10월 18일자; 김연철, “7·4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역사비평』Vol. 99 (2012): 228.
32)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이 남한에 비해 군사비 규모와 군사력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 1974년부터 율곡사업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율곡사업은 1974-1981년간에 3조 1,402억원을 투자하여 주요 전력을 증강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하였으나 투자가 분산되고 무기체계 선정의 착오로 운영유지비가 급증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북한 전력비가 1973년의 50.8%에서 1981년도에는 54.2%로 8년 동안에 불과 3.4%의 전력 격차를 줄이는 데 그쳤다. “율곡사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670 (2019년 2월 19일 검색).
35) Ibid., 43.
36) Ibid., 45.
37) Ibid., 62.
40) Ibid., 203. 2005년 12월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재조사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9년 9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게 법원은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41) Ibid., 211.
47) Ibid., 146-47. 이 책은 청문회 날짜를 4월 30일로 적고 있으나, 실제 날짜는 7월 30일이었다.
52) Ibid., 293.
53) Ibid., 294.
55) Ibid., 226.
58) 1976년 8월에 3월 1일의 삼일절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문익환 목사는 징역 8년, 윤반웅 목사와 문동환 목사와 이우정은 징역 5년, 서남동 목사 징역 4년, 안병무 박사와 이해동은 징역 3년형을 받았다. 고지수, “1970년대 초 한국기독교장로회 반 유신운동,” 283.
68) Ibid., 79.
72) Ibid.
95) Ibid., 163.
100) 미 하원 민주당 소속 도널드 M. 프레이저 의원이 제출한 ‘1976년 외국 안보 지원과 무기수출 통제법안의 수정안 속의 413절로 한국에 대한 원조 제한’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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